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행 기준 넓힌 판례 법리 변경
원심 깨고 서울고법 파기 이송

김명수 대법원장의 마지막 전원합의체 선고일인 21일 서울 서초구 대법원 대법정에서 열린 성폭력처벌법 위반(친족관계에 의한 강제추행) 혐의 등 전원합의체 선고를 위해 김명수 대법원장과 대법관들이 자리에 앉아 있다. 한수빈 기자
대법원이 유형력(신체에 가해진 물리적 힘)을 수반한 것만으로도 강제추행죄가 성립한다는 새로운 판례를 제시했다. 피해자가 저항하기 곤란할 정도의 폭행과 협박이 있어야 강제추행죄가 성립한다고 본 기존 판례를 40년 만에 변경한 것이다. 강제추행죄 처벌 범위가 넓어지게 됐다.
대법원 전원합의체(주심 노정희 대법관)는 21일 성폭력처벌법 위반(친족 관계에 의한 강제추행) 혐의로 기소된 A씨에게 벌금 1000만원을 선고한 원심을 깨고 사건을 서울고법으로 보냈다.
A씨는 10대였던 사촌 동생을 끌어안아 침대에 쓰러뜨리고 신체 부위를 만지는 등 강제추행한 혐의로 기소됐다. A씨는 당시 “만져 줄 수 있냐” “한 번 안아줄 수 있냐” 등 말을 하자 자리를 피하려는 사촌 동생을 따라가 강제로 추행했다.
1심은 강제추행 혐의를 유죄로 인정해 A씨에게 징역 3년을 선고했다. 반면 2심은 강제추행 혐의를 무죄로 판단했다. A씨 발언이 피해자가 아무런 저항을 할 수 없을 정도의 공포심을 느끼게 할 정도가 아니었으며, A씨가 행사한 물리적 힘의 정도 역시 피해자의 저항을 곤란하게 할 만큼은 아니라고 봤다. 다만 위력을 행사한 경우 범죄로 인정되는 아동청소년성보호법상 위계 등 추행 혐의를 적용해 벌금 1000만원을 선고했다.
강제추행죄는 ‘폭행 또는 협박’으로 사람을 추행했을 때 성립하는 범죄다. 이때 어느 정도여야 ‘폭행 또는 협박’으로 인정할 것인지가 성범죄 사건에서 오랜 기간 논쟁거리였다. 기존 대법원 판례는 폭행과 협박 수준이 ‘피해자가 상대방에게 저항하는 것이 곤란한 정도’에 달해야 강제추행죄가 성립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이날 새로운 기준을 제시했다. 대법원은 “강제추행죄의 추행 수단이 되는 ‘폭행 또는 협박’에 대해 피해자의 항거가 곤란할 정도일 것을 요구하는 종래의 판례 법리를 폐기한다”고 밝혔다. 이어 “상대방의 신체에 대해 불법한 유형력을 행사하거나 상대방으로 하여금 공포심을 일으킬 수 있는 정도의 해악을 고지해 상대방을 추행한 경우 (강제추행죄가) 성립한다”고 판시했다.
대법원은 “강제추행죄의 성적 자기 결정권이라는 보호법익과 근래 재판 실무의 변화에 따라 해석 기준을 명확히 할 필요성 등에 비춰 강제추행죄의 ‘폭행 또는 협박’의 의미를 새롭게 정의한 것”이라고 판결의 의의를 설명했다. 다만 이번 판결은 법 문언 그대로 ‘폭행 또는 협박’을 해석하자는 취지이지 법 해석만으로 ‘비동의 추행죄’를 인정하자는 것은 아니라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