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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아영의 레인보] 도망치는 여성 정치인은 그만 보고 싶다

입력 2023.10.11 20:50

뉴질랜드 국회의사당 주변에는 ‘케이트 셰퍼드 신호등’이 있다. 여성 참정권 운동을 이끈 케이트 셰퍼드를 기리는 신호등이다. 뉴질랜드 최초 여성 신문사인 ‘화이트 리본’에서 일했던 셰퍼드는 교회여성절제회를 설립한 후 처음 의회에 청원을 넣는다. 여성들을 술집 종업원으로 고용하지 말고, 청소년에게 술을 판매하지 말라는 청원이었다. 의회는 단체 의견을 묵살했다. 셰퍼드는 이때 정치 참여의 중요성을 깨닫고 본격적으로 참정권 운동을 시작한다. 1888년 처음 5000명분의 서명을 제출했지만 의회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는 포기하지 않고 1만여명, 2만여명 서명을 이어갔다. 뉴질랜드 성인 여성 인구 4분의 1에 해당하는 숫자, 3만2000여명의 서명을 모은 1893년이 되어서야 의회는 드디어 여성 참정권 법안을 통과시킨다. 세계 최초다.

투표권을 위해 싸우다 목숨을 잃은 여성도 있었다. 영국에선 ‘서프러제트’라는 운동가들이 서명하거나 청원하는 방식을 넘어 단식 투쟁, 우체통에 불 지르기와 같은 활동을 펼쳤다. 운동의 성과가 쉬이 나타나지 않아서였을까. 에밀리 데이비슨은 1913년 영국 최고 더비 경마대회에서 국왕 조지 5세 경주마를 기다리다 “포기하지 말고 계속 싸우세요”라는 말을 남기고 말발굽에 뛰어들었다. 데이비슨의 장례식 행렬은 거대한 시위 행렬이 됐다. 영국 여성들은 1928년이 되어서야 참정권을 얻는다.

18세기만 해도 ‘남성의 소유물’로 여겨지던 여성들은 ‘종속’되지 않기 위해 정치 권력을 획득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천부인권을 주장했던 장 자크 루소에게 인간은 곧 남성이었고, 그는 “여자들은 정치적인 삶에 적합하지 않으므로 남성에 종속되어야 한다”고 했다. 역설적으로 이 말은 누군가에게 ‘종속’되지 않기 위해 ‘정치’가 얼마나 중요한지 보여준다. 250여년간 여성들은 투표권을 쟁취하고, 정당에 가입하고, 직접 입후보하며 정치 참여를 확대해왔다.

최근 ‘김행랑 사태’를 보면서, 담담해지고 싶어 오래전 여성의 정치 참여 역사를 들춰봤다. 성평등을 지향해야 하는 부처의 장관 후보자가 인사청문회에서 처음으로 ‘줄행랑’을 치는 모습을 지켜봐야 했기 때문이다. 후보자는 주식 파킹, 주가조작, 배임 의혹 등에 관해 자료 제출도 하지 않고 자신의 말이 맞다고 고집하다 관련 자료가 나오면 “착각했다”고 말을 바꿨다. 인사청문회는 ‘줄행랑’으로 끝이 났다. 앞서 ‘줄행랑’을 친 여성 정치인은 또 있다. 새만금 세계스카우트잼버리 파행 문제를 짚기 위해 국회 여성가족위원회 전체회의가 열렸던 지난 8월25일 김현숙 여성가족부 장관은 회의장에 나타나지 않았다. 장관의 행방에 대해 대답하지 못한 여가부 대변인은 화장실로 피신(?)했고 여가위 위원들은 화장실까지 쫓아가야 했다. 회의는 제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여가부를 없애라는 정권의 하명을 받아들고 장관직에 나서더니, 정작 먼저 ‘드라마틱하게 엑싯(exit)’하는 모습, 한숨이 나온다. 앞세대 여성들의 노력과 희생으로 어렵게 얻은 정치 권력의 수혜자들이 성평등 정치, 소수자를 대의하는 정치를 망치는 정치인이 되겠다며 역사의 방향을 뒤로 돌리고 있다. 여성은 비이성적인 존재라 정치에 참여할 수 없다고 했던 18세기 남성의 말보다 여성혐오를 동력으로 돈을 벌고선 언론의 관행이라 변명하는 21세기 여성 정치인의 말이 더욱 그로테스크하다.

최근 인도에서는 하원 의석 3분의 1을 여성에 할당하는 개헌안을 통과시켰다. 1996년부터 여성 의석을 확대하기 위한 개헌 시도가 6차례나 있었지만 보수파의 반대로 매번 실패한 끝에 얻은 성과다. 인도 여성들은 투표율로 정치적 의지를 보여줬다. 인도 여성의 총선 투표율은 2004년 53%에서 2019년 67%로 높아지며 남성 투표율을 앞질렀다. 한국도 2012년 대선 때 처음 여성 투표율이 남성 투표율보다 높아졌다. 1949년 최초로 여성 국회의원을 선출한 한국은 2020년 21대 총선에서 57명(19.1%)을 만들었다. 71년이 걸린 성과다. 그러나 갈 길이 너무 멀다. 현재 윤석열 정부의 여성 장관 ‘3명’, 광역단체장 중 여성 ‘0명’은 처참한 숫자다. 투표를 통해 정치 참여를 하겠다는 여성들의 열망을, 여성 의제를 대의해줄 정치인을 늘리고자 하는 열망을 이해하는 여성 정치인이 필요하다.

뉴질랜드 의회 근처 신호등에 비치는 셰퍼드는 모자를 쓰고 걷고 있다. 당당하게 한 걸음씩 걷는 여성 정치인들을 보고 싶다. 선거의 주목도에 비해 조명을 받지 못했지만 강서구청장 보궐선거에 나선 기호 3, 4, 5번의 여성 후보들에게 박수를 보낸다.

임아영 젠더 데스크 겸 플랫팀장

임아영 젠더 데스크 겸 플랫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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