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에는 병원에서 환자를 돌보고, 퇴근 후에는 링에 올라 상대 선수와 불꽃 튀는 스파링(서로의 기량을 겨루는 대련)을 한다. 본캐(캐릭터)는 신생아중환자실 전담전문의, 부캐는 프로복싱 선수인 서려경 순천향대 천안병원 소아청소년과 교수(31)의 일상이다.
서 교수는 최근 서울에서 열린 ‘KBM 한국 여성 라이트플라이급 타이틀매치’에서 임찬미 선수를 8라운드 38초 만에 TKO(주심의 승패 선언)로 꺾고 챔피언 벨트를 따냈다. 2020년 프로 데뷔 후 지금까지 통산 전적 7전6승1무를 기록하며 무패 행진을 이어가고 있는 그에겐 ‘현역 의사 주먹 서열 1위’ 등의 수식어가 붙는다.
서 교수는 지난 19일 인터뷰에서 “꾸준히 훈련한 노력이 연승으로 이어졌다. 승리를 확정 짓는 순간 너무 짜릿했다”며 “링 위에서는 승부욕과 자신감 넘치는 저의 진짜 모습을 발산할 수 있다”고 말했다.
2010년 순천향대 의대에 진학한 서 교수는 전공의 3년 차인 2018년 복싱에 입문했다. 취미로 복싱을 배우던 동료 의사가 바쁜 일정에도 꾸준히 헬스장에서 운동하는 그에게 ‘잘 맞을 것 같다’며 권한 덕분이었다.
서 교수는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 있는 아기들과 예민해진 부모들을 대면하는 신생아중환자실에서 일하다보니 항상 극도의 긴장감을 떨치기 힘들었다”며 “스트레스에서 잠시라도 벗어날 수 있는 탈출구이자 새로운 도전으로 복싱을 시작했다”고 말했다.
그는 어릴 때부터 스피드스케이트와 스키, 수영 등을 꾸준히 해왔지만 복싱은 기초훈련만으로도 녹초가 될 만큼 운동량이 많다고 한다.
“훈련 후 손가락 하나 까닥할 수 없을 정도로 피곤에 지쳐 잠든 적도 있는데 당시에는 그게 도움이 된 것 같아요. 특히 샌드백을 치면서 스트레스가 풀리는 걸 경험한 뒤 복싱의 매력에 빠졌어요.”
서 교수는 천안비트손정오복싱클럽에 소속된 유일한 여자 프로복싱 선수다. 그의 재능을 알아본 체육관 관장의 권유로 2020년 11월 프로 데뷔전을 치렀다.
프로 선수로 데뷔하면서부터 병원 일이 끝나면 매일 체육관으로 출근해 줄넘기, 섀도복싱, 샌드백 치기 등의 훈련을 1~2시간씩 한다. 서 교수는 강도 높은 훈련을 불만 없이 소화하는 성실한 선수로 체육관 내에서도 정평이 나 있다.
주 무기는 오른쪽 팔을 곧게 뻗어 상대 선수의 왼쪽 얼굴을 공격하는 라이트 스트레이트와 왼쪽 팔을 안으로 굽히며 오른쪽 얼굴을 때리는 레프트 훅이다. 챔피언 타이틀전에서 상대를 TKO시킨 것도 강력한 레프트 훅이었다.
그를 지도한 손정수 천안비트손정오복싱클럽 관장은 “서 선수는 선천적으로 운동에 재능이 있고 펀치력이 상당히 세다”며 “직업이 의사라 복싱을 취미로 하는 것으로들 생각하는데 누구보다 열심히 훈련하고 있어 앞으로가 기대되는 선수”라고 평가했다.
주변에선 ‘얼굴 다치면 시집 못 간다’ ‘취미로만 즐겨라’고 하지만 그는 크게 신경쓰지 않는다고 했다.
“복싱을 하는 여성들이 좀 더 많아지면 좋겠다는 바람은 있어요. 복싱은 유산소와 근력을 동시에 기를 수 있어서 경기에 나가는 걸 목표로 하지 않아도 충분히 운동 효과를 볼 수 있거든요.”
복싱이 삶의 일부분이자 일의 원동력이 되었다는 서 교수는 세계 챔피언을 목표로 다시 훈련에 돌입할 계획이다.
“저는 제 스스로 기술적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많은 선수라고 생각해요. 2년 안에 주특기인 강한 펀치로 세계 무대에서 실력을 확인하고 싶어요. 복싱을 통해 경험한 근력과 집중력, 자신감 등이 환자를 진료할 때도 큰 도움이 된다고 믿어요.”
▼ 이진주 기자 jinju@khan.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