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원 전원합의체가 21일 강제추행의 범위를 종전보다 넓힌 새 판례를 제시하자 여성계가 “성인지 감수성 측면에서 진일보한 판결”이라며 환영의 뜻을 표했다. 일각에서는 상대방의 동의 여부를 추행의 기준으로 삼도록 법 개정이 뒤따라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다.
이소희 한국성폭력연구소장은 통화에서 “최근에는 물리적 폭력에 국한한 성폭행보다 그루밍·회유 등으로 인한 성폭력 사건이 훨씬 많다. 폭행·협박을 전제하는 기존 판례로는 피해자들의 상황적 맥락을 고려할 수 없다는 점에서 한계가 있다”면서 “강제추행을 판단할 때 얼마나 저항했느냐를 따진다는 것은 결국 ‘피해자다움’을 요구하는 결과로 이어진다. 기존의 폭행·협박을 전제하는 경향이 변화되기 시작한다는 점에서는 환영할 만한 일”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지금껏 대법원이 성인지 감수성 측면에서 진보적인 판결을 내놓기는 했지만 수사기관 등에서는 여전히 성폭행에 대한 협소한 인식이 통용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라며 “이번 판결로 하급심과 수사기관 등에서 법을 수학 공식처럼 적용할 것이 아니라 피해자의 입장과 관점에서 적극적으로 해석하려는 변화가 일어나길 바란다”고 했다.
배진경 한국여성노동자회 대표는 “통상 사회현상에 대해 보수적인 해석을 내놓은 사법기관이 이러한 판결을 내렸다는 것을 반갑게 받아들인다”며 “피해 여성들이 피해를 입증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2차 가해에 시달려야 했다. 이번 판결을 계기로 피해자들이 더욱 적극적으로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을 거라고 기대한다”고 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성폭행의 기준을 ‘상대방의 동의 여부’로 삼아야 한다는 의견도 있었다. 배 대표는 “상적 자기결정권은 결국 합의의 문제로 접근해야 하고 여성의 동의 여부가 핵심이 되어야 한다. 성폭행의 기준에 ‘여성의 저항 정도’를 따지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면서 “이제는 사회적 인식변화와 함께 법 개정에 대해 논의를 해나가야 할 때”라고 했다.
양이현경 한국여성단체연합 공동대표는 “이번 판결은 기존의 판단 기준이 완화됐을 뿐 ‘저항과 항거의 표시가 있어야 한다’는 전제에는 변화가 없다는 점에서 한계가 있다”고 했다.
오선희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여성인권위원회 변호사는 “기존에도 강제추행의 요건을 폭넓게 해석해왔기에 이번 판결이 지금까지의 흐름을 크게 바꾸는 판례라고 보긴 어렵다”면서도 “강제추행 요건인 폭행·협박에 대한 폭넓은 정의를 명문화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