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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서갱유의 카르텔

2000년대 초반 일이다. 개성공단으로 남북 협력의 분위기가 무르익자 모 방송국에서 개성을 직접 방문해 그 역사를 조명하는 다큐멘터리를 기획했다. 마침 내가 속한 연구 모임이 고려 개경을 연구하고 있었기에, 방송국에 여러 자문과 함께 북한 측 연구자 ㅈ씨를 만나서 연구 이야기를 들으라고 조언했다. ㅈ씨는 해방 후 개경 성곽 전체를 직접 조사하여 논문을 발표한 유일한 분이었다.

촬영을 마치고 온 방송국팀이 전한 북한의 환경은 열악했다. 수시로 정전이 되는 바람에 촬영이 자주 중단됐다는 것이다. 그래도 우리가 추천한 ㅈ씨는 자신의 박사논문 원고를 보자기에 싸 갖고 올 정도로 촬영을 적극 도왔다고 했다. 그 얘기에 모두 귀가 번쩍 뜨였으나, 그 논문을 구해볼 순 없었다. 보자기 원고가 유일본이었기 때문이다. “복사라도 해서 갖고 오시죠?” 한마디 했다가 나는 바로 깨달았다. 카메라 전기도 끊기는 마당에 어디서 복사를 해오나. 인문학 분야도 21세기의 연구는 종이, 펜만이 아니라, 전기나 복사기 같은 현대 문명이 있어야 한다는 걸 실감했다.

얼마 전 충격적인 뉴스를 보았다. 한국과학기술정보연구원(KISTI)이 슈퍼컴퓨터 전기세를 낼 돈이 없어 일부 장비 가동을 멈췄다는 것이다. 개발도상국 시절에 나고 자란 터라 ‘슈퍼컴퓨터 살 돈이 없다’든가, ‘컴퓨터는 있는데 운용할 인력이 없다’는 등의 이야기는 아주 익숙했다. 그런데 컴퓨터 돌릴 전기세를 못 낸다니! 나중에 그게 데이터 관련 장비였고 곧 정상화했다는 해명이 나오긴 했으나,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세계 경제규모 10위권인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전기세 때문에 장비를 제대로 굴리지 못할 위기가 있었다는 게 아닌가!

이뿐이 아니다. 정부는 학계의 카르텔을 분쇄해야 한다며, 각종 지원예산을 줄이고 조정하겠다고 했다. 과학 연구·개발(R&D) 지원 축소로 시끄럽지만, 인문사회 분야 역시 대폭 지원예산이 줄었다. 카르텔은 마약 조직에나 붙이는 말인 줄 알았는데, 학계에서 마약이라도 만들어 판다는 말인가! 전쟁으로 피란 간 와중에도 학교의 불이 꺼진 적 없고 종이를 빌려 학술지를 찍어냈으며, IMF 때도 이런 분야 예산은 줄인 적 없는, 공부열의 국가 “K국” 시민으로서 어안이 벙벙하다. 이런 예산이 줄면, 장비를 제대로 돌릴 수 없고, 연구 수행의 핵심인력인 계약직 젊은 연구자부터 줄이게 된다. 21세기 분서갱유는 굳이 책을 불사르고 학자를 파묻는 수고를 하지 않아도 된다. 그저 돈줄만 조이면, 장비를 굴리지 못하고 자료에 접근을 못한다. 산나물을 캐먹으며 연구할 수도 없는 현대인은 그저 하던 연구를 관두고 딴 길을 찾을 수밖에 없다.

간접적인 분서갱유만 있는 게 아니다. 안 그래도 허덕허덕하는 출판 관련 지원금도 대폭 줄었다. 더 늘려도 부족할 도서관을 독서실로 만들지 않나, 작은 도서관 예산 같은 자잘한 돈까지 삭감했다. 멀쩡한 민방위복을 교체하는 예산도 600억원이라는데, 이건 뭐 어쩌자는 정부인지 도통 이해가 되지 않는다.

정부가 이렇게 나오니 민간의 분위기도 심상치 않다. 학문의 전당이라는 대학에서조차 학생들이 좋아하는 북카페를 만들어야 한다며 대거 책을 처분해버린다. 개중에 귀한 고서도 있건만, 이런 건 서울의 큰 도서관에서나 소장하면 되는 것 아니냐고 한다. 세계 멸망의 날에 유일하게 남을 도서관이 서울의 그 도서관일지, 시골의 작은 도서관일지 어떻게 알고 하는 얘기인지. 거기에 어떤 이들은 일부 책들을 금서로 지정해야 한다고 조직적으로 민원을 넣는다고 한다.

21세기에 금서와 검열이라는 단어를 다시 듣게 될 줄은 몰랐다. 정부가 앞장선 분서갱유 덕분에 마약보다 무서운 무지의 카르텔이 조성되고 있다. 분서갱유의 카르텔이다.

장지연 대전대 혜화리버럴아츠칼리지 역사문화학전공 교수

장지연 대전대 혜화리버럴아츠칼리지 역사문화학전공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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