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 안보와 가치 동맹…한국의 국제관계에 대전환점

박명림 연세대 교수

⑬ 한국전쟁과 한·미 동맹

한국전쟁은 세계 최강 국가인 미국과의 동맹을 낳음으로써 한반도 침략 역사를 가진 모든 이웃나라를 단번에 제어하는 다중 빗장을 질렀다. 한·미 동맹으로 인해 한국은 사상 처음 태평양 국가가 되었고, 전후 한국인들은 세계인이 되었다. 사진은 1953년 8월8일 이승만 대통령이 지켜보는 가운데 변영태 외무부 장관(왼쪽)이 존 포스터 덜레스 미 국무장관과 한미상호방위조약에 가조인하고 있는 모습이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한국전쟁은 세계 최강 국가인 미국과의 동맹을 낳음으로써 한반도 침략 역사를 가진 모든 이웃나라를 단번에 제어하는 다중 빗장을 질렀다. 한·미 동맹으로 인해 한국은 사상 처음 태평양 국가가 되었고, 전후 한국인들은 세계인이 되었다. 사진은 1953년 8월8일 이승만 대통령이 지켜보는 가운데 변영태 외무부 장관(왼쪽)이 존 포스터 덜레스 미 국무장관과 한미상호방위조약에 가조인하고 있는 모습이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한국전쟁은 한국의 국제적인 안보 위치를 완전히 바꿔놓은 전쟁이 되었다
한국의 절멸을 추구한 전쟁이 한국의 안보를 역사상 가장 튼튼히 해주는 역설을 초래한 것이었다

한국을 ‘태평양의 해양국가’로 전변시킨 한·미 동맹은 격렬한 갈등의 산물
특히 이승만 벼랑 끝 전술의 성공이었다. 이승만이 미국 정책에 저항한 결과라는 점은 최대 역설이다

한반도 문제의 국제화와 세계화 역시 한국전쟁이 낳은 중차대한 결과였다
또 조선은 대륙국가가 되었고 한국은 해양국가가 되어, 동서 이념과 동서 진영 그리고 동서 문명을 갈랐다

한국전쟁은 한국 국제관계의 최대 전환점이었다. 한국의 역사에서 이 말의 무게는 천근과 같다. 그것은 개항 이후 근대의 역사에서도 그러하며, 전통 시대를 포함한 인간공동체의 전체 역사에서도 그러하다. 한국 국제관계의 최대 전환점이라는 역사적 무게를 갖는 사건이 한국전쟁이었던 것이다. 왜 그러한가.

그것은 무엇보다도 한국전쟁의 정전과 한·미 동맹의 출발이 같다는 점에서 연유한다. 즉, 전술했듯이, 한국전쟁은 세계 최강 국가인 미국과의 동맹을 낳음으로써 한반도 침략의 역사를 갖고 있는 모든 이웃나라들-중국·일본·러시아·조선-을 단번에 제어하는 다중 빗장을 질렀던 것이다. 요컨대 한국전쟁은 한국의 국제적 안보 위치를 완전히 바꿔놓은 전쟁이 되었다. 한국의 절멸을 추구한 전쟁이 한국의 안보를 역사상 가장 튼튼히 해주는 역설을 초래한 것이었다.

한·미 동맹으로 인해 한국은 사상 처음으로 태평양 국가가 되었다. 개항 이래 한국에 태평양은 단순한 공간이나 장소가 아니었다. 그것은 하나의 문명이자 대안이며, 세계관이자 철학이었다. 그리고 미래이자 가능성이었다. 한국민들에게 태평양의 그러한 위상은 미국의 존재로 인해 주어진 것이었다. 그리고 미국의 한국전쟁 참전과 한국 구출로 인해 태평양을 사이에 둔 한국과 미국의 멀고 먼 공간적 거리는 단박에 의미를 상실하였다. 혈맹에서 비롯된 가치적·이념적 거리의 상실로 인한 탈(脫)공간화의 효과 때문이었다.

1953년 체결된 한미상호방위조약에는 하나의 흥미로운 표현이 반복되고 있는데 두 나라의 위치 및 안전과 관련하여 ‘태평양지역’이라는 말이 네 번이나 사용되고 있다는 점이다. 대신 ‘아시아지역’이라는 말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당시까지 명실상부한 아시아 국가였던 한국으로서는 지극히 이례적이었다. 한국도, 미국도 한국을 ‘아시아 국가’가 아니라 확실한 ‘태평양 국가’로 자리매김하고 있었던 것이다. 한국전쟁 이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던 급변이었다. 그런 점에 비추어 한·미 동맹은 조약과 규정이라는 문자가 아니라 희생과 혈맹이라는 공동의 핏값에 의해 담보되었던 것이다.

자유진영이 공동 대응한 세계전쟁으로서 한국전쟁의 산물이자 전후(戰後) 한국 위상의 효과였다. 따라서 한·미 동맹의 본질과 성격은 주체 및 형식과는 달리 양자동맹을 넘어 대륙의 공산주의에 대한 강한 지역동맹의 성격을 지녔다. 서문에서부터 한미상호방위조약은 “태평양지역에 있어서 더욱 포괄적이고 효과적인 지역적 안전보장조직이 발달될 때까지 평화와 안전을 유지하고자 집단적 방위를 위한 노력을 공고히 할 것”을 언명하고 있다. 이는 중요한 점을 시사하는데, 한·미 양국 모두 한미상호방위조약 및 한반도 안보와 평화 문제를 태평양지역의 집단 안보 및 평화의 관점에서 바라보았다는 점이다. 한반도 안보·평화 문제가 태평양의 안보·평화 문제의 일부가 되면서 더 안정적인 구조를 갖게 되었던 것이다. 한·미 동맹으로 인한 한반도 문제의 안정화 효과는 즉각적인 동시에 구조적이었다. 전후 세계진영 대결이 끼친 한반도 안정에의 한 긍정적 효과였다.

한·미 연합군사훈련에 참가 중인 국군 장병이 태극기와 성조기가 나부끼는 가운데 걸어가고 있다. 연합뉴스

한·미 연합군사훈련에 참가 중인 국군 장병이 태극기와 성조기가 나부끼는 가운데 걸어가고 있다. 연합뉴스

미, 권위·민주주의 수호 이중 역할

그러나 한국을 ‘태평양의 해양국가’로 전변시킨 한미상호방위조약은 미국이 ‘아시아의 대륙국가’와 최초로 맺은 방위조약이었다. 전전(戰前)과 다른, 대한(對韓) 전략의 대전환이었다. 따라서 한·미 동맹은 격렬한 한·미 갈등의 산물이었다. 특히 이승만의 벼랑 끝 전술의 성공이었다. 휴전을 추구하는 미국을 향해 이승만의 전쟁 지속 위협만큼 효과적인 협박 수단도 없었다. 게다가 이승만은 미국의 작전지휘에서 이탈하여 독자적으로 전쟁을 감행하려는 의지를 자주 피력하였다. 한·미 동맹의 출발이, 이승만이 미국의 정책에 순응한 결과가 아니라 그에 저항한 결과라는 점은 최대의 역설이었다. 당시 미국은 심각하게 이승만 제거를 고려하였으나 그것을 이루기 위한 어떤 시도도 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미국의 온건 반공정책에 맞서는 이승만식의 반(反)친미적, 또는 친(親)반미적 친미노선이야말로 미국의 국가이익과 자유세계의 반공투쟁에 부합하였기 때문이다. 미국 건국 당시의 유명한 언명의 번안에 가까운,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말을, 미국을 상대로 반복 사용하면서까지 한국의 안보가 일본 및 미국의 안보와 직결되어 있다고 강조하며 한·미 동맹 체결의 세계적 중요성을 강조한 것도 이승만 특유의 승부수였다. 이 점에 관한 한 이승만은 세계의 두 진영 간 대결구도를 맨 앞 초소에서 수행하는 전사였다. 공산 침략의 결과 강경 반공주의에 대한 국민들의 지지도 절대적이었다.

한국민들의 관점에서 볼 때 한·미 동맹은 근대로의 진입 이후 미국의 반복되는 배신의 역설적 산물이었다. 이승만은 1882년 조미수호통상 조규 이래 한국 문제에 대한 미국의 배신과 약속 불이행을 누차 지적한 바 있다. 그가 보기에 강제점령은 일본에, 분할점령은 소련에 한반도를 양보한 미국의 중대한 오류와 실패였다. 따라서 한·미 동맹은 한반도 내에서 한국과 조선의 충돌과 전쟁을 방지한다는 제한된 차원을 애초부터 완전히 초월해 있었다.

한국민들로서는 다시는 강점과 전쟁을 당하지 않으려면 미국의 확고부동한 보증서를 받아낼 필요가 있었다. 따라서 한·미 동맹은 조선의 침략에 대한 수호를 넘어 당연히 소련·중국·일본의 침략으로부터의 방어를 내장하고 있었다. 이것이 한·미 동맹의 한 본질이었다. 당시 이승만은 이 점을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었다. 한국민의 관점에서 역사를 돌아볼 때 중국·소련·일본·조선은 모두 한국 영토를 침략한 경험을 갖고 있었다. 이들 모두를 단번에 제어할 수 있는 힘과 장치가 필요하였다. 그것은 미국, 그리고 한·미 동맹이었다.

생존을 위한 한국의 결사투쟁으로 인한 한·미 갈등의 산물이 한·미 동맹이었기 때문에 한국의 자유 수호를 지켜준 미국은 이후 한국에서 이중적 역할을 수행하였다. 나는 이 이중성을 오랫동안 강조해왔는바, 한편으로는 권위주의의 보장자이면서 다른 한편 민주주의의 후원자였다. 요컨대 미국은 국제 반공을 위해 이승만·박정희·전두환 정권의 가장 강력한 지반인 동시에, 경제정책·부패·군사원조·인권유린·대북정책을 포함하여 그 정권들과의 긴장과 대립도 빈발하였다. 특히 권위주의 정부일수록 미국과 갈등과 긴장이 많았다. 즉 민주정부, 또는 진보정부가 반미정책으로 인해 미국과 자주 갈등하였다는 속설은 사실에 맞지 않는 주장이다.

한·미 동맹으로 인해 한국전쟁의 거시적 영향은 동아시아 7년 전쟁(1592~1598년)에 버금간다. 동아시아 7년 전쟁이 놓은 지역질서는 청일전쟁으로 인해 중화체제가 붕괴될 때까지 지속되었다. 한국전쟁 역시 상당 기간 지속될 대륙과 해양의 대립구도를 구획하였다. 한국전쟁은 소련 붕괴와 사회주의 해체는 물론 부분적으로는 오늘에 이르기까지 동아시아에서 대륙과 해양, 자유진영과 공산진영을 가른 가장 결정적인 전쟁으로 역할을 하였다.

따라서 한국전쟁 당시의 한국 국민 및 지도자들은 동아시아 7년 전쟁 당시의 국민 및 지도자들과 유사한 역할과 위상을 갖는다. 동아시아 7년 전쟁 당시의 국민 및 지도자들은 일본에 의한 점령을 방어하여 이후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의 도래 시점까지는, 한반도에서 대륙과 해양의 세계전쟁의 도래를 막아냈다. 동아시아의 안정적 지역평화체제라고 할 수 있는 이순신평화, 또는 이순신체제라고 부를 수 있는 장기평화의 도래였다. 유사하게, 한국전쟁 이후 현재에 이르기까지도 대륙과 해양은 동아시아에서 단 한 번의 직접 전쟁이 없었다. 한국에서의 대전쟁 이후 지역질서의 장기적 안정의 도래가 보여주는 바는 분명하다. 한반도가 그만큼의 위상과 크기를 갖는 동아시아 지역질서의 요충이자 각축장인 동시에 안전판이자 교량이었기 때문이다.

하나의 차이가 있었다면 동아시아 7년 전쟁 당시에는 한국이 대륙세력과 연대하여 해양세력의 침략을 막아냈다면, 한국전쟁 때에는 한국이 해양세력과 연대하여 대륙세력의 침략을 막아냈다는 점이다. 이는 단기적으로도 정반대였다. 1905~1910년 일본의 한반도 침략과 점령 당시에는 미·영 해양세력이 일본을 지원하여 중·러 대륙세력에 대한 견제와 역전을 기도하였던 데 비해, 한국전쟁은 조·중·러 공산주의의 대륙 연합세력의 침략에 맞서 미·영 해양세력이 한국과 연합하여 맞섰다는 점이다. 즉 한국전쟁은 거시적으로나 단기적으로나 모두 한반도 문제를 둘러싼 지역질서 대결구도에서 이중 역전의 의미를 갖는 것이었다. 근대 이후 세계에서 전쟁을 위한 동맹과 적대관계의 이러한 급변과 역전은 참으로 희귀하였다.

일본이 청일전쟁을 계기로 역내 패권국가로 올라섰듯이 거꾸로 중국은 한국전쟁을 계기로 미국에 맞서게 되는 한편, 동아시아 문제에서는 일본과 소련을 제치고 올라섰다. 그 점에서 한국전쟁은 동아시아 패권의 위계질서에 관한 한 역(逆)청일전쟁에 가까웠다. 그러나 두 전쟁의 가장 결정적인 차이점은 중·일 위상의 역전이 아니라 바로 미국의 부재와 존재, 그리고 한·미 동맹의 체결이었다. 그것이 두 번째이자 가장 큰 차이였다.

한반도 문제의 국제화와 세계화 역시 중요한 결과였다. 이를 통해 한반도 문제는 안정될 수 있었다. 문제가 커지자 위기가 잦아든 것이었다. 이는 1876년 이래 처음이었다. 과거의 두 지역질서, 즉 대동아공영권은 물론 중화질서의 완전한 붕괴를 통한 안정화였다. 한국전쟁은 한국이 중화질서와 대동아공영권을 완전히 벗어나는 계기였다. 탈중화, 탈일본, 그리고 탈동아시아화를 통한 한반도 문제의 세계화의 계기로서의 한국전쟁이었던 것이다. 한국은 1876년에는 피동적으로 세계와 만났다면 1919년에는 강점 상태에서 능동적으로 세계와 만났다. 그러나 1950~1953년 한국전쟁 때에는 주권국가로서 절반은 피동적으로, 절반은 주체적으로 세계와 만났다.

따라서 한국의 태평양 국가로의 전환은 단지 미국과의 동맹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다. 물론 그것이 가장 중요하였다. 그러나 그것을 포함하여 한국전쟁은 무역이나 수출, 또는 외교나 문화 이전에 하나의 국민국가로서 대한민국이 대부분의 세계 국가들과 최초로 만난 계기였다. 라틴아메리카, 아프리카, 동남아, 오세아니아, 유럽의 많은 국가들이 한국과 직접적 관계를 맺은 것은 한국전쟁 때가 처음이었다. 한반도 문제는 물론 한국 자체의 세계화에 가장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계기가 한국전쟁이었던 것이다.

세계인들은 한반도에서 거대한 전쟁이 발발하고 나서야,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들의 가족과 동료와 국민들이 이 전쟁에 참전하고 나서야 한국이라는 나라에 대한 관심과 관계를 갖게 되었다. 또한 주의 깊게 살펴보면 세계의 민주국가들은 거의 전부 한국을 지원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요컨대 참전 국가들의 규모를 넘어 그들의 가치를 볼 때 한국과 조선 중에 누가 더 보편과 세계정신에서 앞서 있는지를 알게 해준다.

미국 워싱턴 한국전쟁 참전용사 기념공원에 설치된 ‘추모의 벽’ 제막식을 하루 앞둔 지난해 7월26일(현지시간) 한국전쟁 전사자의 유족들이 하얀 장미꽃을 전사자의 이름 위에 올려놓고 있다. 추모의 벽에는 한국전쟁에서 전사한 미군과 한국인 카투사 4만3808명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국가보훈부 제공

미국 워싱턴 한국전쟁 참전용사 기념공원에 설치된 ‘추모의 벽’ 제막식을 하루 앞둔 지난해 7월26일(현지시간) 한국전쟁 전사자의 유족들이 하얀 장미꽃을 전사자의 이름 위에 올려놓고 있다. 추모의 벽에는 한국전쟁에서 전사한 미군과 한국인 카투사 4만3808명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국가보훈부 제공

‘동맹’ 통해 자본주의적 근대 승리

역사상 동아시아에는 두 개의 아시아·태평양 전쟁이 존재하였다. 하나는 2차 세계대전이었고, 다른 하나는 한국전쟁이었다. 모두 전체주의에 맞선 전쟁이었다. 그런데 2차대전이 해양국가의 대륙 침략 및 미국 침략으로 인한 전쟁이었다면, 한국전쟁은 대륙 공산국가들의 준(準)해양국가에 대한 공격이 시발이었다. 미국이 자신들의 본토를 직접 공격당하지 않고도 개별국가의 전쟁에 이토록 대규모로 즉각 참전하여 전쟁을 수행한 사례는 없었다. 그 점에서 한국전쟁은 매우 독특한 위치를 지닌다.

개항 이후 한국에서 격렬히 길항해온 근대성의 문제와 관련하여 한국전쟁은 하나의 최종적 판가름의 계기였다. 근대 이후 한국민들에게는 네 개의 근대화 경로가 놓여 있었다. 그중 중국식 근대화 경로는 가장 먼저 탈락하였다. 탈락을 넘어 중국 자신이 근대화에 실패하고 말았다. 따라서 근대 초기 길항 과정에서 일본에 대한 중국의 궁극적 패배로 인해 한국에서 대륙 중국은 더 이상 문명표준도 천하제국도 아니었다. 근대로의 길은 더더욱 아니었다.

일제의 강점 이래 한국에서 근대로의 이행은, 일본식 군국주의 근대, 서구식 자유주의 근대, 소련식 사회주의 근대 사이의 격렬한 투쟁과 길항으로 접어들었다. 2차대전의 종식과 미·소의 분할점령은 일본식 전체주의 근대의 패배와 탈락을 의미했다. 미국과 소련의 진주에 이은 한국전쟁은 한반도에서 자본주의적 근대와 사회주의적 근대의 통합과 통일 대신에 장기 적대와 경쟁의 시작을 의미했다. 주지하듯 경쟁의 현재적 결과는 자본주의적 근대의 승리였다. 그 판가름의 한 결정 요소는 바로 한·미 동맹이었다.

한국의 대륙문명으로부터의 이탈과 해양세력으로의 편입이 전쟁과 강점을 통해서였듯이, 대륙세력 및 해양세력의 최종 분기·분립과 해양세력과의 밀착도 역시 전쟁과 분단을 통해서였다. 동서(東西) 조우 이래, 즉 한반도 문제의 세계화 이후 이 나라의 특별한 위상은 대륙과 해양 세력 및 문명의 재편과 역전, 분할과 분립의 결정타 역할을 연속적으로 수행하게 하였던 것이다.

한국인, 동·서양인 넘어 세계인

한국전쟁이 낳은 한·미 동맹은 개항 이래 한국의 대륙국가적 정체성과 해양국가적 정체성 사이의 국내적·국제적 길항과 투쟁을 종식시켰다. 이 전쟁으로 인한 남북(한·조) 분단의 세계화를 통한 안정과 고정화의 결과 조선은 대륙국가가 되었고, 한국은 해양국가가 되었다. 따라서 군사분계선은 한반도의 두 국가를 가르는 계선인 동시에 세계의 이념과 진영과 문명을 가르는 구분이 되었다. 동서 이념과 동서 진영과 동서 문명을 갈랐던 것이다.

그 결과 한국전쟁 이후 해양국가 한국은 동양도 아니고 서양도 아니었다. 아니, 동양이면서 서양이었다. 그러한 융합적·혼융적 정체성과 문명 속성이 만나 뿜어내는 크고 넓은 충돌과 절충, 깊고 촘촘한 상향(相響)과 창조가 전후 한국 고속발전의 근본 동력이었다. 전후 한국인들은 동양인과 서양인을 넘어 세계인이 되었던 것이다.

■필자 박명림 교수

[정전 70년 한반도 영구 평화를 향해] 한·미, 안보와 가치 동맹…한국의 국제관계에 대전환점

연세대에서 정치학을 가르치고 있다. 제주 4·3(석사)에 이어 한국전쟁에 대한 연구(박사)로 학문의 길에 들어선 이래 평화 문제를 중심으로 정치현상 연구에 천착해왔다. 정치학자로서, 역사학자로서 전쟁과 평화, 생명과 인간, 그리고 국가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하고 답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 <한국전쟁의 발발과 기원 1, 2> <다음 국가를 말하다> <역사와 지식과 사회> <한국 1950: 전쟁과 평화>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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