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초능력이 생긴다면? 우선 얼마 전 갑자기 잎을 우수수 떨구며 죽어버린 식물의 마음을 읽을 수 있으면 좋겠다. 응. 그랬구나. 그게 힘들었구나. 내가 잘못했어…. 떨어지는 잎에게 사과라도 할 수 있게.
요즘 드라마에 초능력자들이 부쩍 많아졌다. <힙하게>에서 수의사 예분은 번개를 맞은 후 사람이든 동물이든 엉덩이를 만지면 상대의 기억을 읽을 수 있는 초능력을 갖게 된다. <무빙>에는 어떤 상처도 금세 회복되거나 공중 비행이 가능하거나, 손만 대면 전기를 만들 수 있거나, 망원경이나 도청기급 오감 능력을 가진 초능력자들이 나온다. 초능력이 있다면 마냥 좋을 것 같지만 꼭 그렇지도 않다. 오히려 자신이 가진 능력 때문에 불편을 겪거나 손해를 보기도 한다. <무빙>에서 공중 비행이 가능한 초능력을 가진 고등학생 봉석은 시도 때도 없이 두둥실 떠오르는 몸을 땅에서 떨어지지 않게 하려고 모래주머니를 차고, 쇳덩이를 담은 가방을 메고 다녀야 한다. <힙하게>의 예분은 하필 엉덩이를 만져야 상대의 기억을 읽을 수 있어서 곤란을 겪곤 한다. 그래서 이들에게 초능력은 약점에 가깝다.
위기에 빠진 이를 구하거나 악한 세력으로부터 도시와 나라를 구하기 위해 정의로운 ‘히어로’들이 비장한 얼굴로 하늘을 날아다니던 시절이 있었다. 그다음엔 불의한 권력자들이 지배하는 세상에 수단과 방법을 안 가리고 복수하는 ‘다크 히어로’들이 활약했다. 그러나 복수의 시원함은 짧고 변하는 것은 없었다. 그렇게 비장하고 정의로운 ‘히어로’와 시원하게 복수하는 ‘다크 히어로’가 필요했던 시절을 지나 지금 우리에게 도착한 초능력자들은 지극히 평범한 얼굴로, 외려 약점을 가진 존재로, 심지어 속물적으로 우리 곁에 존재한다.
비록 드라마 세계지만 우리 곁에 존재하는 초능력자들이 ‘(다크) 히어로’가 아닌, 약점을 가진 평범한 얼굴로, 자신의 힘을 누구에게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 고민하는 존재로 상상되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영웅적인 면이 덜해진 대신 고민은 늘었다. <무빙>에서 초능력 보유자인 미현은 아들 봉석이 초능력을 사용하여 친구를 제압하는 걸 본 후 이렇게 나무란다. “초능력? 그게 뭔데. 사람의 진짜 능력은 공감 능력이야. 다른 사람 마음을 이해하는 능력. 그게 가장 중요한 능력이야. 다른 사람 마음 아프게 하는 게 그게 무슨 영웅이야.” 즉 누구에게 어떻게 사용할지 그 방향성을 고민하지 않는 힘이란, 폭력과 불행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 후 봉석은 자신의 능력이 타인에게 위협이 되지 않을까 고민하며 절제하고, 내 곁의 누군가 다치거나 죽지 않게 하기 위해서만 사용한다.
신이 우리에게 초능력을 허락한다면? 사실 ‘초’능력까지는 아니더라도 우리 모두에게는 이미 어느 정도의 능력이 있다. 다만 중요하게 여기지 않을 뿐이지. 그리고 누군가는 자신의 능력을 ‘나’의 유익과 성공을 위해 탕진하거나, 나보다 약한 이에게 폭력을 휘두르거나 ‘갑질’하는 데 악용할 뿐이지. 우리가 가진 능력의 핵심은 ‘능력’ 자체에 있는 게 아니라 방향성, 즉 약자성과 공감성에 있다는 걸 기억하면 좋겠다. 사회는 일상 속에서 이 능력의 방향성을 고민하며 뭐라도 해보려는 이들에 의해 유지되고 있는 것일 테다. 이제부터는 내게 있는 능력을 보다 유익한 일에 사용해보자.
<오수경 자유기고가 <드라마의 말들>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