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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럽급여, 적나라한 저소득자 ‘혐오’

입력 2023.07.18 03:00

수정 2023.07.18 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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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기빈의 두 번째 의견] 시럽급여, 적나라한 저소득자 ‘혐오’

가진 것 없는 이들에 대한 혐오는 가장 보편적이고 자주 자행되는 문명의 ‘못된’ 버릇이다
‘시럽급여’ 등의 자극적인 언사가 아무렇지도 않게 나오는 것을 보면서 나는 또 한번 이게 적나라한 ‘혐오’라는 생각이 들었다
햄릿의 유명한 독백 중 하나는 ‘insolence of office’인데, 한 영문학자는 이렇게 번역했다. ‘고위 공직자들은 우리들을 개·돼지로 본다’

나는 ‘혐오’라는 말을 별로 좋아하지도 않고 잘 쓰지도 않는다. 현실에 이런 현상이 없는 것은 분명히 아니다. 사회의 위계 구조에서 자신들보다 낮은 위치에 있다고, 한마디로 ‘만만해 보이는’ 이들이라고 해서 마구 편견과 공격을 퍼붓는 행태는 분명히 존재한다. 하지만 이걸 일률적으로 ‘혐오’라고 이름을 붙이게 되면서부터 누구나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남들을 공격하기 위해 이 말을 남용하고 오용하게 되었고, 그 때문에 ‘혐오’가 다른 ‘혐오’를 줄줄이 새끼치기하는 현상을 너무나 많이 보았다.

홍기빈 정치경제학자

홍기빈 정치경제학자

하지만 이번에는 다르다. 지난주 당정협의회에서 실업급여 하한액을 낮추거나 폐지하겠다면서 내뱉은 말은 분명히 저소득자들에 대한 ‘혐오’가 맞다. 우선 이러한 주장을 내놓은 근거가 과연 사실관계와 부합하는지에 대한 의구심이 솟았다.

우리나라에서 실업급여를 타는 이들은 ‘시럽 맛을 보려고’ 직장을 그만두는 베짱이들이 아니라 비자발적 실업, 즉 ‘타의로 잘린’ 사람들뿐이라는 점을 전혀 언급하지 않고 있다. 물론 예외적인 경우들이 있지만, 그것들도 알고 보면 사실상 도저히 더 일할 수 없게 된 경우에 불과하다. 심지어 비자발적 실업자들조차 잘 타고 있지 못하는 것이 지금 우리의 실업급여이다.

한국노동연구원이 지난해 말 발간한 보고서에 따르면, 전체 실업급여 수급률은 21.3%에 그치며, 특히 임시직·일용직 등 불안정 노동자의 실업급여 수급률은 15.8%에 불과하다. 게다가 30세 미만의 경우는 6.9%로 더욱 낮다고 한다. 이직이 잦거나 노동 시간 자체가 짧으면 고용보험의 적용을 받지 못하도록 되어 있기 때문이다. 임시직·일용직 중 실업급여를 받지 못한 이들의 86%는 “실업급여 수급 조건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다(미디어스, 7월14일, 탁종열, “실업급여 말 바꾼 노동부, ‘시럽급여’ 한통속 보수신문”). 그런데 마치 나무에 달린 맛있는 바나나를 따먹으며 이 밧줄 저 밧줄로 옮겨다닌다는 그 ‘시럽 빠는 실업자들’은 도대체 어디에 있는 것일까?

그래서 근거로 든 숫자를 보다가, 그 계산 방식에 놀랐다. 이 실업급여 하한선 때문에 지난해 수급자 163만명 중 무려 28%에 달하는 45만명이 실업 이전보다 더 많은 액수를 지급받았다고 하지만, 이는 실측이 아니라 세금과 사회보험료로 세전 소득의 10.3%가 빠져나가는 것으로 가정해 추산한 수치일 뿐이다. 이미 여러 매체에서 연소득 2000만원 이하에서는 실효세율이 0.1% 정도로 근로소득세를 거의 내지 않는 데다 사회보험료 또한 두루누리 지원 사업 등이 지난 10년간 시행돼 왔으므로 20% 정도만 내는 저임금 노동자들이 많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이를 감안해보면 그 비율은 28%가 아니라 기껏해야 5% 남짓일 것이라는 추정도 나오고 있다. 이렇게 민감한 사안에 이렇게 파격적인 조치를 하겠다면서 이렇게 허술한 주먹구구의 숫자를 내미는 모습에 놀라지 않을 수가 없다.

주먹구구식 셈법에 놀라

둘째, 실업급여의 기능과 성격 그리고 운영에 대한 일체의 고려 없이, 실업급여 지급액 증가의 원인을 전적으로 저임금 노동자들의 도덕적 해이와 타락의 문제로 몰아붙이는 것을 보고 아연실색했다. 실업급여 지급액이 늘어나고 반복적으로 수급하는 이들이 늘어나는 원인은 아주 다양하며, 특히 지금은 기술 패러다임 및 산업 구조의 변화 그리고 이에 수반되는 노동 시장 구조 전체의 급격한 변화에서 나타났을 가능성이 아주 크다. 몇 개월 간격으로 취업과 실업을 반복하는 이들이 늘어난 이유는 ‘시럽급여를 빨아먹는 재미에 중독된’ 탓이 아니라 노동 시장에서 제공되는 일자리의 종류가 더욱 파편화되고 불안정해진 것에 있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그토록 온 세상을 시끄럽게 만들고 있는 로봇과 인공지능(AI)이 노동 시장에 던지는 충격을 누구부터 얻어맞게 될지 생각해 본 적이 없는가? 식당에서 매일 마주치는 음식 서빙 로봇을 보면서 어제까지 저 일을 하던 분들은 어디로 갔을까라는 질문은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는가? 저임금 노동자들 가운데 취업과 실업의 반복 주기가 짧아지고 수급액이 늘어난 이유는 ‘시럽 빠는 재미 중독증’ 때문인지 (저임금 분야) 노동 시장의 구조적 변화 때문인지, 어느 쪽이 더 클 것인가?

더욱이 실업급여의 성격과 목적에는 ‘가만히 앉아 생계 유지’하는 것만 들어가지 않는다. 이번에 어떤 이가 ‘월급에서는 교통비와 식비 등의 비용 지출도 다 나가게 되는데, 그 월급보다 가만히 앉아서 받아먹는 실업급여 액수가 더 많으면 누가 일을 하겠는가’라고 말하는 것을 들으면서 무척 놀랐다. 실업자는 ‘가만히 앉아’ 있는 이들이 아니다. 구직 활동의 증빙을 대지 않으면 그나마 끊어지는 것이 실업급여이므로 수급자들은 직장 다닐 때보다 더 활동적으로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정보를 모으고 사람을 만나야 한다. 이뿐만 아니라 원래 일하던 업종에서 좀 더 나은 일자리로 옮기려 한다면 새로 배우고 공부해야 할 것들이 많으며, 이게 다 비용으로 나가게 된다.

원래 소득이 높았던 이들은 이런 정도의 비용이야 그냥 저축에서 지출하면 되는 대수롭지 않은 액수일지 모르겠으나, 최저임금 수준의 일자리를 몇 개월 단위로 전전하는 이들에게 그런 넉넉한 저축이 있을 리 없으며 그 낮은 수준의 소득에서는 그런 비용도 큰 부담이 된다. 실업급여는 ‘입에 풀칠하라’고 주는 돈이 아니다. 실업을 맞은 이가 다시 노동 시장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돕기 위한 생계 및 ‘활동’ 자금이다.

실업급여 하한선은 이젠 풍전등화

그래서 이번 발언이 적나라한 저소득자 ‘혐오’가 드러난 경우라고 판단할 수밖에 없다. 앞에서 말했듯이, 혐오란 사회적 위계의 아래에 있는 ‘만만한 이들’에게 갖은 편견과 공격을 퍼부으면서 다른 이들에게도 또 사회 전체적으로도 여기에 동참하라고 선동하는 행위이다. 아니나 다를까 이 발언이 나오자 여러 신문·방송에서 저임금 노동자들의 도덕적 해이와 타락을 비난하면서 실업급여 하한선 폐지를 외치는 주장이 넘쳐나고, 최저임금은커녕 실업급여라도 신청해 본 적이 있을까 싶은 무수한 ‘전문가’들이 등장해 목소리를 높인다. 물론 여기에 맞서는 목소리도 있지만 잘 들리지 않는다. 이 힘없고 가진 것 없는 저임금 노동자들의 이익을 자기 문제로 여기며 정말로 전투적으로 옹호하려는 사회적 힘이 보이지도 않는다. 모름지기 그 실업급여 하한선은 이제 풍전등화의 처지가 될 것으로 보인다.

사실 가진 것 없는 이들에 대한 혐오는 가장 보편적이고 가장 자주 자행되는 문명의 못된 버릇이다. 행색이 초라하고 말과 행동이 굼뜬 아이들을 집단으로 왕따시키고 혐오하며 즐기는 법은 우리가 초등학교 교실에서부터 익히 배운 습관이니까. 이들의 ‘못난 짓’ 때문에 문제가 발생하고 그래서 모두가 힘들다. 따라서 이들에게 ‘버르장머리’를 고쳐주는 일이 필요하다는 식의 이야기도 머릿속 깊이 박힌 서사구조이니 쉽게 청중과 신봉자들을 끌어모은다.

그래서 하한선이 없어지면 저소득 실업자들의 소득은 20%포인트가 줄어들 것이다. 그게 어떤 크기의 타격인지는 그 소득 수준으로 계속 살아본 이들은 너무나 잘 알 것이다. 이런 생활의 대안은 그저 다니는 직장에서 죽은 듯이 숨죽이고 있든가, 아니면 어떤 일자리든 그냥 빨리 받아들이는 것뿐이다. 노동 시장의 위대한 자기조정 메커니즘이 작동할 것이며, 비로소 ‘완전고용’이 달성될 것이다.

‘시럽급여’니 ‘명품 선글라스를 끼고 해외여행을 가면서 급여를 타러 온다’는 등의 자극적 언사가 공직자들, 정치가들의 입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나오는 것을 보면서 나는 또 한 번 이게 적나라한 ‘혐오’라는 생각이 들었다. ‘공직자 월급으로 명품 핸드백이 말이 되느냐’는 말도 저렇게 아무렇지 않게 떳떳이 대놓고 할 사람이 있을까.

<햄릿>의 그 유명한 독백을 보면 우리가 이 지긋지긋한 세상을 살기 싫은 이유가 줄줄이 나열되는데, 그중 하나는 “insolence of office”이다. 내가 아는 한 영문학자는 최근 이 세 단어를 이렇게 번역한 적이 있다. “고위 공직자들은 우리들을 개·돼지로 본다.”

■홍기빈

정치경제학자. 대안적 사회의 정치경제 질서를 설계하고 구축하는 데에 도움이 될 수 있는 연구와 활동을 병행해 왔다. (재)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 소장을 지냈으며, 국제칼폴라니 연구협회의 자문위원을 맡고 있다. 저서로는 <위기 이후의 경제학> <비그포르스, 잠정적 유토피아와 복지국가>가 있으며, 역서로는 <도넛 경제학> <21세기 기본소득> <균형재정은 틀렸다: 현대화폐이론 입문>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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