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슨 생각을 해, 그냥 하는 거지.” 김연아 선수의 이 말이 유명해진 것은 세계선수권대회에서 여자 싱글 부문 최고점을 경신하고 금메달을 딴 후다. 열악한 환경에서의 극기 훈련, 그걸 ‘그냥 했다’는 말에 모두 감동받았다. 반면 나는 ‘그냥 하는’ 사람의 정반대에 있다. 매번 생각을 하고, 그냥 하라고 하면 열받아 한다.
생활스포츠 지도사 자격증 연수를 받고 있다. 이렇게 되기까지 많은 생각을 했다. 어린 시절 나는 왜 몸을 움직이면 놀림받고, 시험 성적이 잘 나오면 부러움을 샀지? 태어나 보니 몸을 잘 움직이는 능력과는 거리가 멀었고, 글을 읽는 것은 한 번도 어렵지 않았다. 학교에서 나는 체육시간을 ‘헐어’ 자습을 했고, 운동을 원래 잘해서 운동부가 된 애는 교실에 들어오지 않았다. 30대가 다 되어서야 여성학을 공부하며 몸을 둘러싼 불평등 구조를 이해했고, 사교육 기관·헬스장에서 운동을 배웠다. 일반인, 특히 소수자에게 생활체육이 어떤 의미인지를 자문하며 몸의 감각이 달라지며 보이는 것을 탐구했다. 이거 엄청 재밌잖아? 나 같은 사람들이 더 많이 운동할 수 있길 바랐다.
최근 한 웹툰 작가가 학부모로서 특수교사를 고소한 사건을 둘러싼 여론은 작가의 아이, 다른 급우들, 교사 각각의 권리를 대립적으로 이해하는 지형 위에 있다. 교사가 말과 행동으로 아이에게 피해를, 아이는 문제 행동으로 교실의 다른 학생들에게 피해를 줬고, 이것이 각각 권리 침해라는 것이다. 교사에겐 교권, ‘교사의 권리’가 없는 게 문제라고도 한다. 그런데 교권이 학생들을 ‘그냥’ 움직이게 하는 힘이라면, 이것은 권리가 아니라 권력이다.
요즘 듣는 연수에서 한 선생님은 이랬다. “옛날 선수들은 통제적인 훈련을 참고 견뎠지만, 요즘은 안 돼요. 자율성을 발휘하게 가르쳐야 합니다.” 그다음엔 이랬다. “요새 다 평등하려고 하잖아요? 근데 가르치려면 확실한 서열이 있어야 됩니다.” 강의실엔 혼돈의 기류가 흘렀다. 강의 끝에 선생님이 질문을 시키니까, 누군가 겨우 손을 들고 말했다. “지금 두 가지 다른 얘기를 같이하셔서 헷갈리는데요?”
지금 문제는 권리가 아닌 권위다. 권위는 정당성이 있는 권력이고, 정당성은 가치에 대한 사회의 합의에서 나온다. 시키는 대로 하면 성공 엔딩을 보는 공략법이 있을 때, 시키는 사람은 권위가 있었다. 그런데 전에 시키는 대로 했는데 잘 안됐다. 그러면 요즘은 이런다. “진작 알아서 했어야지.”
교육이 ‘화이트칼라’가 되는 지름길, 학교가 상위 명문 학교를 보내는 통로였을 땐 교사가 학생을 때려도 괜찮았다. 하지만 지금은? 체육 못하는 학생을 버리고 가도 아무도 항의하지 않던 학교 밖에서, 체육 내신까지 필요한 입시 학생에겐 줄넘기 과외를 붙이면 된다. 인생은 한 번뿐인 게임인데, 부모가 ‘알아서’ 뚫는 공략 루트엔 학교의 역할이 없다.
얼마 전 수영장 할머니들을 만났다. 우리는 초급반에서 반년간 수영을 같이하다 헤어져 반년을 따로 수영했다. 접영 배우셨어요? 아니, 아직. 접영은 나도 아직이었다. 별 성과 없이도 수영을 계속하는 우리에게 이 사회는 관심이 있나? 권위란 무엇인가? 다시 말해, 뭔가에 권위를 줬다가도 뺏는 우리의 욕망은 어떤 가치를 향해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