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의 선
신성남 지음
향출판사 | 76쪽 | 1만9000원
여름은 어떤 빛깔일까. <여름의 선>에서 유월은 노랑, 칠월은 연두, 팔월은 초록이다. 작가는 싱그러운 자연의 색을 한가득 쏟아부은 종이 위에 곧은 선과 춤추는 선, 흔들리는 선을 긋는다.
노랗게 익은 유월 위로 하얀 직선이 주욱 그어진다. 하얀 선은 여름의 속살 같다. 선을 따라 이슬이 굴러가고 빗물이 흘러가고 개미가 기어간다. 그 길 어딘가에 앉은 당신에게 묻는다. “오늘은 개미, 지렁이를 얼마나 보았나요?” 무심코 지나쳤던 작은 생명에서 여름의 생동을 읽는다. 유월은 장마의 계절이다. 큰비가 온 뒤 농부는 다시 밭을 일구느라 땀방울을 흘린다. 고된 노동 뒤에는 수확의 기쁨을 알리는 휘파람 소리가 들린다. 여름의 배꼽에 열 개의 흰 줄이 모인다.
칠월은 바다가 마음을 여는 달이다. 연둣빛 바탕 위로 말 없는 여자와 날렵한 남자, 학교 가기 싫은 선생님, 등이 굽은 할머니, 멀리서 온 엄마와 두 아이, 길 잃은 택배기사가 저마다 손에 하얀 끈을 들고 와 나무 둥치에 맨다. 나무둥치는 한여름 지나가는 이들에게 그늘이 되어주던 시골 마을 초입의 당나무를 닮았다. 사람들은 마음을 묶고 날아오른다.
매미가 짝을 짓는 달 팔월은 초록 위에서 절정에 달한다. 물풀이 가득한 진초록색의 강을 배들이 가르고, 배들이 지난 자리는 검은 선이 구불구불 길을 낸다. 북소리 같은 매미들의 응원 소리가 하늘을 찌르고 물고기가 놀라 흩어진다. 계절은 빨갛게 익어가는 시간으로 달려간다. 노를 젓는 일이 힘에 부치지만 조금만 더 힘을 내본다. 그러다 보면 어느덧 여름의 섬에 도착한다.
여름을 선으로 표현한 작가의 시적 상상력이 유쾌하다. 원색 위에 감각적으로 그린 그림이 무더위 속에서 만난 산들바람처럼 느껴진다. 소소한 풍경 속에서 예리하게 포착한 여름날의 심상이 재미있다. 알쏭달쏭한 ‘여름의 선’의 존재는 마지막 페이지에서 달콤하게 드러난다. 우울했던 장마도, 짜증 나던 무더위도 여름의 선 중 하나일 것이라고 생각하면 견디지 못할 날은 없을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