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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들린다

집에 그늘이 너무 크게 들어 아주 베어버린다고

참죽나무 균형 살피며 가지 먼저 베어 내려오는

익선이형이 아슬아슬하다

나무는 가지를 벨 때마다 흔들림이 심해지고

흔들림에 흔들림 가지가 무성해져

나무는 부들부들 몸통을 떤다

나무는 최선을 다해 중심을 잡고 있었구나

가지 하나 이파리 하나하나까지

흔들리지 않으려 흔들렸었구나

흔들려 덜 흔들렸었구나

흔들림의 중심에 나무는 서 있었구나

그늘을 다스리는 일도 숨을 쉬는 일도

결혼하고 자식을 낳고 직장을 옮기는 일도


흔들리지 않으려 흔들리고

흔들려 흔들리지 않으려고

가지 뻗고 이파리 틔우는 일이었구나

-시, ‘흔들린다’, 함민복 시집 <눈물을 자르는 눈꺼풀처럼>

[김해자의 작은 이야기] 흔들린다

줄 맞춰 심은 백일홍과 과꽃 사이 앙증맞은 채송화와 봉숭아가 피었다. 날마다 양동이로 들이붓는 것 같던 장대비에도 짓무르지도 않았다. 어쩌면 저 작은 것이 저리 온전한 모양을 빚어냈을까. 능력자임에 틀림없다. 붉은 고추 한 소쿠리만 따도 살이 델 것 같은 폭염이 이어지는데, 색색 백일홍과 자줏빛 천일홍은 어김없이 때맞춰 피었다. 대단한 능력자들이다.

김해자 시인

김해자 시인

몇 모종 심은 곤드레나물이 늦봄까지 잎이 큰 접시만 하게 달리더니, 엊그제부터는 보랏빛 꽃을 달았다. 신기하다. 꽃 피우는 자리마다 어찌 알고 잎들이 작아졌는지.

요사이 내 입에서는 능력자네, 하는 말이 불쑥 튀어나온다. 비 온 후 영토를 확장해가는 풀들도 능력자고, 지지대 잡고 묵직한 열매를 공중에 거는 가지와 오이도 능력자다. 그 능력자들을 따다 노각피클 담고 가지와 호박 쪼개어 볕에 말리는 나도 능력자처럼 여겨진다. 비 오기 전에 지붕 손질 끝내야 한다고, 밤 11시까지 망치질하던 옆집 아저씨도 확실한 능력자다.

이 지구는 능력자로 가득한 것 같다. 살아 있는 것만으로도 능력자임을 증명하는 거 아닐까.

“숨을 쉬는 일도/ 결혼하고 자식을 낳고 직장을 옮기는 일도”

어마어마한 능력이다. 능력자네, 할 때마다 가슴이 펴진다. 웃음도 난다. 판단 이전에 경이와 신비를 담은 마음의 반응이겠다. 욕심 사납고 큰소리 사이 욕을 달고 사는 일부 이웃들도 능력자 같다. 좋아하지 않을뿐더러 하루빨리 직책에서 내려왔으면 바라 마지않는 사람들조차. 아아아 정말 대단하십니다, 감탄이 터져나온다.

부추를 베고 있는데, 윗집 어르신이 “저거 미친 … 빗자루병 걸린 거 아니냐” 하신다. 가리키는 손을 보니 사과대추나무다. “미친 … 뭐요?” 하며 대추나무를 봤더니, 잎 모양이 빗자루를 매어놓은 것 같다. 작년에 주렁주렁 달렸던 대추나무다. 올핸 이상하게 꽃이 안 피고 작은 잎들만 촘촘해 무슨 새둥지 같다 했더니 병에 걸린 거였구나.

들어보니 대추나무 빗자루병은 이름도 외우기 어려운 파이토플라스마라는 균이 감염을 시키는데, 뿌리부터 썩어가는 전신성 병이란다. 모무늬매미충이 매개해서 이웃 대추나무들까지 초토화시킨단다. 짧게는 1~2년 안에 가지가 연약해지고 몽우리마다 꽃 대신 잎으로 커 오르니 열매를 맺지 못한단다.

온 나라가 빗자루병에 걸린 것 같다. 뿌리부터 썩어서, “가지 하나 이파리 하나하나까지” 흔들리는 것 같다. 길이 흔들리고 학교와 아파트와 주차장과 병원이 흔들리는 것 같다. 1~2년 사이에 꽃과 열매를 결딴내다니 대단한 능력자들이다. 어쩌면 저 높은 곳에 있는 양반들은 저다지도 뻔뻔한가. 자연재해가 아니라 인재로 국민들이 죽어나가는데 어쩌면 책임지는 자 하나 없을까. 무얼 믿고 주권자인 국민을 향해 저다지 호통치는가. 감탄스러운 능력이다.

빗자루병은 나무 전체로 병균이 퍼지면서 결국 말라 죽는다는데 참 걱정이다. 치료 방법도 없다는데 암담하다. 베어서 살처분하는 게 확산을 줄이는 유일한 길이라는데. 더위 먹은 듯 내가 흔들린다. 중심 잡고 “흔들리지 않으려 흔들”린다. “흔들려 흔들리지 않으려” 안간힘 쓰며, “가지 뻗고 이파리 틔우”는 민초들이 아슬아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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