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유럽에서도 30도가 넘는 더위가 잦아지자 독일 의사협회와 노동조합은 스페인 같은 남유럽에서 일반적인 관습인 ‘시에스타’ 도입을 본격적으로 토론하고 있다고 한다. 점심 식사 이후 두세 시간 동안 무더위를 피해 낮잠을 자는 것이다.
독일에서는 10여년 전만 해도 이런 관습이 게으름의 상징이거나 생산성을 떨어뜨릴 것이라는 우려에서 기피되는 논의였지만, 해마다 심해지는 폭염에 사회 분위기가 바뀐 것이다. 일단 최근 독일 내 여론조사에 따르면 시에스타 도입에 51%가 반대하고, 찬성은 27%에 그치는 것으로 나타났다지만 앞으로 기후변화 대응은 온실가스 배출 감축뿐 아니라 적응에도 더 많은 관심이 요구될 것임을 알려준다.
그런데 폭염 동안 근무를 줄이고 쉬는 것은 온실가스 감축에도 큰 도움이 된다. 가장 전력 소비량이 많은 시간대에 냉방기와 사무기기, 제조업 라인이 같이 쉬게 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노동자의 휴식과 휴가는 에너지 수급을 조절하는 데에도 매우 유용한 수단이 될 수 있다.
올해 한국은 길어지는 장마 탓에 평년에 비해 여름철 전력 수요가 높지 않은 편이다. 지난해에는 초여름 더위가 심했던 7월7일에 최대 수요인 93GW를 기록했지만, 올해는 7월 중순까지 90GW를 넘은 날이 없다. 장마 막바지에 강한 햇살이 드러난 27일 오전에도 전력 공급예비율을 확인해보니 30%로 넉넉한 상태다.
최근 몇 년 사이 여름철 전력 수급을 다루는 언론 보도를 보면 일정한 패턴이 드러난다. 7월 3주 즈음에 공급예비율이 위험하다며 ‘블랙아웃’을 걱정하지만, 정작 가장 더운 8월 첫 주가 되면 그런 기사들은 사라진다. 다수의 제조업과 사무직 노동자들이 휴가에 들어가 전력 수요가 확연히 줄어드는 반면 발전소는 풀가동을 대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8월 2주가 지날 즈음 공급예비율이 위태로울 수 있다는 기사가 등장한다. 노동자들이 휴가에서 돌아와 출근을 시작하는 때이기 때문이다.
올해도 산업통상자원부는 8월 2주 평일 오후 5시쯤 전력 수요가 92~97GW 정도 될 것으로 보고 수급 관리에 만전을 기하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여름철 전력 수요를 일별로 거의 정확하게 전망할 수 있다면, 노동자들이 8월 2주나 3주까지 휴가를 가면 어떻게 될까?
여름철 블랙아웃에 대한 걱정은 사라지고, 도시에 남아 있는 시민들도 에어컨을 더 틀어도 괜찮으며, 관광지는 더 오래 안정적으로 여행객을 맞을 수 있을 것이다. 총 발전 설비용량을 늘리는 게 능사가 아니라, 확실히 예상되는 계절과 시간의 수요 변동성 자체를 조절하는 게 가장 지혜로운 수급 관리 방법이다.
공정을 멈추기 어려운 일부 제조업과 필수 서비스업을 제외한다면 노동시간 조절은 큰 무리가 아니다. 휴가를 길게 갖기 어려운 중소 영세 사업장과 취약계층은 국가가 지원해주면 된다. 그게 국가재정 측면에서도 큰 발전소를 계속 짓는 것보다 더 효과적이고 시민의 복지와 삶의 질을 향상하는 것이기도 하다. 기후 비상사태 속에서 지구를 살리는 긴 휴가를 떠나자. 시원한 강바람을 맞으며 우리의 삶을 돌아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