CJ·쿠팡 기싸움 7개월째…끝 보이지 않는 ‘로켓배송 중단’ 사태
LG생활건강 사례 등 갈등 반복…거대 이커머스사 입김 강해져
가격 인하 ‘순기능’…소비자의 선택권 축소 등 ‘역기능’ 우려도
쿠팡 앱에서 ‘즉석밥’을 검색하면 ‘로켓배송’ ‘로켓와우’ ‘로켓프레시’ 아이콘을 단 각종 상품들이 줄지어 뜬다. 하림 ‘The미식’, 오뚜기 ‘맛있는 오뚜기밥’, 동원F&B ‘쎈쿡’ ‘양반’에서 쿠팡 자체브랜드(PB) ‘곰곰’까지 다양하다. 배송 시간 등에서 차이가 있을 뿐 모두 쿠팡이 직접 매입해 판매하는 상품이다.
하지만 즉석밥 시장 점유율이 70%에 달하는 CJ제일제당 ‘햇반’ 옆에는 로켓 아이콘이 붙어 있지 않다. 쿠팡이 아닌 오픈마켓 판매자가 취급하는 상품이라는 의미다. 1년 전만 해도 쿠팡의 빠른 배송 시스템을 통해 햇반을 받아볼 수 있었지만 지금은 사정이 다르다.
햇반 납품가 문제로 시작된 CJ제일제당과 쿠팡의 힘겨루기가 7개월째 지속되고 있다. 식품 1위 기업과 e커머스 1위 기업의 ‘강 대 강’ 싸움은 유통시장 신흥강자로 떠오른 쿠팡의 영향력을 보여주는 사건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 새로운 일은 아니지만
갈등이 본격화된 건 지난해 11월 쿠팡이 CJ제일제당 제품 발주를 중단하면서다. CJ제일제당은 쿠팡이 과도한 마진율을 요구했다고 주장했다. 반면 쿠팡은 CJ제일제당이 수차례 가격 인상을 요구하며 약속한 발주 물량을 제때 공급하지 않았다고 맞섰다. 현재 햇반을 비롯해 비비고 만두, 스팸 캔, 해찬들 고추장 등 CJ제일제당의 주력상품 대부분을 로켓배송으로 만날 수 없는 상태다.
납품가를 둘러싼 유통사와 제조사 갈등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1990년대 국내에 등장한 대형마트가 대량 구매를 통해 구매단가를 낮추고 PB 상품을 내놓으며 영향력을 키웠다. ‘큰손’ 앞에서 제조사들은 예전만큼 힘을 쓰지 못한 채 유통사들과 종종 갈등을 빚었다. 2000년대 후반 이마트의 PB 상품 확대 방침에 CJ제일제당 등이 부딪치자, “꼬리(유통)가 몸통(제조)을 흔들 만한 사건”이라는 분석이 나오기도 했다.
이번 사건은 쿠팡이 오프라인 매장이 없는 ‘e커머스’ 기업이라는 점에서 상징적이다. 또 다른 형태의 유통사 쪽으로 주도권이 기울고 있다는 방증인 셈이다.
유로모니터에 따르면 2010년 창업한 쿠팡은 지난해 국내 유통시장 점유율에서 신세계그룹(13.4%)에 이은 2위(9.8%)를 기록했다. 교보증권이 추정한 지난해 국내 e커머스 시장 점유율에선 24.5%로 선두를 달렸다. 이어 네이버(23.3%), 신세계의 SSG닷컴·지마켓(11.5%) 순이었다.
쿠팡과 제조사의 갈등이 표면 위로 드러난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2019년 LG생활건강과 갈등을 빚은 바 있다. LG생활건강은 쿠팡이 다른 온라인 유통업체에서 판매하는 제품 가격을 올리라고 강요하는 한편 쿠팡 판매 가격은 무리하게 낮추라고 요구했다며 공정거래위원회에 제소했다. 2021년 공정위는 쿠팡의 요구가 불공정거래 행위에 해당한다고 보고 시정명령과 함께 과징금 부과를 결정했다. 이 사건으로 LG생활건강은 쿠팡에서 철수했다.
업계에서는 CJ제일제당처럼 규모가 크고 브랜드 파워가 있으니 쿠팡에 맞설 수 있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업계 관계자는 “규모가 작은 기업들은 유통사와 협상하기 더더욱 쉽지 않은 환경”이라며 “CJ제일제당이 업계 1위 기업이니 이렇게 길게 끌고 갈 수 있는 것”이라고 했다.
■ 협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쿠팡과 CJ제일제당 모두 “협상을 이어가고 있다”는 입장이다. CJ 입장에선 주요 온라인 판매처를 포기하기 힘들다. 쿠팡한테도 제품 다양성 측면에서 경쟁력을 갖기 위해선 CJ제일제당과의 관계를 끊기 어렵다.
양쪽은 자사의 행보가 상대를 겨냥했다고 해석되는 것을 경계하면서도 신경전을 이어가고 있다. CJ제일제당은 지난 8일 이마트·SSG닷컴·G마켓 등 신세계 유통 3사와 파트너십을 맺고 공동 상품 개발에 나선다고 밝혔다. 네이버 등 커머스 업체와도 손잡고 적극적으로 프로모션을 진행하고 있다.
쿠팡은 지난 11일 ‘대기업 그늘에 가려진 中企 쿠팡서 빛 본다’는 제목의 보도자료에서 “독과점 식품기업의 제품이 쿠팡에서 사라지면서 중소·중견기업 제품 판매량이 급증한 것으로 나타났다”고 밝혔다. 올해 1~5월 PB 제품인 ‘곰곰’ 즉석밥 등을 만드는 중소기업 상품 판매가 전년 동기 대비 7270% 늘었다고 전했다. 4일 뒤에는 “올해 1분기 식품 판매액이 1년 전과 비교해 20% 성장했다”는 자료를 냈다. CJ제일제당 제품이 빠졌는데도 오히려 식품 매출이 늘었다는 뉘앙스다.
또 다른 업계 관계자는 “협상을 계속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두 업체의 갈등이 ‘전쟁’처럼 비치는 상황에서 아무런 대응 없이 가만히 있기는 힘들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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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쟁을 통해 상품이 저렴해진다면 소비자 입장에선 긍정적이다. 다만 쿠팡을 자주 이용하는 고객에 따라선 구매할 수 있는 상품의 선택지가 줄어들 수도 있는 상황이다. 나아가 거대 유통사들이 과도하게 납품단가 인하를 요구할 경우 납품 중소기업의 권리 침해로 이어질 가능성도 있다.
장기화된 갈등의 배경으로 쿠팡의 PB 경쟁력 강화를 꼽는 시각도 있다. 서용구 숙명여대 경영학과 교수는 “지금까지는 쿠팡이 e커머스 시장 점유율을 높이기 위해 경쟁했다면, 이제는 주도권을 쥔 만큼 PB 개발 여력이 생긴 것으로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서 교수는 “품질은 비슷한데 가격이 더 저렴하다는 점에서 한국의 PB 시장이 더 커질 필요가 있다”면서도 “단기계약 등 중소기업에 불리한 환경을 개선해나가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