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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현의 권력과 권력의 재현

일어났던 일을 남김없이 기록한다고 해서 그대로 ‘역사’가 되는 것은 아니다. 누가 언제 어떤 입장에서 서술하는가에 따라 서로 대립하는 여러 관점의 이야기들이 있을 따름이다. 그러하므로 ‘있었던 그대로의 역사’는 일종의 환상일지도 모른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을 낱낱이 쓴다고 해서 내가 하고 싶은 말이 온전히 재현되는 것도 아니다.

류동민 충남대 경제학과 교수

류동민 충남대 경제학과 교수

재현의 근본적 불가능성 같은 철학적 명제를 얘기하려는 것은 아니다. 내가 어떤 정치적 맥락에 놓여 있는가에 따라 할 수 있는 말과 할 수 없는 말이 결정됨을 얘기하고자 함이다. 강자의 언어와 약자의 언어는 결코 같은 힘을 갖지 않는다. 강자의 말이 위에서 아래로 흐를 때, 때로 그것은 분수처럼 흩어지며 최초에 의도하지도 않았던 파급효과까지도 가져온다. 약자의 말은 아래에서 위로 치솟지 못하고 입속으로 삼켜지거나 스러진다.

경제학 교과서에서는 정보를 많이 가진 쪽이 그렇지 못한 쪽에 대해 권력을 행사할 수 있다고 가르친다. 그런데 현실에서는 권력을 가진 쪽으로 정보가 흘러가며, 실제로 정보를 많이 가지고 있는가와 무관하게 많이 가지고 있는 것으로 인정된다. 역사적으로 시대와 장소를 불문하고 수많은 독재자들이 ‘현지지도’나 ‘교시’, 심지어는 그에 만족하지 않고 어록이나 철학적 저술까지 남기려 했고 남길 수 있었던 까닭이다.

수능시험에서 킬러 문제를 배제해야 한다는 권력의 언어가 내뱉어지자 그 권력사다리의 아래쪽에선 “문제 해결 과정에 상당한 시간이 요구되거나 실수를 유발”한다거나 “상당히 고차원적 접근방식을 요구”한다는 등의 정의가 만들어진다. 취미모임의 회칙으로서도 추상적이고 엉성한 것들이지만, 내겐 그 문장을 붙들고 모니터 앞에 앉아 야근했을지도 모를 어느 공무원의 퀭한 눈빛이 먼저 떠오른다. 인터넷엔 벌써 간단한 나눗셈으로 풀 수 있는 초등 수학문제를 엉뚱한 이차방정식으로 만들어 푼 다음 초등수학 킬러 문제라며 비아냥대는 패러디가 돌아다닌다. 학생들을 성적순으로 촘촘히 줄 세우지 말자던 이른바 ‘진보’는 킬러 문제가 필요한 듯 주장하고, 변별을 통한 교육의 수월성과 자유경쟁의 원리를 그토록 강조하던 이른바 ‘보수’는 어느새 사교육 분쇄에 목숨이라도 건 듯 행동한다.

킬러 문항 색출을 위한 위원회 구성이란 모든 객관식 문제에는 반드시 하나의 답이 있다고 믿는 사고구조만큼이나 단편적인 논리의 결과물이다. 드라마나 예능 프로그램의 주역으로까지 등장했던 일타강사들은 공공의 적이 된다. 1980년대 이후 출생이 대부분인 그들을 좌파 운동권세력이라 몰아붙이는 시간 착오에서 비극은 희극으로 바뀐다. 사슴을 가리켜 말이라 하는 고사성어에나 나오던 일화가 현실에서 재현되는 이 시대, 이 분수효과의 끝이 어디일지는 가늠하기조차 어렵다.

문제는 수능만이 아니라 거의 모든 영역, 정확하게 말하자면 권력이 선별적으로 규정하는 모든 영역에서 비슷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기준금리는 올라도 금융감독자의 말 한마디로 은행금리는 내리고, 고위 경제 관료의 발언에 라면이나 과자 가격이 일부지만 실제로 내려가도, 자유시장의 원리를 외치던 그 많은 경제학자들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는다. 2017년 대통령선거에서 좌우를 가리지 않고 대다수 유력후보들은 최저임금을 1만원으로 인상하겠다고 공약했다. 그러나 막상 문재인 정부에서 최저임금 인상을 결정했을 때 대선 당시 똑같은 공약을 만들거나 적어도 묵인했던 다른 후보 캠프의 경제학자들은 앞장서서 시장논리 침해라며 공격했다. 지금은 그들조차 명백한 시장논리 침해에 침묵하고 있다. 경제학적 의미에서 카르텔이라 부를 근거가 별로 없는 일타강사들의 고소득에 대한 공격에 앞장선 한 보수언론이 앞서 종합부동산세나 법인세 인상 등에 맞서 부자에 대한 증오를 거두라고 일갈했다는 사실 또한 마찬가지일 것이다.

역사발전에 그나마 법칙이라 부를 수 있는 것이 존재한다면, 인간의 자유가 확대되는 방향으로 변화해간다는 것일 것이다. 밀턴 프리드먼의 이념적 할아버지쯤 되는 프리드리히 폰 비저가 최근 한국에서도 번역된 <권력의 법칙>에서 주장한 내용이다. 그렇지만 누구의, 무엇을 위한 자유인가는 추상적 구호로서가 아니라 구체적인 영역에서 구체적으로 결정되는 것이다. 당장에는 그러한 결정을 독점한 것처럼 보이는 그 소수가 결국에는 어떤 식으로건 대가를 치르게 된다는 것, 그때쯤이면 권력의 재현은 지속되지 않는다는 것, 바로 그것이 재현의 권력을 지닌 이들에게 줄 수 있는 충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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