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산재 사각지대, 남겨진 가족들

피해자는 죽고 가해자는 징계 불복…세라믹기술원 인턴 괴롭힘 사건 그 후

전지현 기자

성희롱·폭언 문제 제기한 장애인 인턴, 6월 숨져

어머니 “자가면역질환이 극심한 스트레스로 재발”

기술원, 가해자 ‘감봉 3개월’ 경징계...불복 소송 중

산업통상자원부 산하 한국세라믹기술원(기술원)의 한 연구원으로부터 성희롱·폭언 피해를 입고 지난해 고용노동청 등에 문제를 제기한 장애인 체험형 인턴 김여진씨(가명·26)가 지난 6월 세상을 떠났다.

딸이 세상을 떠난 지 3개월. 김씨의 어머니 정미경씨(가명)는 완치에 가깝던 여진씨의 지병이 갑자기 재발해 끝내 합병증으로 사망에 이르게 된 경위를 되짚고 있다. 의사는 “스트레스에 의한 재발일 것”이라는 소견을 냈다. 유가족들은 지난해 A씨의 폭언 이후 노동청 진정 등을 거치는 동안 김씨의 병이 깊어졌다고 보고 있다.

지난 5일 한국세라믹기술원 내 성희롱, 폭언 피해 인턴 김여진씨(가명)의 어머니 정미경씨(가명)가 경향신문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전지현 기자

지난 5일 한국세라믹기술원 내 성희롱, 폭언 피해 인턴 김여진씨(가명)의 어머니 정미경씨(가명)가 경향신문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전지현 기자

여진씨는 중학교 2학년 때부터 자가면역질환인 ‘루푸스’를 앓았다. 인체를 방어하는 면역계가 알 수 없는 이유로 인체를 공격하는 병이다. 10대를 거의 침대에서 보낸 여진씨는 20대에 신장투석을 시작한 이후 남들처럼 평범한 일상을 살았다. 그는 4년 전부터 매일 신장 투석을 했고, 신장을 공격하던 루푸스는 비활성기에 돌입했다. 정씨는 여진씨가 “체력이 약했지만, 그 이외에는 누가 봐도 아픈 걸 모를 정도로 회복됐었다”고 했다. 그는 검정고시를 봤고, 대학에 입학했고, 샐러드 가게 등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기도 했다.

여진씨는 신장장애로 장애등급을 받았다. 그는 장애인 채용 공고로 2020년 경남 진주에 있는 기술원의 인턴이 됐다. 이듬해 12월부터 A씨의 폭언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고용노동부 진주지청은 지난해 10월 여진씨가 낸 직장 내 괴롭힘 진정 사건에서 “예뻤는데 지금은 왜 이렇게 살쪘냐. 이런 걸 성희롱으로 신고하지는 않겠지?” 등 A씨 발언을 성희롱으로 인정했다. “장애인이라 정규직 못 시켜준다. 몸이 아픈데 머리까지 나쁘면 어떡하냐, 멍청하다” “지금 투석을 한다고 하고 방통대 다니는 것 같은데 쓸데 없는 거 왜 하는지 모르겠다” 등 장애 비하 발언도 괴롭힘으로 인정했다. 이 사건은 지난해 10월 국회 산업통상자원중소벤처기업위원회 국정감사에서 공론화됐다.

신영대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지난해 10월14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산업통상자원중소벤처기업위원회의 국정감사에서 한국세라믹기술원 내 성희롱 관련 질의를 하며 제시한 PPT 자료. “원래는 예뻤는데” “장애인이라 정규직 못 시킨다” 등의 폭언이 제시됐다

신영대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지난해 10월14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산업통상자원중소벤처기업위원회의 국정감사에서 한국세라믹기술원 내 성희롱 관련 질의를 하며 제시한 PPT 자료. “원래는 예뻤는데” “장애인이라 정규직 못 시킨다” 등의 폭언이 제시됐다

A씨의 폭언은 공공연한 사실이었지만, 동종업계 연구원 또는 종사 예정인 학부 인턴들은 고발에 소극적이었다. 여진씨의 전 직장동료 B씨는 “누가 누구와 잠자리를 하고 다니는 것 같다느니, 여자 인턴들에게 원색적인 심한 말을 많이 했었다”며 “다들 비정규직이고 학생연구원이다 보니 제대로 대응을 못 했다. 여진씨가 ‘나는 장애인이고 업계를 떠나도 된다’며 총대를 멨던 것”이라고 했다.

여진씨는 지난해 12월 중순 인턴 계약이 만료돼 기술원에서 퇴사 처리됐다. 직장 내 괴롭힘 건으로 여진씨가 회사에 고충 면담을 한 것은 지난해 5월. 고용노동청에 진정을 접수한 것은 같은 해 10월이었지만 그때까지 진정 결과는 나오지 않았다. 그동안 여진씨는 우울 및 불면 증세로 적응 장애를 진단받아 정신과 치료를 받았다. 정씨는 “여진이가 혹시 회사에서 A와 마주칠까 봐 30분 전에 다른 쪽으로 퇴근을 하고 호신 스프레이를 준비할 정도로 불안해했다”고 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퇴사 이후 루푸스 재발 전조가 나타났다. 정씨는 “루푸스가 도지면 더 강력하게 와서, 뼈뿐 아니라 온갖 말단을 공격한다고 하더라. 입술이 다 부르트고, 발꿈치에도 궤양같은 게 보였다”고 했다. 한 달에 한 번씩 한 정기검진에서 내내 정상적인 수치를 보였기에 가족들은 재발을 상상하지 못했다. 루푸스의 발병 10년 생존율은 90% 이상이다. 투병 중 여진씨는 한 직장동료에게 카카오톡 메신저로 “의사 말로는 투석 중엔 루푸스가 재발하기 어려운데 ‘이건 분명 스트레스 때문일 거다’라는 말을 들었다”고 했다.

루푸스 활성화로 병세가 악화된 끝에 사망한 고 김여진(가명·26)씨가 생전 전 직장동료와 나눈 카카오톡 대화 갈무리. 여진씨는 “거의 완치됐던 자가면역질환이 직장 내 괴롭힘 극심한 스트레스로 재발했다”고 했다.

루푸스 활성화로 병세가 악화된 끝에 사망한 고 김여진(가명·26)씨가 생전 전 직장동료와 나눈 카카오톡 대화 갈무리. 여진씨는 “거의 완치됐던 자가면역질환이 직장 내 괴롭힘 극심한 스트레스로 재발했다”고 했다.

여진씨는 입원 치료 중에도 회사에 방문해 피해 사실을 진술하고, A씨에 대한 민사소송을 준비했다. 그러다 지난 4월 중증의 루푸스 발작으로 뇌사 상태에 이르렀고 지난 6월 사망했다. 사인은 루푸스뇌염에 의한 2차적 뇌출혈 합병증이다.

기술원은 지난 3월에야 A씨를 징계했다. ‘감봉 3개월’이라는 경징계였다. 감봉 액수는 월 10만8015원, 총 30여만원에 불과했다. A씨는 현재 기술원에서 근무하며 징계 불복 소송을 진행 중이라고 한다. 기술원 관계자는 “지난 3월 소장이 기관에 접수돼서 현재 소송 진행 중이나, 재판은 아직 시작되지 않은 상황”이라고 했다.

딸을 잃은 어머니는 장례를 치른 지 100일이 넘은 이 날까지 죽은 것도, 산 것도 아닌 상태로 살고 있다고 했다. 정씨는 “워낙 사람을 괴롭히는 병이니, 우리 여진이가 50대까지 살 수 있을까 생각은 했지만 이렇게 일찍 갈 줄 몰랐다”고 했다. 그러면서 “더는 울지 않고, 여진이가 마지막으로 하려던 일을 하려고 한다”고 했다.

유가족들은 여진씨가 준비하던 민사소송을 이어 진행하고, 기술원을 상대로 산재 신청을 낼 예정이다. 루푸스 활성화(재발)의 업무 관련성 입증이 관건이다.

유가족 측을 대리하는 유화영 노무사는 19일 “여진씨가 지난해 5월 회사에 감사 신청을 넣은 후 5개월간 가해자와 피해자는 분리되지 않았고, 고용노동부 진정 이후에야 분리 조치가 이뤄졌다”며 “퇴사 이후에도 징계 결과가 나오지 않아, 피해자가 극도의 스트레스에 장기간 노출돼 있었다”고 했다. 유 노무사는 “이로 인해 지병이 악화됐다는 것까지 인정받기 위해 노력할 것”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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