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신문

즐기면, 져도 즐겁다



완독

경향신문

공유하기

닫기

보기 설정

닫기

글자 크기

컬러 모드

컬러 모드

닫기

본문 요약

닫기 인공지능 기술로 자동 요약된 내용입니다. 전체 내용을 이해하기 위해 본문과 함께 읽는 것을 추천합니다.
(제공 = 경향신문&NAVER MEDIA API)

내 뉴스플리에 저장

닫기

즐기면, 져도 즐겁다

1954년 스위스 월드컵에서 우리나라는 무려 두 경기 만에 16실점을 하고 만다. 9 대 0, 7 대 0이라는 점수만 보자면 월드컵 본선이라는 무대에 어울리지 않는 민망한 실력의 팀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힘없고 돈 없는 최빈국의 선수들이 꾸역꾸역 스위스로 넘어가며 다짐했을 의지와 투혼, 그런 그들에게 보낸 세계인의 관심과 응원이야말로 스포츠가 가진 힘이 아니었을까.

취미로 하는 주제에 감히 국가대표팀의 역사와 비교할 수는 없겠다만, 적어도 우리팀엔 그날 모든 것이 스위스 월드컵을 떠오르게 했다. 5전5패, 솔직히 실점은 기억할 수조차 없다. 숫자에 약한 것이 차라리 다행이랄까, 매번 첫 실점은 철렁했지만 하도 반복되다보니 당최 경기마다 몇 골을 먹었던지 기억도, 덧셈도 할 수 없었다. 하여간에 많이 먹었고 조금의 아슬아슬함도 느낄 새 없이 매번 졌다. 그냥 한 경기 한 경기 죽어라고 뛰는데도 공을 따라잡을 수 없고, 엉뚱한 곳에 패스를 하고, 기껏 마련한 상차림을 앞에 놓고도 헛발질을 해대며 거의 모든 경기를 무득점으로 마무리했다.

솔직한 마음으로는 지더라도 좀 아깝고 폼나게 지고 싶었지 이렇게 처참하게 밀리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나 우리 앞에 서 있는 상대팀들은 매번 왜 이렇게 하나같이 키도 크고, 젊고, 다부진데 어쩜 이렇게 유니폼까지 예쁜지, 정말 우리와 다른 세대라는 것을 계속 느꼈다. 심지어 우리가 주저앉아 헐떡거리는 숨을 정돈하고 있을 때, 쉬는 시간이라고 농구공을 튕기며 신나게 노는 상대팀의 저세상 체력을 보고 있자면 아직 안 싸웠는데도 결과가 눈에 보였다.

적게 잡아본대도 상대팀보다 평균 나이는 최소 열 살 이상 많을 테고, 창단 이후 우리가 제대로 된 코칭을 받은 지는 겨우 반년이 되었을 뿐이다. 심지어 선수를 다양하게 교체해가며 전술도 바꿔보고 체력도 아끼는 다른 팀과 달리 우리는 선수가 부족해 숨이 목끝까지 차올라 토할 것 같지 않는 이상 교체도 없다. 그러니 뒷구르기를 하며 쳐다본대도 처음부터 이길 수 없는 게임, 계란으로 바위 치기였다. 안 될 일임을 빨리 깨달아서였을까. 지고 또 지는 게임을 하고 대기실로 돌아올 때마다 우리는 각자의 가방에서 구운 계란, 찐 감자, 과일 등을 정신없이 꺼내 먹으며 깔깔 웃었다. 서로의 플레이에서 아주 깨알 같은 칭찬 포인트를 찾아내며, 아까 위치가 좋았다고, 시도가 좋았다고, 몸싸움이 늘었다고 서로를 격려했다.

꼴찌가 받는 찬사가 이렇게 달콤했던가. 혹여 우리가 기죽을까 걱정됐는지, 여자를 돕는 여자들은 고맙게도 열과 성을 다해 우리에게 함성과 박수를 보내주었다. 뻥뻥 뚫리는 수비진 덕에 정신없이 몸을 던져야 했던 골키퍼도, 유일한 한 골을 성공시킨 왕언니 슈터도 찐한 환호를 받았다. 우리를 기죽게 했던 그들 덕에 민망함을 내려놓고 더 많이 웃을 수 있었다. 비록 어설프고 서툴렀던 우리의 첫 대회는 그렇게 완벽하게 패했지만, 우리가 여기서 같은 운동을 하고 있다고 존재를 드러냈으니 그것만으로 됐다. 체력이 떨어지고 종종 무릎이 아프며 몸이 굼떠 생각만큼 위력적이지 않을지언정, 늦게 배운 도둑질이 재밌어서 정말 즐거운 풋살을 하는 언니들이 여기 있다고 알렸으니 행복한 하루였다. 사랑스러운 우리팀, 유니크한 우리팀, 아이러브 우리팀. 사랑할래 지구 끝까지.

김민지 풀뿌리 여성주의 활동가

김민지 풀뿌리 여성주의 활동가

  • AD
  • AD
  • AD

연재 레터를 구독하시려면 뉴스레터 수신 동의가 필요합니다. 동의하시겠어요?

경향신문에서 제공하는 뉴스레터, 구독 콘텐츠 서비스(연재, 이슈, 기자 신규 기사 알림 등)를 메일로 추천 및 안내 받을수 있습니다. 원하지 않는 경우 [마이페이지 〉 개인정보수정] 에서 언제든 동의를 철회할 수 있습니다.

아니오

레터 구독을 취소하시겠어요?

구독 취소하기
뉴스레터 수신 동의

경향신문에서 제공하는 뉴스레터, 구독 서비스를 메일로 받아보실 수 있습니다. 원하지 않는 경우 [마이페이지 > 개인정보수정] 에서 언제든 동의를 철회할 수 있습니다.

※ 동의를 거부하실 경우 경향신문의 뉴스레터 서비스를 이용할 수 없지만 회원가입에는 지장이 없음을 알려드립니다.

  • 1이메일 인증
  • 2인증메일 발송

안녕하세요.

연재 레터 등록을 위해 회원님의 이메일 주소 인증이 필요합니다.

회원가입시 등록한 이메일 주소입니다. 이메일 주소 변경은 마이페이지에서 가능합니다.
보기
이메일 주소는 회원님 본인의 이메일 주소를 입력합니다. 이메일 주소를 잘못 입력하신 경우, 인증번호가 포함된 메일이 발송되지 않습니다.
뉴스레터 수신 동의
닫기

경향신문에서 제공하는 뉴스레터, 구독 서비스를 메일로 받아보실 수 있습니다. 원하지 않는 경우 [마이페이지 > 개인정보수정] 에서 언제든 동의를 철회할 수 있습니다.

※ 동의를 거부하실 경우 경향신문의 뉴스레터 서비스를 이용할 수 없지만 회원가입에는 지장이 없음을 알려드립니다.

  • 1이메일 인증
  • 2인증메일 발송

로 인증메일을 발송했습니다. 아래 확인 버튼을 누르면 연재 레터 구독이 완료됩니다.

연재 레터 구독은 로그인 후 이용 가능합니다.
닫기
닫기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