⑭ 한반도 평화,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 (상)
한반도의 항구평화는 가능한가? 가능하다면 그것은 어떤 평화이며, 주체는 누구이며, 조건은 무엇인가? 한국전쟁 정전 이후 시기 전체에 대한 개관을 통해 우리는 전쟁의 부재 속에 평화와 위기를 반복하였음을 살펴보았다. 오늘의 시점에서 문제를 보건대, 전후 국제 차원의 한반도 평화 문제는 세 번째의 결정적 변곡점에 진입해 있다. 첫째는 한국전쟁이 정초한 이른바 전후 냉전시대였다. 둘째는 사회주의 붕괴와 냉전 해체로 인한 탈냉전·세계화 시대였다. 지금은 셋째 국면으로서 탈세계화와 미·중 대결 시대라고 규정할 수 있다. 항구평화를 향한 경로와 선택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에 살펴보고, 오늘은 현재의 조건과 상황에 대한 객관적 인식에 집중하고자 한다.
우리에게 한반도 평화 문제는 오랫동안 한국과 조선,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남한과 북한이라는 두 ‘분단국가’ 사이의 남북관계, 또는 분단 극복 내지는 평화통일 범주를 함의하였다. 한반도 평화의 속살은 보수와 진보 모두에서 일정한 ‘흡수’·‘평화’ 통일 내지는 민족주의적 교류협력에 직결된 사정(射程)이었다. 그러나 오늘날 남북관계는 한반도 평화의 극히 일부를 구성할 뿐이고, 오히려 국제 문제로서 한반도 평화 문제는 남북관계와 통일 문제를 초월하여 존재하는 측면이 강하다. 나아가 교류와 협력 위주로 보든, 적대와 대결 위주로 보든, 남북관계를 중심으로 접근하는 것 자체가 한반도 평화 문제의 본질과 변화를 파악하는 데 장애로 작용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군사분계선을 경계로 두 ‘국민국가’가 대치하고 있는 상황은 불변의 현실이며, 핵·미사일 문제를 포함한 글로벌 안보·평화 문제 역시 ‘국제 문제’인 동시에 ‘한반도 문제’이자 ‘북한 문제’라는 점도 명약관화하다. 그리고 미·중 대결, 또는 미·일 대(對) 중·러 사이의 진영 정렬과 대결을 포함한 국제관계의 삼투 역시 한·미·일 대 조·중·러 구도, 즉 한국과 조선이라는 두 전초 국가를 매개로 하여 이루어진다는 점도 피할 수 없는 조건이다.
오늘의 한반도 평화 조건은 탈냉전 시기와 비교하여 완전히 다르거나 역진되었다
미·중 무역갈등 한복판에 한국 반도체가 놓인 것도 주지의 사실이다. 변화와 기시감의 오묘한 공존이다
‘진영’ 부활로 비핵화 동력 뒤집혀
먼저 오늘의 한반도 평화 조건은 탈냉전 시기와 비교하여 완전히 다르거나 역진되었다. 사회주의 붕괴와 소련 해체 직후 미국의 유일 글로벌 제국 부상, 독일 통일, 유럽 통합, 자유주의와 시장경제의 승리주의 만연, 남북 국력의 현격한 격차, 북한 붕괴론, 한·중 수교와 한·소 수교 및 북한 고립, 남북기본합의서 채택, 한반도 비핵화에 관한 공동선언에 이르기까지 일련의 집중적인 구조 변동은 글로벌-한반도-남북 내부 차원에서 한반도 문제의 해결, 즉 화해와 공존, 평화와 통일에의 장밋빛 전망을 가능케 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러한 전망은 한 세대도 지나지 않은 현재, 다시 대전환을 맞고 있다. 가장 먼저는 중국의 부상과 미·중관계 변화다. 전술했듯 현대 미·중관계의 초기 정초는, 한국전쟁에서의 대결이라는 한반도 문제로 인해 놓였다. 역사적으로, 그리고 현재까지 미국과 중국은 오직 한반도에서만 직접 충돌하였다. 정전 70주년을 맞아 두 제국은 한국전쟁에서의 상대에 대한 승리를 집중적으로 강조하고 있다.
한국전쟁에서의 미·중 직접 충돌 이후 한·미 동맹과 미·중 협조체제 시기 동안 한국의 비약적 발전은 매우 시사적이다. 한반도 평화와 번영의 조건을 알려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의 미·중 무역갈등과 중국 봉쇄 전략의 한복판에 한국의 반도체가 놓여 있다는 것도 주지의 사실이다. 변화와 기시감의 오묘한 공존이다. 변화도 기시감도 둘 다 환영이 아니다. 즉 현실이다. 그러나 미·소 대결 시의 이른바 냉전(cold war) 상황과, 미·중 대결 구도하의 반도체전쟁(chips war) 사이의 차이는 짚을 필요가 있다.
냉전체제의 등장, 즉 미·소 연합에서 미·소 대결로 전이하는 동안에는 분단과 한국전쟁을 겪었다. 냉전체제의 해체, 즉 소련 해체와 미·중 접근 시기에는 한·중-한·소 관계 정상화와 조선에 대한 한국의 압도적 우위, 조선의 고립과 위기가 가속화하였다. 탈냉전 당시 가장 중요한 변화는 중국과 러시아의 한국 쪽으로의 전환이었다. 북핵 문제 초기에도 이 구도는 지속되었다. 중국과 러시아가 한국 편을 든 이유는 세 가지였다. 첫째는 핵 비확산(NPT) 체제의 유지였고, 둘째는 유일 제국 미국의 압도적 국제 위상과 영향력, 셋째는 발전한 한국과 위기에 직면한 조선 사이에서 국익을 위한 한국 지지였다.
핵문제로 인한 국제적 대북 제재체제(sanction regime)의 등장으로 한국전쟁 이후 최초로 유엔과 국제사회에서 중·러가 조선이 아닌 한국 편을 든 것이다. 한국전쟁 이후 체제, 즉 정전체제의 반대가 제재체제였다. 엄청난 변동이자 절호의 기회였다. 적어도 국제 차원에서 한반도 전후체제, 즉 냉전체제는 잠정적으로 붕괴된 것이었다. 하나는 북한 비핵화를 위한 기회였고, 다른 하나는 한반도 평화를 향해 구조적으로 열린 가장 넓은 창이었다.
이 점이 중대한 역설이었다. 중·러의 한국 접근으로 고립이 심화될수록 김일성·김정일을 비롯한 북한 지도부는 유일한 혈로요 활수로서 더욱 핵개발에 집착하였다. 조선의 견지에서 핵은 체제 수호와 생존을 위한 최고 수단으로 개발된 것임에도 불구하고 탈냉전 시기 미국과 한국과 국제사회는 주로 경제와 안보의 교환, 또는 지원과 핵 포기를 교환하는 기능주의로 접근하였다. 북핵 개발의 저지에 실패한 연유였다. 이 점은 세계화 시기 국제사회와 한국의 큰 외교 실패이자 안보 실패의 하나였다.
요컨대 한반도 문제의 세 번째 국제적 국면에서 미·중 갈등 못지않게 중요한 점은 조선의 핵국가로의 부상과 핵능력의 고도화였다. 그리고 중국과 러시아의 대북 제재 반대로 인한 제재체제의 붕괴와 한·미·일 대 조·중·러 진영 대결의 부활이다. 이 점은 지난 30년 동안 한반도 문제의 비핵평화 방향으로의 추이와 동력을 뒤집는 큰 손실이 아닐 수 없다. 정전체제에서 제재체제로의 이행은 한반도 문제 구도의 가장 중대한 변화의 하나였다. 그러나 이제 진영 대결이 다시 부활하였다. 트럼프와 김정은 사이의 전후 최초의, 그리고 세 번에 걸친 미·조-조·미 정상회담이라는 ‘역파국적’ 계기에도 불구하고 다시 돌아간 것이다.
국제사회는 경제와 안보 교환 등 기능주의로 접근해 북핵 개발의 저지에 실패했다
또 진영대결이 부활했다. 잃어버린 30년의 후과로 향후 한반도 문제가 나쁘게 고착될 가능성이 보인다
최근 진영 회귀 과거보다 더 나빠
지난 탈냉전·세계화 시기가 과연 한반도 문제에 관한 ‘잃어버린 (황금의) 30년’이 될 것인지, 아니면 미·소 냉전과 미·중 대결 사이의 두 번째 전간기(戰間期)가 될 것인지는 아직 기회와 기로의 사이에 놓여 있지만, 한반도 문제에서 결정적 호기를 상실하였다는 점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작게는 한·조관계 단절로부터 시작해서, 북핵 강화와 고도화, 한·중 갈등 심화, 미·조-조·미 관계 단절, 중·러와 조선의 재결속, 한·미·일 대 북·중·러 진영 대결의 복귀에 이르기까지 한반도 문제는 명백히 구조적 재악화 국면으로 접어든 것으로 보인다.
더욱 나쁜 점은 중·러가 핵무력이 강화된 조선을 지지하며 제재체제에서 이탈하는 동시에 조·중·러 연대를 부활하였다는 점이다. 미·중 갈등과 함께 최근 들어 한반도 문제의 가장 큰 구조적 격변이 아닐 수 없다. 북한의 제1차 핵실험 직후인 2006년 10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결의안 1718호부터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화성-15형 시험발사와 함께 국가 핵무력의 완성을 선언한 직후인 2017년 12월 2379호까지 9차례에 걸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대북 제재 결의는 모두 만장일치였다.
그러나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략 이후인 2022년 5월 대북 제재 결의안은 중·러의 반대로 부결되었다. 처음이었다. 2023년 ICBM 화성-18형 발사를 응징하기 위해 소집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대북 제재 결의안은커녕 규탄성명의 채택조차 실패하였다. 북핵 문제로 인하여 등장했던 제재체제는 붕괴되고, 거꾸로 북핵 문제가 국제정치의 NPT 체제를 내부 분열로 인하여 안으로부터 파열시키고 있는 것이다.
최근의 한반도 문제 구도는 진영 대결 계선의 부활이라는 점에서는 정전협정 체결 당시, 또는 냉전시대 대결로의 회귀라는 측면이 강력하게 존재한다. 그러나 최근 회귀는 그때보다 더욱 나쁜 성격을 내장한다. 하나는 중·러 밀착이고 다른 하나는 조선의 핵무장이다. 한국전쟁 이전과 전후 중·소관계는 한반도 문제에 관한 한 한국전쟁 발발에 대한 동의를 제외하면 같은 노선과 정책을 추구한 적이 없었다. 국제 문제 자체에 대해서도 중·소 갈등과 긴장은 일반이었다. 그러나 현재는 오히려 중·러의 한국과의 국교정상화 및 대북 제재체제 구축(과 실패) 이후, 반대로 조·중·러 연대를 형성하여 한반도 문제에 대한 결속의 정도를 높이고 있다.
잃어버린 30년의 후과로 인해 향후 한반도 문제가 나쁘게 고착될 가능성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지금은 핵을 가진 조선의 중·러와의 재연대라는 점을 정확하게 판독하지 않으면 안 된다. 과거에는 핵이 없던 조선과의 연대였다면 이제 비핵화를 위한 제재는커녕 거꾸로 핵국가들 사이의 결속이 복원되었다. 한국과 국제사회의 북한 비핵화와 한반도 비핵평화 과제가 앞으로 얼마나 힘들지를 보여주는 징표가 아닐 수 없다. 붕괴론에 시달리던 조선으로서는 냉전시대와 같은 구조적 안정성을 누릴 수 있는 국제조건을 갖게 된 것이다.
조선에 대한 적대를 넘어 한국과 조선 관계는 역대 최장의 대화 단절 상태에 있다
이런 상황은 비핵화는 물론 한반도 문제의 평화적 관리를 위해서도 바람직한 접근법이라고 하기 어렵다
조선, 핵개발에 역설적 호조건
국제적 차원에서 한반도 문제의 또 하나 변수는 미국 국력의 위축이다. 사실 북핵 문제도 유일 제국 당시 북핵 문제가 아직 심각하지 않을 때 미국이 과감한 대북 직접 타결 대신 과도하게 중국에 의존하면서 악화된 측면이 존재한다. 이 점은 최근 들어 미국 주도로 (반대 방향에서) 일본을 포함한 최초의 한·미·일 안보협의체 형태로 나타났으나, 이것이 과연 한반도 문제의 평화적인 궁극적 해결에 유리하게 작용할지에 대해서는 예측하기 어렵다. 탈냉전 시대 중국에의 의존처럼 탈세계화 시대 일본의 역할 증대는 일본과의 전쟁 경험을 가진 중·러의 위협의식, 그리고 조·중·러 결속의 강화, 현재의 일·조관계의 단절을 고려할 때 긍정적이지만은 않다. 특히 그간 모든 한국 정부가 한·미 동맹에 대한 미국 공약의 이완에 대한 우려, 그리고 한·미 동맹의 미·일 동맹의 하위 요소로의 전락 가능성 때문에 한·미·일 공동 안보체제나 기구를 주저해왔던 점에 비추어 이 문제는 긍정과 부정의 측면을 동시에 안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한반도 문제의 또 하나 구조적 변화는 미·중관계 및 세계 진영 대결 구도의 부활 못지않은 한·조관계와 미·조-조·미 관계의 근본적 변화라고 할 수 있다. 한국과 조선의 현재 상태는 탈냉전 이래 가장 오래 단절적이며 적대적이다. 최고지도자의 인식과 언명에서도 상대에 대한 군사적 언어와 어휘들이 반복해서 사용되고 있다. 반면 대화와 관계는 전면 중단 상태이다. 하나의 간단한 일지를 보자. 현재의 한·조관계가 얼마나 단절되었는지를 한눈에 알 수 있다.
2018년 12월 이후 현재에 이르기까지 5년 동안 공식적인 한·조(남북) 대화는 부재하다. 이것은 민족은커녕 국가 간 외교관계에서조차 최악의 적대 내지는 외교 단절 상태가 아닐 수 없다. 이는 1971년 남북 대화의 시작 이래 냉전시대를 포함하더라도 역대 최장의 대화 부재 상태라고 할 수 있다. 박정희 시기와 전두환 시기조차 이토록 장기간 단절된 적은 없었다.
게다가 2019년 10월 이후 북·미 핵협상도 중단 상태이다. 탈냉전 이후 두 번째로 긴 북·미 대화 중단 상태라고 할 수 있다. 북핵 문제가 한반도와 국제사회의 심각한 안보불안 요인으로 등장했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대화가 장기간 중단된 상태인 것이다. 현재 북한 핵과 미사일 문제는 국제기구와 국제관계 어느 차원에서도, 양자건 다자건, 완전히 방치되고 있다. 핵 개발과 실험에 관한 한 조선으로서는 통제권과 협상 밖에 놓이는 역설적 호조건을 맞은 것이다.
역대 최장 북·미 대화 단절은 2012년에서 2018년까지 약 6년간이었다. 이것을 보면 탈냉전 이후 (트럼프 정부를 사이에 두고) 오바마-바이든 정부로 이어지는 미국 민주당 정부의 북핵 문제 방치 기간이 매우 길었음을 알 수 있다. 현재처럼 한·조관계와 미·조관계가 완벽한 대화 단절 상태에 놓여 있는 가운데 바람직한 비핵평화의 해법이 도출될 가능성은 없다. 짧게는 탈냉전·세계화 이후, 길게는 한국전쟁 이후 가장 역설적인 것은 가장 예측불가능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시기에 조·미관계가 가장 가까웠고, 또 한반도 비핵화와 북·미관계 정상화의 해결 가능성이 높았다는 점이다. 과거 미·소, 미·중 관계 개선과 국제질서 안정화의 사례에 비추어 이는 매우 시사적이다.
조선에 대한 적대를 넘어 관계와 대화의 단절은 비핵화는 물론 한반도 문제의 평화적 관리를 위해서도 바람직한 접근법이라고 하기 어렵다. 그사이 북한은 2022년 3월 ICBM 실험을 재개하였고, 고체연료 화성-18형 등 수차례에 걸친 ICBM 발사, 전략순항미사일 수중 발사, 핵무인수중공격정 폭발실험 등을 단행하였다. 2022년 9월에 법제화한 핵무력정책법령에 선제공격 조건을 포함하였다. 이제 국가안보를 넘어 최고지도자 개인의 안위와 핵사용을 연결시키는 가공할 상태로까지 나아가 있다.
한국과 조선, 한·미·일 대 조·중·러의 지속적인 군비증강과 강경대결의 흐름은 더욱 강화되면 되었지 멈추지 않고 있다. 이대로 방치할 경우 북한의 핵능력은 한 세대 내에 100~200개의 핵무기를 갖게 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한국의 국방비는 100조원에 육박할 것이다. 인구감소, 복지수요, 삶의 질, 전체주의 조선의 세습체제, 북핵 리스크, 미·중 대결 심화를 고려할 때 한반도 항구평화를 위한 사려 깊은 주체적 지혜가 절실한 까닭이다.
연세대에서 정치학을 가르치고 있다. 제주 4·3(석사)에 이어 한국전쟁에 대한 연구(박사)로 학문의 길에 들어선 이래 평화 문제를 중심으로 정치현상 연구에 천착해왔다. 정치학자로서, 역사학자로서 전쟁과 평화, 생명과 인간, 그리고 국가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하고 답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 <한국전쟁의 발발과 기원 1, 2> <다음 국가를 말하다> <역사와 지식과 사회> <한국 1950: 전쟁과 평화>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