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명수 대법원장 등 대법관들이 21일 서울 서초구 대법원 대법정에서 열린 전원합의체 선고에서 자리에 앉아 있다. 대법원 제공·연합뉴스
강제추행죄 처벌 범위를 넓힌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이 나왔다. 상대방을 협박해 공포심을 느끼게 만든 뒤 성추행해도 처벌할 수 있도록 했다. ‘저항하기 곤란할 정도’의 폭행이나 협박이 있어야 한다는 기존 판례의 좁은 법리는 40년 만에 폐기됐다. 자유롭고 평등한 개인의 성적 자기 결정권을 존중한 대법원 결정을 환영한다.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21일 성폭력처벌법 위반 혐의로 기소된 A씨에게 벌금 1000만원을 선고한 원심판결을 파기하고 사건을 서울고법에 돌려보냈다. 대법원은 강제추행죄 요건인 ‘폭행 또는 협박’에 대해 “상대방의 신체에 대하여 불법한 유형력을 행사(폭행)하거나, 일반적으로 보아 상대방으로 하여금 공포심을 일으킬 수 있는 정도의 해악을 고지(협박)하는 것”이라고 새로 정의했다. 일반 형법에서 폭행·협박죄가 인정되는 수준의 행위가 있었다면 강제추행으로 인정해야지, 성폭력 피해자의 저항을 기준 삼으며 ‘피해자다움’을 요구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대법원은 “ ‘항거 곤란’을 기준 삼는 것은 피해자에게 ‘정조’를 수호하는 태도를 요구하는 입장을 전제하고 있고, 개인의 성적 자기결정권을 보호하고자 하는 현행 법 해석으로 타당하지 않다”고 판단했다.
이 사건 피고인 A씨는 2014년 미성년자인 사촌동생을 강제추행한 혐의로 기소됐다. 1심 군사법원에서는 징역 3년형을 받았지만, 항소심에선 벌금형에 그쳤다. 피고인이 저항이 불가능할 정도의 물리력을 행사하지 않았다며 강제추행 혐의를 무죄로 판단하고, 아동청소년성보호법 위반 혐의만 적용했기 때문이다. 이번 판결은 사법부가 성폭력 사건에서 피해자의 ‘저항 유무’를 따지는 기계적 판단을 넘어, 가해자와 피해자의 상황을 종합적으로 고려하는 성인지감수성을 갖춰야 한다는 이정표를 세우며 명문화한 것으로 뜻깊다. 최근 강제추행 기준을 완화해온 판례의 지평을 더욱 확장한 것이다.
대법원이 1983년 이후 40년 만에 판례를 전향적으로 변경함에 따라 향후 그루밍 폭력을 비롯해 갈수록 교묘해지는 성범죄 처벌도 종전보다 강화될 것으로 기대된다. 수사과정에서 성폭력 피해자에게 얼마나 저항했는지 따지는 ‘2차 가해’도 이번 판결을 기점으로 사라져야 한다. 시민들의 법 감정과 괴리된 채 초범이라거나 반성한다는 이유로 성범죄자의 형량을 깎아주는 법원 일각의 관행도 돌아볼 때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