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신문

기꺼이 타협하고 오염돼 가며 남긴 메시지…천 년 뒤 도착한 ‘싸움의 기술’



완독

경향신문

공유하기

닫기

보기 설정

닫기

글자 크기

컬러 모드

컬러 모드

닫기

본문 요약

닫기
인공지능 기술로 자동 요약된 내용입니다. 전체 내용을 이해하기 위해 본문과 함께 읽는 것을 추천합니다.
(제공 = 경향신문&NAVER MEDIA API)

내 뉴스플리에 저장

닫기

기꺼이 타협하고 오염돼 가며 남긴 메시지…천 년 뒤 도착한 ‘싸움의 기술’

  • 하미나 작가
[하미나의 경계에 살다]기꺼이 타협하고 오염돼 가며 남긴 메시지…천 년 뒤 도착한 ‘싸움의 기술’

중세의 침묵을 깬 여성들
이은기 지음
사회평론아카데미 | 416쪽 | 2만5000원

한동안 나는 울부짖으며 고통을 말하는 여자들의 이야기를 찾아다녔다. 웅얼대는 목소리, 흐느끼는 목소리, 끝내 침묵하고 마는 묵음의 목소리를 들으며 그들이 말하는 바를 알아들으려 애썼다. 중세로 치자면 억울하게 마녀로 몰려 화형당한 여자들이었다.

최근에는 살아남은 여자들의 이야기를 찾아 읽는다. 기꺼이 타협하고 오염되기를 선택하며 자기 목소리를 후세에 전하는 데 성공한 여자들의 이야기를 읽는다. 그들로부터 싸움의 기술을 전수받고 싶어서다.

서양 중세와 르네상스 미술사학자 이은기의 책 <중세의 침묵을 깬 여성들>은 그 과정에서 발견한 책이다. 책은 여성에게 매우 억압적이었던 중세 시대에 태어나 끝내 성녀로 추앙받는 위치에 오른 세 명의 여성 신비가에 대해 다룬다. 여기서 신비가란 비전(vision)을 체험한 이들을 뜻하는데, 신비가들에게 비전이란 “다른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는 종교적인 형상이나 사물, 사건을 인지하는 영적인 또는 종교적인 경험”이다.

중세 신비가는 몰아의 경지에서 신과 일치를 이룬 사람으로 칭송받지만, 동시에 신비주의에 대한 끊임없는 논란 때문에 이들의 경험은 ‘비합리적이다, 반이성주의다, 초자연주의다, 이단이다’와 같은 오해와 비판을 받아오기도 했다. 그러나 중세 신비가들에게 신비 경험은 합리적인 논증 이상의 것, 정서적이고 신체적인 체험을 통합하는 신과 직접 만나는 합일 체험이었다.

책은 세 성녀를 집중적으로 조명한다. 12세기 수녀원장이었던 빙엔의 힐데가르트(Hildegard von Bingen, 1098~1179), 폴리뇨의 안젤라(Angela da Foligno, 1248~1309), 시에나의 카타리나(Caterina da Siena, 1347~1380)가 이들이다. 성녀를 다루기는 하지만 종교인으로 다루지는 않는다. 그보다 중세에 여성이 교육을 받을 수 있었던 유일한 공간인 수녀원에서, 그러나 가부장적인 위계를 지닌 가톨릭 사회에서, 자신의 주관을 지킨 정치적이며 지적인 여성으로 이들을 소개한다.

세 성녀에게는 공통점이 있는데 바로 자신의 독자적인 해석이 담긴 주장을 하면서도 그것이 자신의 말이 아니라 하느님이 주신 비전이라고 말한다는 점이다. 이 성녀들은 자신이 하는 말은 나의 말이 아니라 신이 나를 통해 하는 말이라고 공표함으로써 교회로부터 비난받지 않으면서도 자신의 발언권을 획득하는 데 성공한다.

두 번째로 이들은 모두 직설적인 언어로 표현하기보다는 미술, 음악, 나아가 자신의 몸을 이용해 간접적인 방식으로 주변을 설득한다. 가령 힐데가르트는 자신이 본 비전을 형상화한 많은 그림을 남겼는데 그중 <쉬비아스>에 수록된 ‘아담의 창조, 타락, 구원’이 특히 놀랍다. 전체적인 내용은 아담이 타락하고 예수에 의해 구원되었다는 점에서 전통적이지만 그 과정이 다르다. 먼저 아담이 악에 빠지는 과정에 이브가 등장하지 않는다. 아담이 악에 빠진 것 역시 이브가 건넨 선악과를 먹어서가 아니라 “하느님이 주신 꽃을 온전히 취하지 않아서 악에 약했다”고 덧붙인다.

곧, 아담이 율법의 지혜를 그의 지능으로만 알려고 하고 감각을 동원해 완전히 경험하는 축복을 완수하지 않았기에 스스로 두꺼운 어둠 속에 떨어졌다는 것이다. 힐데가르트는 남성 중심적인 교회 권력의 핵심이었던 이성의 힘이 아니라 온몸을 통한 감각적 경험이 세계를 온전히 이해하는 길이라고 믿었다.

오랜 금식으로 파리하고, 기운 없으며, 문맹이고, 신비화된 모습으로 주로 재현되는 시에나의 카타리나 역시 실제로는 다작의 명문장가였다. 저자는 카타리나의 글을 읽고 그가 “확신에 차 있고, 용감하며, 불 같은 열정을 지닌 뛰어난 설교가”였다고 묘사한다.

카타리나에 대한 왜곡과 신비화는 카타리나를 보호하는 역할을 했다. 글을 쓰는 여성, 정치 참여를 하는 여성은 거부감을 불러일으키는 존재였다. 카타리나는 성령이 가득하지만 “천성적으로 무지하고 약한 여자”로 묘사됨으로써, 또 극심한 고행과 금식을 감행함으로써 보수적인 교회에서 자신의 활동 영역을 지키고 카리스마를 획득했다. 카타리나는 자신에게 부여된 연약하고 작은 여성의 이미지를 무기 삼아 장군처럼 자기 목소리를 높인 여성이었다.

직접 쓰는 대신 (여성은 문맹이어야 하기 때문에) 남성 사제와 협력하여 자신에 대한 기록을 남기게 했다는 것 역시 이들의 공통점이다. 이외에도 성녀들이 자신의 비전을 ‘그리스도와의 신비한 결혼’으로 무척 에로틱하게 묘사했다는 것, 성과 속의 경계를 흐리는 엑스터시에 대한 다양한 해석 등 이 책은 놀라운 이야기로 가득하다.

저자는 감탄과 놀라움, 혼란스러움을 숨기지 않고(“나는 40여년간 종교미술을 연구하면서 이러한 내용, 이러한 그림은 정말로 처음 본다”), 그것이 이 책의 매력을 더해준다. 저자는 1000년 전 여성 신비가들이 남긴 기록을 직접 읽어내려가고, 그 과정에서 뜻밖에 교회가 오랫동안 성녀에게 씌워온 이미지를 벗겨낸다. 시공간을 초월해 이루어지는 살아있는 대화다.

조용히 출판된 이 책이 자신을 통제하고 억압하는 환경에서 벗어날 수도, 그렇다고 자신을 완전히 지울 수도 없는 상황에 처한 많은 사람들에게 닿기를 소망한다.

  • AD
  • AD
  • AD
닫기
닫기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