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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년 만의 광복

입력 2023.08.16 20:16

1945년 8월15일 광복은 형식적으로 35년 전인 1910년 8월22일 체결된 한일병합조약을 무효화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당시 한일병합조약이 가능했던 이유는 1905년 11월 일본에 의해 강제로 체결된 을사늑약이 있었기 때문이다. 을사늑약은 문장만 보면 ‘대한제국이 부강해질 때까지’ 대한제국을 ‘보호’하기 위해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일본이 갖는다는 조약이었지만, 실상은 달랐다.

이상호 한국국학진흥원 책임연구위원

이상호 한국국학진흥원 책임연구위원

을사늑약 체결 다음해인 1906년 음력 6월26일, 최익현과 그의 제자 임병찬은 서울 명동 일본군 사령부 재판정에 서 있었다. ‘일본에 의해 규정된 죄’에 대한 판결을 기다리고 있었다. 전해 연말, 을사늑약 소식을 받아 든 최익현은 분연히 <청토오적소(請討五賊疎)>를 올렸다. 을사조약 체결에 가담한 5명의 역적을 처단하라는 상소였지만, 핵심 내용은 을사늑약을 인정하지 못하겠다는 것이었다. 최익현뿐만 아니라, 전국의 뜻을 가진 많은 사람들이 상소를 올렸지만, 더 이상 상소가 통할 시점이 아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최익현이 선택할 수 있는 마지막 길은 무장봉기였다.

74세의 노구를 이끌고 시작한 의병 봉기였지만, 초기부터 최익현은 제자들과 함께 전라도 일대를 석권했다. 그러나 토벌대와 맞선 최익현은 좌절할 수밖에 없었다. 토벌대 대부분은 조선인들로 이뤄진 관군이었기 때문이다. 나라를 구하겠다고 일어선 의병이 같은 민족으로 이뤄진 관군에게까지 총칼을 겨눌 수는 없었다. 결국 의병들을 해산하던 중, 토벌대로부터 강한 공격을 받았다. 정시해를 비롯한 여러 사람이 사망했고, 최익현을 비롯한 12명의 의병운동 주도자들은 체포되어 이날 일본군 사령부 재판정에 섰다.

죽음을 불사하고 시작한 의병운동에 비해, 형량은 그리 크지 않았다. 일본 스스로 ‘수괴’라 불렀던 최익현은 3년 형을, 최익현의 부장을 자임했던 임병찬은 2년 형을 선고받았다. 그 외 나머지 제자들은 4개월 형에서 태형까지 비교적 가벼운 선고가 내려졌다. 그러나 이처럼 가벼운 처벌 뒤에는 당시 통감이었던 이토오 히로부미의 다른 계획이 있었다. 그는 의병의 상징적 인물인 최익현을 조선에서 격리함으로써, 구심점을 잃은 의병운동을 줄일 계획을 세웠다. 게다가 당시 최익현의 나이가 74세였으니, 굳이 무거운 중형도 필요 없었다. 2~3년의 대마도 수감이 결정된 이유였다.

6월27일, 태형이 선고된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형 집행이 보란 듯 이루어졌다. 듣는 이들에게 정신적 부담을 주려고 계획된 형 집행이었다. 그러나 이용길을 시작으로 차례로 불려나간 태형자들은 혹독한 매에도 이를 악물고 신음 소리 하나 내지 않았다. 감옥으로 돌아온 이들의 모습은 처참하기 이를 데 없었지만,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스승 최익현의 귀에 그들의 신음을 마지막 음성으로 남기기는 싫었던 터였다. 스승에 대한 마지막 예의이자, 조선 땅에서 그들이 자기 의지대로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기도 했다.(출전: 임병찬, <대마도일기>)

일본에 의해 강제로 대마도에 유폐된 최익현은 그해 11월 결국 유명을 달리했다. 1905년 일본의 을사늑약에 반발했던 최익현의 의지는 일본에 의해 무력으로 제압되었고, 그 행동은 일본의 판결에 따라 범죄로 규정되었으며, 그 몸은 일본에 의해 강제로 대마도에 유폐된 결과였다. 1905년 이후 조선 땅에는 조선의 의지나 자주권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따라서 대마도에서 최후를 맞은 최익현의 죽음은 을사늑약이 ‘보호’나 ‘외교권 박탈’만의 문제가 아니었음을 증언한다. 1945년 8월15일의 독립은 그래서 1905년 을사늑약으로부터의 독립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러한 측면에서 보면, 1905년부터 이루어진 한반도에 대한 모든 일본의 조치들 역시 조선과 상관없는 일본의 의지로 규정할 수 있다. 1905년 독도가 무주지였기 때문에 일본이 먼저 선점했다는 일본의 이상한 영유권 주장부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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