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륙의 역사와 진보의 조건

나원준 경북대 교수·경제학

세계경제의 성장 역사에서 본격적인 이륙은 1820년대에 이루어졌다. 증기기관이 상업화되고도 한 세기가 지난 뒤였다. 그러나 번영은 서유럽 일부 지역에 국한됐다. 국가 간 소득 격차가 벌어지기 시작한 것도 그즈음부터였다. 당시 가장 부유했던 지역은 이후에도 평균 성장률이 가장 높은 축에 들었다. 이륙의 시동을 먼저 건 나라들은 1870년대부터 출산율 하락을 먼저 경험했다. 기술 변화로 자녀 교육비가 늘어난 탓인지 몰라도, 생산량과 비슷한 궤적을 그리던 인구 증가세도 함께 둔화했다. 인구가 정체되면서 인류는 역설적으로 ‘맬서스의 덫(인구 증가로 가난을 면치 못하는 현상)’을 벗어날 수 있었다.

경제성장에서 이륙의 역사는 경제학자 조지프 슘페터가 제시한 혁신의 경제학에 비춰 파악할 수도 있을 법하다. 혁신 경제학의 중심 생각은 첫째, 성장은 지식의 축적과 혁신의 누적에 의해 가능하다는 것, 둘째, 혁신은 재산권 보호를 필요로 한다는 것, 셋째, ‘창조적 파괴’의 과정인 혁신은 기득권 세력의 방해에 직면하므로 공정한 경쟁이 보장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중 첫 번째 생각은 산업혁명의 설명에 유용하다. 산업혁명을 계기로 기술 변화가 과학 원리에 대한 이해로부터 출발하는 것으로 성격이 변모했기 때문이다.

혁신 경제학의 두 번째 생각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경제학자 필리프 아기옹과 같은 내생적 성장론자들은 영국이 앞설 수 있었던 원인을 일찍부터 발달한 특허 제도에서 찾았다. 의회 권력이 강해지면서 재산권 보호가 강화된 사실도 강조했다. 그러나 재산권 보호는 프랑스가 영국보다 더 강했다. 영국은 의회가 재산권 제한에 적극적이어서 프랑스보다 토지 수용이 수월했고 세금도 1인당 두 배를 걷었다. 그렇다면 재산권을 민주적으로 제한하고 기술 독점의 시간적 유한성을 제도적으로 공식화한 것이 어쩌면 성장의 이륙을 자극한 원인이었을지 모를 일이다.

한편 경제학자 대런 아세모글루는 이륙의 역사와 관련해 혁신 경제학의 세 번째 생각을 강조했다. 사회 변화는 생산을 조직하는 기존 방식과 과거의 사회적 위계에 도전하면서 혁신을 이끌 주체 없이는 불가능하다. 그런데 영국은 청교도혁명과 명예혁명을 거치면서 중세적 가치를 일찍 내던지고 누구나 부자만 되면 인정받는 자본주의 사회로 가장 먼저 변해 있었다. 당시 유럽에서 계층 이동의 사다리가 존재한 유일한 나라가 영국이었다. 그렇게 영국이 새로운 중간 계층 사람들, 즉 ‘개천에서 난 용들’의 나라였기에 산업혁명의 발원지가 될 수 있었다는 주장이다.

다만, 그 개천 용들이 딛고 선 계층 사다리는 밑바닥 노동자계급의 처참한 삶을 전제한 것이었다. 윤석열 정부의 주 69시간에야 못 미치지만, 19세기 중반 영국 노동자들은 주 65시간 넘는 장시간 노동에 신음했다. 최악의 공중 보건 여건과 가혹한 공정도 견뎌냈다. 그래도 미숙련 노동자들의 생활수준은 중세 농노와 별 차이가 없었다. 부자들은 세금 덜 내려고 노동자들을 더욱 비참한 처지로 내몰았다. 보수 정치인들은 미약한 지원과 광범위한 사각지대로 악명 높았던 구빈법을 개악해 혜택을 더 줄이고 문턱을 더 높여야 한다고 목소리 높였다. 노동자계급이 의회에서 정치적으로 대표되지 못하는 와중에 벌어진 일들이었다.

미숙련 노동자들의 처지는 열악했지만 영국은 유럽에서 평균 임금이 가장 높은 나라였다. 에너지 가격이나 기계 대여 비용과 비교하면 영국 탄광 지대에서 노동력의 상대 가격은 확실히 비쌌다. 노동력이 비싼 만큼 기계화를 진전시키고 노동생산성을 높이는 방향으로 기술이 진화했으며, 그것도 영국에서 성장의 이륙이 일어난 원인이 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케인스 경제학의 용어로는 당시 영국 경제의 공급 측면이 ‘임금 주도적’이었던 셈이다. 임금 상승이 노동생산성을 끌어올리는 선순환 구조가 존재했다는 뜻이다.

세계경제의 이륙 역사는 오늘 한국경제와도 무관하지 않다. 노동자계급이 제도권 정치에서 대표되지 못하는 가운데 극우 세력이 부자 감세와 복지 축소 공세에 열을 올리는 닮은 현실이 절망적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과연 이 반동의 땅에서도 노동의 정치가 대항력을 확보해갈 수 있을까. 비록 제한된 진보였지만 계층 이동성이 과거 영국에서 진보의 조건이 된 점은 의미심장하다. 그것은 경제성장에 기여하는 기회에 더 많은 사람이 참여해야 한다는 국제기구들의 포용적 성장 담론과 맥이 닿는 경험이었다. 실증 분석에 따르면 한국도 공급 측면이 임금 주도적이다. 그렇다면 앞으로 한국경제는 어떤 성장의 역사를 써갈 수 있을까.

나원준 경북대 교수·경제학

나원준 경북대 교수·경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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