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몰리다: 정권마다 뒤집힌 입시정책
장기적 비전 제시 없이 이어진 경쟁 위주 교육
정책 변화에 발 빠르게 대응하는 사교육계
불공정 의구심에도 ‘점수 줄세우기’ 수능 확대 기조
영재학교 입시를 위한 사교육 의존 현상이 심화하는 가운데 한 학생이 지난 8월21일 서울 강남구 소재 영재교육 학원으로 등원하고 있다. 조태형 기자
지난해 한국의 사교육비 총액은 25조9538억원으로 추산됐다. 전년 대비 10.8% 늘어난 것으로 역대 최대 규모였다. 사교육비는 국내외 경제상황에 구애받지 않고 증가세를 유지해 왔다.
전문가들은 사교육이 변함없이 번창하는 주요 요인 중 하나는 정권이 바뀔 때마다 이리저리 휩쓸린 입시정책에 있다고 말한다. 교육과 입시에 대한 장기적 비전이나 사회적 합의가 견고하지 못한 상황에서 ‘정권의 차별성’을 부각하려 하거나 여론에 휩쓸려 정책이 너무 쉽게 바뀌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변화에 직면한 수험생과 학부모가 문을 두드리는 곳은 사교육이기 마련이다. 공교육과 달리 오직 입시에 특화된 사교육 업계는 정책 변화에 발 빠르게 대처해 신속하게 ‘상품’을 만들어 낸다. 전문가들은 특히 2010년대 이후 교육·입시 정책에 정치적 고려가 개입하는 경향이 심해졌다고 말한다.
지난해 학생 1인당 월평균 사교육비는 41만원으로 2007년 조사를 시작한 이래 최고를 기록했다. 전체 사교육비는 25조9538억원에 달했다. 전년도(2021년)보다 10.8% 늘었으며, 지난해 물가 상승률(5.1%)의 두 배에 이른다. 성덕환 기자
이명박 정부: 고교 다양화의 그늘
이명박 정부는 ‘자율과 경쟁’을 강조했다. 대입 입학사정관제 도입과 특목고·자사고 확대, 국가수준 학업성취도 전수평가(일제고사) 등이 시행됐다. 대입 선발전형 요소의 복합성을 줄여 3년(2010~2012년) 연속 학생 1인당 사교육비 감소를 이끌어 냈다는 평가를 받는다. 수능 출제를 EBS 강의와 연계시킨 것도 사교육 억제 대책의 일환이었다.
이명박 대통령 당선인이 2008년 2월10일 오전 서울 삼청동 인수위 회의실에서 차기 청와대 수석인선 결과를 발표하고 있다. 왼쪽부터 유우익 청와대실장, 김병국 외교안보수석, 김중수 경제수석, 박미석 사회정책수석, 이주호 교육과학문화수석, 박재완 정무수석, 이종찬 민정수석, 곽승준 국정기획수석, 이동관 대변인. 경향신문 자료사진
이명박 정부가 추진한 ‘고교다양화 300 정책’은 ‘우수 고교’를 많이 만들어 고교 간 경쟁을 촉발한다는 전략에서 출발했다. 자율형 사립고(자사고)가 6개에서 54개로 늘었고, 특성화고인 마이스터고, 기숙형 공립학교가 등장했다. 다양한 형태의 고교에 자율권을 부여해 경쟁을 촉진한다는 전략은 고교 서열화를 낳았다.
특목고(외고·과학고), 자사고, 일반고, 특성화고 순으로 서열화된 고교 체계는 고입 경쟁을 심화했다. 특목고나 자사고 진학, 영재원 입학을 준비하기 위한 사교육 시장이 커졌다. 신소영 사교육걱정없는세상 정책팀장은 “결과적으로 교육 격차가 심해졌고, 다양한 교육을 하는 게 아니라 입시에 매몰된 교육과정을 편성해 편법적으로 운영했다”고 말했다.
윤석열 대통령이 수능에서 퇴출시키라고 지시한 ‘킬러(초고난도) 문항’도 이 무렵 등장했다. 정부가 사교육비 경감을 위해 쉬운 수능 기조를 유지한다며 펼친 ‘만점자 1%’ 정책의 영향이었다. 사설 모의고사 집필자로 유명했던 이덕영씨는 “‘킬러 문제’ 이야기가 나온 게 2011년쯤이었다”면서 “만점자 1%를 만들기에 수월한 방법은 1%만이 풀 수 있는 문제 하나와 29개의 쉬운 문제를 내는 것”이라고 말했다.
박근혜 대통령이 2013년 3월4일 오전 청와대 춘추관에서 국회의 정부조직개편안 처리에 대한 대국민담화를 발표하고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박근혜 정부: 핵심 놓친 입시 간소화
박근혜 정부는 집권 첫해인 2013년 8월 대입전형 간소화 방안을 발표했다. 대학별로 전형방식을 수시 4개, 정시 2개로 줄이고 같은 명칭의 전형은 한 방식을 쓰도록 한다는 것이었다. 전형방식이 너무 복잡하고 다양해 수험생 부담과 혼란을 가중한다는 비판에 따른 조치였다. 하지만 수능을 비롯해 학생부, 논술, 적성고사, 구술형 면접, 특기자 등 여러 전형요소가 유지돼 실효성이 떨어진다는 비판을 받았다.
박근혜 정부는 대입 입학사정관제를 개편해 학생부종합전형(학종)을 도입하는 한편 선택형 수능 폐지, 영어·한국사 절대평가 전환 등을 시행했다. 이명박 정부가 준비해온 고교 내신 절대평가 전환 정책은 폐기됐다. 수능 영어 절대평가 전환은 사교육 의존을 이전보다 낮추는 효과를 가져왔지만, 입시 당국으로선 영어 대신 다른 과목의 변별력을 높여야 한다는 처지에 놓였다. 이덕영씨는 수능 영어 절대평가 전환 이후 영어 사설 모의고사 문제를 만드는 사람은 많이 줄었다면서도 “국어·수학·과학은 비슷한 점수를 받기 위해 갈수록 더 많은 문제를 풀어야 하는 식으로 입시가 변화하는 것 같다”고 했다. 박남기 광주교대 교수는 “당시 입학사정관제는 (대학의 선발기준 비공개 등으로) 정보 싸움이 돼 오히려 부모의 영향력을 더 키운 측면이 있다”고 했다.
박근혜 정부는 전임 정부가 추진한 ‘심야 학원교습 제한’에서 한발 더 나아가 ‘선행학습 금지법(공교육정상화법)’을 시행했다. 하지만 사교육 시장의 선행학습 자체를 정부가 금지할 권한이 없는 상황에서 공교육의 선행학습을 금지하는 것으론 별다른 효과를 보지 못했다.
문재인 대통령이 2019년 10월25일 오전 정부서울청사에서 열린 교육관계 장관회의에서 발언하고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문재인 정부: 공정이라는 덫
문재인 정부도 취임 이듬해인 2018년 8월 대입제도 개편 및 고교교육 혁신안을 발표했다. 상대평가 위주의 수능 평가 방식을 유지하고 정시 전형 정원 비율을 30% 이상으로 확대하는 게 주요 내용이었다. 수능 절대평가 전환 공약을 뒤집은 것이다. 2022년 고1부터 전면 도입할 예정이었던 고교학점제는 2025년 시행으로 늦춰졌다. 문재인 정부는 외고·국제고·자사고의 단계적 일반고 전환 공약도 2025학년도 일괄 전환으로 연기함으로써 다음 정부로 공을 넘겼다.
문재인 정부 입시 정책을 크게 흔들었던 것은 예기치 않게 터진 ‘조국 사태’였다. 청와대 민정수석을 지낸 조국 교수가 2019년 8월 법무부 장관으로 지명된 직후 자녀 입시 비리 의혹이 불거졌다. 정부는 그해 11월 돌연 서울 16개 대학 정시 비율을 40%로 확대한다고 했다. 학교생활기록부 비교과 영역 축소, 사회통합전형 법제화 등 ‘대입제도 공정성 강화 방안’도 발표했다. 학종 등 수시가 불공정하다는 비판 여론이 들끓자 내놓은 조치였다. 갑작스러운 정시 대폭 확대는 교육과 입시 현장에 혼란을 초래했다. 수능 위주의 정시 확대는 최근 들어 재수·삼수생이 크게 증가한 원인으로도 지목된다.
문재인 정부 당시 대입제도 개편 공론화 과정 위원으로 참여한 숭의여고 김진훈 교사(좋은교사운동 정책위원)는 “내부에서는 대학이 학종으로 자율적으로 학생을 선발하는 안이 다수의 지지를 받았지만, 공론화를 거치며 기계적·형식적 공정성만을 내세우는 정시 비중을 40%로 확대하는 안으로 뒤집어졌다”고 했다. 김 교사는 “학종은 대학이 점수가 아니라 학생들의 학교생활 전반을 검토해 선발하는 주된 방식이었고, 학생들이 학교생활에 충실히 임하면서 진로에 맞춰 입시를 준비할 수 있는 구도로 안착해 가고 있었다”며 “(정부 발표) 이후로 오로지 ‘수능을 준비해야 한다’는 물결이 거세게 일었다”고 했다.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7월6일 오후 서울 서초구 플로팅아일랜드 컨벤션홀에서 열린 ‘청년정책 점검회의’에 참석해 모두발언을 하고 있다. 대통령실 제공
윤석열 정부: 공허한 ‘사교육 카르텔’ 척결
윤석열 정부는 사교육을 ‘공공의 적’으로 지목하고 칼날을 뽑아 들었다. 윤 대통령이 지난 6월 ‘사교육 카르텔’ 척결을 천명한 직후 교육부뿐 아니라 공정거래위원회, 국세청, 경찰 등 정부 기관들이 전방위적으로 나섰다. 교육부는 ‘사교육 경감 대책’을 발표하면서 ‘사교육 적극 대응으로 공교육 신뢰 회복’을 추진 방향으로 꼽았다. 사교육을 억누르면 공교육을 살릴 수 있다는 발상으로 보인다.
그러나 고교 서열화와 경쟁을 부추겨 사교육 수요를 자극하는 요인으로 지목되는 상대평가 방식의 내신과 수능 체제는 고수하고 있다. 이처럼 입시 정책과 별개로 접근해서는 사교육 대책이 성공하기 어렵다는 지적이 나온다. 대입 정시 확대 기조는 윤석열 정부에서도 이어지고 있다. 수능이 수험생에게 동등한 기회를 제공하는 공정한 방식이라는 여론이 사회적으로 강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수능이 공정하다는 담론은 허구라는 비판도 만만치 않다.
서울대 입학관리본부 연구교수를 지낸 김경범 서울대 교수(서어서문학과)는 “어떤 전형이든 모두가 만족하는, 기회·과정·결과의 공정성을 보장하는 전형은 없지만 수능으로 뽑으면 강남 학생들이 많이 들어오는 게 사실”이라며 “수능이 어떤 사회적 불평등을 만들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평가원 자료 등 수치를 공개한 정부는 진보·보수를 막론하고 없었다”고 지적했다. 김성천 한국교원대 교수는 “수능 성적이 개인의 인생을 좌우하는 함정에 빠져 있는 사람들이 워낙 많다 보니 쳇바퀴 돌듯 사교육이 과열되는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했다.
최근 10년간 정부별 주요 입시·교육 정책 변화. 신소영 사교육걱정없는세상 정책팀장은 “중앙정부가 지자체에 재정을 지원해 자율권을 주는 방식으로는 안정성이 떨어지고 수도권 대학과 지방대학의 격차가 심해질 것”이라며 “대통령이 대학 서열화 문제를 해소하기 위한 정책적 드라이브를 걸어야 한다”고 했다. 사진 | 조태형 기자, 그래픽 | 성덕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