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정부가 서울 주요 명소에 ‘국가상징공간’을 조성하겠다고 밝혔다. 서울역과 독립문 등 주요 역사·문화 자산을 국가의 정체성을 표현하는 공간으로 꾸미겠다는 것이다. 정부는 이를 위해 대통령 소속 국가건축정책위원회와 국토교통부, 서울특별시 등이 참여하는 협의체도 구성했다. 앞서 지난해 10월 오세훈 서울시장은 광화문과 숭례문, 한강을 잇는 7㎞가량의 ‘국가상징거리’를 조성하겠다고 했다.
국가 상징물은 중요하다. 태극기와 애국가 같은 국가 상징물은 한국을 대표하고, 한국인의 가슴을 뜨겁게 만드는 그 무엇이 있다. 한국인을 하나로 뭉치게 해 위기 시 국난 극복에 큰 힘이 되기도 한다. 국가상징공간도 국민에게 국가 정체성을 상기시키고, 애국심을 불러일으키며, 국민과 국가 간의 소통과 협력을 촉진하는 역할을 할 수 있다.
그러나 철 지난 이념으로 국론을 분열시키고 역사왜곡을 서슴지 않는 윤석열 정부가 국가상징공간 조성 운운할 자격이 있는지 의심스럽다. 홍범도 장군 흉상 이전 문제에서 드러나듯 윤석열 정부의 국가관은 반공과 친일에 기반을 두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뉴라이트’가 주장하는 식민지 근대화론을 추종하면서 이승만·박정희 독재를 옹호해 많은 국민의 반감을 사고 있다.
정부가 국가보훈부 등이 참여하는 국장급 실무협의체에서 국가상징공간에 담을 국가 정체성을 논의하겠다는 것도 우려를 키운다. 장관급 부처로 승격된 보훈부가 맨 처음 한 일이 국립대전현충원의 백선엽 장군 안장기록에서 ‘친일’을 삭제한 것이니 국가상징공간에 무엇을 채우겠다고 할지 불안하다. 공론화나 사회적 합의 절차도 없이 친일파 미화 작업을 벌이고 있는 보훈부가 국가 정체성 논의에 참여하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정부는 서울 25개 자치구로부터 의견을 받아 연내 국가상징공간 사업지 선정을 완료한다는 계획이다. 그러나 이렇게 서두를 일이 아니다. 윤석열 정부의 행태로 미뤄 볼 때 국가상징공간 조성 사업은 냉전도시, 친일도시로 서울을 격하시킬 개연성이 있다. K콘텐츠가 세계적인 각광을 받으면서 문화 도시로 자리잡고 있는 서울의 품격이 훼손될 수도 있다.
서울은 일제에 항거한 3·1운동, 1960년 이승만 독재를 무너뜨린 4·19혁명, 1987년 6월항쟁의 공간이자, 6·25전쟁의 폐허를 딛고 경제 성장을 이룬 대한민국의 수도로 그 자체가 국가의 상징이다. 정부는 서울에 국가상징공간을 조성하겠다는 정책을 철회해야 한다. 한때 백제의 수도였고 조선 건국 이래 600년이 넘는 역사를 이어온 서울을 임기 5년짜리 정권이 3~4개월 만에 바꿔보겠다는 발상 자체가 반민주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