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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체육관광부가 지난해 성인지 교육 관련 영상제작 용역사업을 진행하면서 ‘성평등’ ‘여성혐오’ 등 특정 단어를 “사용하지 말라”고 검열한 것으로 확인됐다. ‘금지어’ 설정은 부적절한 개입이라는 지적에 더해 자칫 문화예술계 전반을 향한 ‘가이드라인’으로 확대될 우려도 제기된다.

24일 경향신문 취재를 종합하면 문체부는 지난해 ‘문화콘텐츠 제작인력 대상 성인지 교육 영상’ 제작을 진행했다. 지난해 3월 발표한 제안요청서에는 추진배경 및 필요성으로 “성평등 문화콘텐츠 기획 추진 및 문화생태계 전반의 양성평등 인식 제고”라고 밝혔다. 제작방향 중 하나로는 “성평등 교육 기본내용 및 문화콘텐츠 제작과정 내 변화(를) 체감할 수 있는 공감 사례 중심”으로 진행하겠다고 적시했다. 10분 남짓 분량의 영상 10편이 제작됐다. 영상을 통한 교육 대상은 게임 제작자, 만화 애니메이션 제작자, 웹툰 작가, 방송 및 영화 제작자 등이다.

지난해 문체부가 진행한 ‘문화콘텐츠 제작인력 대상 성인지 교육 콘텐츠’ 개발 제안요청서 내용 일부 캡처,  문체부는 해당 사업 추진 배경을 “성평등 문화 콘텐츠 기획 추진 및 문화생테계 전반의 양성 평등 인식 제고” 라고 설명했지만, 이후 기획 단계에서 “영상 속에 ‘성평등’과 ‘여성혐오’ 단어를 안 썼으면 좋겠다. 피해달라”고 지시했다.

지난해 문체부가 진행한 ‘문화콘텐츠 제작인력 대상 성인지 교육 콘텐츠’ 개발 제안요청서 내용 일부 캡처, 문체부는 해당 사업 추진 배경을 “성평등 문화 콘텐츠 기획 추진 및 문화생테계 전반의 양성 평등 인식 제고” 라고 설명했지만, 이후 기획 단계에서 “영상 속에 ‘성평등’과 ‘여성혐오’ 단어를 안 썼으면 좋겠다. 피해달라”고 지시했다.

문체부는 5월 제작팀 선정 뒤 기획단계에서 “영상 속에 ‘성평등’과 ‘여성혐오’ 단어를 안 썼으면 좋겠다. 피해달라”고 지시했다. 추진배경과 제작방향에 ‘성평등’을 명시하고 있는데도 단어 사용 자체를 금지한 것이다. 금지어 선정 이유에 대해 “어딘가 치우쳐 보이거나 누군가를 자극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후 가편집 과정에서 제작팀이 인용한 기사까지 검열했다. 인용한 기사에 ‘혐오’라는 단어가 담겨 있다는 이유였다.

문체부는 출연자 성비에도 개입했다. ‘기계적 성비’를 맞추라는 것으로 “남녀 출연자를 동일하게 출연시키라”고 했다. 이 같은 지시는 문서화하지 않고 구두로 이뤄졌다.

윤석열 대통령 취임 1주년인 지난 5월10일 오전 서울 용산구 대통령집무실 앞에서 여성가족부폐지저지공동행동 활동가들이 여성인권 후퇴를 규탄하며 시국선언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권도현 기자

윤석열 대통령 취임 1주년인 지난 5월10일 오전 서울 용산구 대통령집무실 앞에서 여성가족부폐지저지공동행동 활동가들이 여성인권 후퇴를 규탄하며 시국선언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권도현 기자

지나친 개입으로 제작팀과 의견충돌이 있었지만 용역사업 특성상 제작팀은 크게 문제삼지 않은채 일정에 맞췄다. 제작팀의 한 관계자는 기자와 통화에서 “조율 과정에서 시간과 에너지를 많이 썼다”며 “아쉬움은 당연히 있었는데, 가능한 협의점을 찾으려고 했다”고 말했다. 문체부의 지시는 작업물에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었다. 영상에 출연한 한 당사자는 “특정 단어 사용 금지는 여성들이 놓인 현실을 면밀히 담는데 당연히 한계가 있다. 특히 성인지 교육 영상이라는 점에서 더욱 문제”라고 말했다.

개입에 대해 문체부는 “맞다”고 인정했다. ‘성평등’ 사용 제재는 “양성평등기본법에 근거해 ‘양성평등’ 단어를 사용하고 있어서 그에 따라 표현을 써달라고 요청한 사항이다”라고 밝혔다. ‘여성혐오’에 대해선 “표현을 순화하는 과정에서 ‘혐오’ 표현을 제외해 달라는 요청으로, 톤다운 차원이었다. 굳이 ‘혐오’라는 자극적인 단어를 쓸 필요가 있나 싶은 생각이 있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여성혐오’ 사건이 여전히 실재하는 현실에서 “자극적인 단어”로 치부하는 것이 타당한지 의문이 나온다. 여성을 강간하려고 흉기를 미리 구매한 뒤 실제 대낮에 여성을 때리고 성폭행해 살해까지 한 최윤종 사건이 벌어졌다. “여성들의 공포감이 피해망상인지 확실히 해야 한다” 등 여성혐오성 발언으로 표심을 얻어 당선돼 관련 정책을 펼친 최인호 서울 관악구의원에 대해선 사퇴 요구가 빗발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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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대상이 문화콘텐츠 분야 기획, 창작 담당자라는 점에서도 금지어 설정은 문제로 지적된다. 국가인권위원회는 2020년 “게임업계 내 여성혐오 및 차별적 관행으로 일러스트 또는 웹툰 작품의 사용이 중단돼 피해자들이 발생했다”면서 “혐오의 확산을 방지하기 위한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의견을 냈다. 지난 7월에는 모바일게임 ‘림버스 컴퍼니’ 유저들이 여성 일러스트레이터의 신상을 털어 “페미니스트 진영발 밈을 사용했다”면서 공격하는 일이 또다시 벌어졌다.

용역 공고 시점(지난해 3월)과 이후 진행 과정(지난해 5월 이후)의 시차를 고려하면 문체부가 윤석열 정부의 기조에 눈치를 본 것 아니냐는 의심이 나온다. 여성·시민단체는 “여성가족부 폐지를 공약으로 삼는 등 여성혐오를 전면에 내건 윤석열 정부에서 여성인권은 후퇴 그 자체였다”고 지적한다. ‘성평등’ 사용에 대해서도 현 정부의 여가부는 ‘성평등’을 지우고 ‘양성평등’ 사용을 앞세우고 있다. 성평등은 다양한 성을 평등하게 인정한다는 의미로 쓰이지만 양성평등은 남녀 성별에만 초점을 맞춰 쓰인다. ‘여성혐오’는 존재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태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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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체부는 “의도를 가지고 한 건 전혀 아니다. 자극적이지 않은 콘텐츠를 만들려고 했다”며 “무리한 개입이 아니다”고 주장했다.

권수현 젠더정치연구소 여세연 대표는 “성인지 교육 영상인 만큼 현실을 제대로 담아야 하는데 특정단어를 빼라는 것 자체가 문제다. 페미니즘에 대한 잘못된 인식이 반영됐다고 볼 수 있다”면서 “결국 ‘구조적 성차별이 없다’는 정부의 기조가 전제돼 나온 가이드라인이다”라고 지적했다. 이어 “앞으로 문체부가 주관하는 행사나 제작 등 문화예술계 전반에 ‘가이드라인’으로 확대될 가능성도 크다는 점에서 문제적이다. 표현·사상의 자유 침해다”라고 말했다.

▼유선희 기자 yu@khan.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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