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라는 낭만에 가려진 착취···작가들, ‘노조’를 선언하다

조해람 기자

‘작가도 노동자다’…노조 설립 나선 작가들

은유 작가, 안명희 출판노조協 의장 인터뷰

지난 1일 서울 중구 경향신문사에서 ‘작가노조’를 준비하는 작가노조준비위원회 소속 은유 작가(왼쪽)와 안명희 출판노조협의회 의장(전국언론노조 서울경기지역출판지부장)이 인터뷰하고 있다. 이준헌 기자

지난 1일 서울 중구 경향신문사에서 ‘작가노조’를 준비하는 작가노조준비위원회 소속 은유 작가(왼쪽)와 안명희 출판노조협의회 의장(전국언론노조 서울경기지역출판지부장)이 인터뷰하고 있다. 이준헌 기자

“좋아서 한다는 이유로 터무니없이 낮은 보수를 받거나 아무렇게나 부당한 처우를 참아야 하는 건 아니잖아요. 그건 별개죠. 책은 하늘에서 떨어지는 게 아니라 작가와 출판노동자의 피땀입니다.”

책은 낭만과 정의를 말하지만, 그 책을 만드는 과정도 낭만적이고 정의로울까. 20년째 르포·논픽션을 쓰고 있는 은유 작가는 고개를 가로젓는다.

<글쓰기의 최전선> <있지만 없는 아이들> 등 책을 내며 나름 유명 작가가 됐지만, 청탁 원고료는 여전히 글쓰기를 시작한 20년 전에 머물러 있다. 많은 작가는 헐값의 일감이라도 잃을 수 없어 부당한 조건을 수락한다. 대신 작가들은 생계를 위해 아르바이트를 구하고 자격증을 딴다. “글 쓰는 노동자의 눈으로 업계를 살펴보면 아예 작가는 목소리를 내기가 어려운 구조예요. 인세, 고료, 강연료까지 ‘관행’이라는 이름으로 고착돼있는 걸 따를 수밖에 없어요.”

“글을 쓴다고 하면 반드시 덕목처럼 이야기되는 게 돈을 얘기하면 안 된다는 거예요. (문제를 제기하면) 왜 돈을 이야기하냐면서 문제를 가리는 거죠.” 20년 차 편집자인 안명희 출판노조협의회 의장(전국언론노조 서울경기지역출판지부장)도 같은 생각이다. 문단의 위계가 작가들의 문제 제기를 구조적으로 봉쇄한다고 본다. 비정규노동운동가이기도 한 안 의장의 눈에는, 박봉·과로로 “40살 이상까지 일하기가 쉽지 않다”는 편집자들과 ‘헐값 원고료’에 속을 앓는 작가들은 서로 닮았다.

섬처럼 서로 떨어져 있던 작가들이 창작에 대한 정당한 보상을 요구하며 뭉쳤다. 협회도 동인도 아닌 ‘노조’다. 은유 작가와 안 의장을 비롯해 시, 소설, SF, 르포, 에세이, 칼럼, 평론, 어린이, 번역, 사회과학, 웹소설 작가들은 ‘작가노조준비위원회’를 꾸리고 지난 9월14일 첫 집담회를 열었다. 작가들이 노조를 꾸리고 나선 건 처음이다.

지난 9월14일 서울 중구 대리운전노조 사무실에서 ‘작가노조준비위원회’ 소속 작가들이 첫 집담회를 열고 있다. 작가노조준비위원회 제공

지난 9월14일 서울 중구 대리운전노조 사무실에서 ‘작가노조준비위원회’ 소속 작가들이 첫 집담회를 열고 있다. 작가노조준비위원회 제공

이제 첫발이다. “캄캄한 절벽 같은 곳에서 깃발 하나 올라온 게 큰 의미(은유 작가)”라면서도, “한쪽으로는 기대가 생기지만 다른 한쪽으로는 마음이 무겁다(안 의장)”라고 말한다. 이 작은 첫걸음이 어떤 길을 낼까. 은유 작가와 안 의장을 지난 1일 서울 중구 경향신문사에서 만났다.

20년 전 원고료를 지금도…‘글쓰기의 최저선’이 없다

작가노조의 ‘싹’은 이미 여러 이들의 마음에 움터 있었다. 안 의장에게는 <검정 고무신>의 이우영 작가가 제작사와 저작권 분쟁 중 극단적 선택을 한 일이 큰 계기였다. 그전에도 출판노조를 세우고 문화·예술 노동운동을 해 왔지만, 다른 예술노동자들에 비해 작가들은 유독 뭉치지 못한다는 점이 안타까웠던 터다.

“백희나 작가의 <구름빵> 사건이나 이상문학상 불공정 계약 논란, ‘고은 시인 미투’ 사건 등 너무 문제가 많았는데 마치 가십처럼 흩날리다가, 결국 작가의 죽음을 부르는 거죠. 이제는 정말 작가들의 집단화된 목소리가 필요하다고 생각하게 됐어요.”

지난 5월15일 경기 파주시 문발동 형설출판사 앞에서 열린 ‘검정 고무신’ 장례 집회에서 고(故) 이우영 작가의 동생 이우진 작가가 발언 중 눈물을 흘리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 5월15일 경기 파주시 문발동 형설출판사 앞에서 열린 ‘검정 고무신’ 장례 집회에서 고(故) 이우영 작가의 동생 이우진 작가가 발언 중 눈물을 흘리고 있다. 연합뉴스

은유 작가는 ‘글 시장’의 부조리를 직접 겪고 목격했다. 처음엔 대기업이나 정부기관의 사보·기관지에 글을 쓰는 프리랜서 ‘문필 하청업자’로 시작했다. 하청업체에 원고료를 떼인 적도 있다.

“프리랜서 작가는 소모품처럼 쓰다 버려지는 구조라는 게 눈에 들어왔어요. (글을) 쓰려는 사람이 많다 보니 경력이 쌓인다고 존중하는 게 아니라 더 부리기 쉽고, 웬만큼 글 쓸 줄 알고, 권리를 주장하지 않는 사람에게 일을 주는 거죠.” 부당한 일을 직접 겪고 목격했는데도 프리랜서 작가들의 노조를 만들지 못한 게 한이었다고 했다.

단행본을 내는 출간작가가 됐지만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부당한 대우를 당하는 동료들의 현실을 자주 목격했다. 최근 한 대형 출판사는 은유 작가에게 20년 전과 똑같은 원고료를 제시하기도 했다. “그런 원고료로는 글을 쓰지 않겠다고 담당자에게 말했어요. 제가 올해부터는 작정하고 임금 협상을 하고 있지만, 한 번의 기회를 놓칠 수 없는 작가들이 많은 게 현실이에요. 그러니까 출판사에서 알아서 올려주지는 않죠.”

지난 1일 서울 중구 경향신문사에서 ‘작가노조’를 준비하는 작가노조준비위원회 소속 은유 작가가 인터뷰하고 있다. 이준헌 기자

지난 1일 서울 중구 경향신문사에서 ‘작가노조’를 준비하는 작가노조준비위원회 소속 은유 작가가 인터뷰하고 있다. 이준헌 기자

작가들은 다른 수입원을 찾는다. 은유 작가도 “4번째 책 낼 때까지는 아르바이트를 계속했다”며 “쓰고 싶은 글을 쓰기 위해 쓰고 싶지 않은 글도 많이 썼다”고 했다. 강연이나 글쓰기 강의를 할 수 있는 작가도 극소수다. 덤프트럭 운전 면허증을 준비하는 작가도 있었다. ‘최저선 없는 시장’에서 ‘나 홀로 임금투쟁’을 하던 은유 작가는 작가노조를 고민 중이라는 안 의장의 말에 “깃발 들겠다”며 선뜻 합류했다.

관행과 위계…“찍힐까 봐” 권리 주장 어려워

왜 이런 구조가 유지되고 있을까. 안 의장은 출판계의 ‘위계’가 개선을 가로막고 있다고 본다. ‘성공한 작가’로서 좁은 시스템 안에 들어가지 못하면 생존이 어렵고, 이 같은 구조에서는 작가들도 문제를 제기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안 의장은 “위계 안에 포함되지 않으면 작가로서의 미래가 없고 작가로 불리지도 않는다”며 “그래서 우리가 작가들에게 원고료를 적게 주는 게 당연하게 받아들여지고 있다”고 했다.

작가 개개인이 ‘선택된 소수’가 돼야 생계의 최저선을 지킬 수 있는 구조다. “작가라는 집단이 ‘능력주의’가 가장 잘 작동하는 곳 아닌가 싶어요. 결국 ‘네가 글을 더 잘 쓰거나 잘 팔리는 글을 써라’ ‘네 노력과 운으로 최저선을 만들라’ ‘알아서 생존하라’는 거죠.” 은유 작가의 말이다.

지난 1일 서울 중구 경향신문사에서 ‘작가노조’를 준비하는 작가노조준비위원회 소속 은유 작가(왼쪽)와 안명희 출판노조협의회 의장(전국언론노조 서울경기지역출판지부장)이 인터뷰하고 있다. 이준헌 기자

지난 1일 서울 중구 경향신문사에서 ‘작가노조’를 준비하는 작가노조준비위원회 소속 은유 작가(왼쪽)와 안명희 출판노조협의회 의장(전국언론노조 서울경기지역출판지부장)이 인터뷰하고 있다. 이준헌 기자

적정 원고료 같은 권리 주장도 ‘관행’의 벽에 가로막힌다. 안 의장은 “글을 쓴다고 했을 때 덕목처럼 얘기되는 게, 돈을 얘기하면 안 된다는 것”이라며 “자본과 노동이 만났을 때는 질서가 생겨야 하는데, 그런 질서를 세우기도 전에 ‘작가가 왜 돈을 이야기하느냐’면서 입을 막고 문제를 가린다”고 했다.

문화체육관광부의 ‘2021년 기준 콘텐츠산업조사’를 보면, 출판업은 국내 콘텐츠산업 중 사업체·종사자 규모와 매출액이 가장 크다. 안 의장은 매출에 비해 창작·제작 노동이 받는 대가가 지나치게 적다고 했다. “예전까지는 최소한 ‘진보’라는 껍데기가 필요했죠. 사람들이 책에 기대하는 게 있잖아요. 세상으로 나아가고 부조리에 저항하고. 다 옛날이야기예요. 이윤을 만들기 위해 작가를 착취하거나 2차 저작권을 (회사가) 가져오게 돼요.”

“출판된 책 보며 안타까워하지 않는 날 오길”

작가노조준비위원회의 목표 중 하나도 ‘정당한 보상’이다. 은유 작가는 “이제 막 첫 글을 쓰는 작가라도 최저 원고료를 보장받고, 최저 인세와 최저 강연료 등 최저선을 만들고 싶다”고 했다. “글 쓰는 사람들이 어서 무명의 설움을 씻고 스타작가가 돼서 부와 명예를 누리겠다는 꿈을 갖기보다, ‘노동자 작가’가 돼서 노동자의 권리와 정체성을 지키면서 글을 쓸 수 있는 건강한 토대를 만드는 데 힘을 모으면 좋겠어요. 그래서 주변에 ‘물 들어올 때 노 저어야 한다’가 아니라 ‘물 들어올 때 노조해야 한다’고 말해요.” 은유 작가의 말이다.

지난 1일 서울 중구 경향신문사에서 ‘작가노조’를 준비하는 작가노조준비위원회 소속 은유 작가(왼쪽)와 안명희 출판노조협의회 의장(전국언론노조 서울경기지역출판지부장)이 인터뷰하고 있다. 이준헌 기자

지난 1일 서울 중구 경향신문사에서 ‘작가노조’를 준비하는 작가노조준비위원회 소속 은유 작가(왼쪽)와 안명희 출판노조협의회 의장(전국언론노조 서울경기지역출판지부장)이 인터뷰하고 있다. 이준헌 기자

고정적 근로계약 없이 개별화된 작가들을 어떻게 ‘노동자’로 엮어낼지는 숙제다. 특수고용·플랫폼·프리랜서 노조, 미국의 작가 노조인 미국작가조합의 ‘할리우드 파업’ 등 사례를 살펴보고 있다. 출판 사용자단체인 대한출판문화협회와 산별교섭을 추진 중인 출판노조협의회의 성과도 중요하다. “가장 첫 단추는 노조필증을 받아야 하는데, (노동자·사용자 정의를 넓히도록) 노동조합법이 바뀌어야 해요. 무엇보다 법을 넘어 자유로운 상상을 계속해야겠죠.” 안 의장이 말했다.

※할리우드 파업이란?

미국의 영화·TV·라디오 등 각본가들이 속한 노조인 ‘미국작가조합(WGA)’이 지난 5월2일부터 9월27일까지 벌인 파업. 1만1100명이 넘는 작가들이 참가했다. 원고료 등 보수 인상과 처우 개선, 인공지능(AI) 사용과 관련된 일자리 보장 등을 요구했다. 약 5개월의 파업 결과 WGA는 최저 원고료 인상, 스트리밍 규모·시간에 따른 적정 보상, AI 각본 집필 규제 등을 얻어냈다.


편집자 등 출판노동자들과의 연대에도 적극 나설 예정이다. 작가들처럼 출판노동자들도 처우가 좋지 않다. 근로기준법상 핵심 조항 대부분이 적용되지 않는 ‘5인 미만’ 출판사들이 많고, 아예 프리랜서로 출판사의 외주를 받아 일하는 인력도 상당수다. 5인 이상 회사에 재직하는 노동자들도 과로·저임금에 시달린다. 출판노조협의회가 지난 5월 발표한 ‘2023년 출판노동 요구안 설문’을 보면 재직노동자들은 ‘연장노동 제대로 보상받기’(74.3%)를, 외주노동자들은 ‘적정한 작업 단가’(95.1%)를 요구했다.

안 의장은 “포괄임금제가 보편화한 데다 직장 내 괴롭힘 문제도 점점 교묘해지고 있다”고 했다. 은유 작가는 “궁극적으로는 (출판노동자들과) 만나게 될 것”이라며 “함께 책을 만드는 동료들이다. 작가와 편집자는 분리될 수 없다. 노동자 권리는 같이 가야 한다”고 했다.

작가노조준비위원회는 우선 더 많은 작가·노동자들이 모여 서로의 경험을 나누길 바란다. “서로에게 용기가 되고 있어요. 모이면 힘이 되고 부당함이 폭로되고, 구조의 문제가 드러나죠. 상위 0.1%의 유명 작가가 아니라, 생활인이자 노동자로서 작가의 건강한 상을 함께 만들었으면 해요.” 은유 작가가 말했다.

“내가 어떤 책을 보면서 이 책을 쓴 작가와 책을 만든 편집자가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를 떠올리지 않게 됐으면 해요. 출판노조와 작가노조가 잘 되고 업계가 건강해져야 20년 전 부푼 꿈을 안고 책을 만들겠다고 했던 과거의 나를 지킬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안 의장이 말했다. 작가노조준비위원회에는 8일까지 46명이 참여했다. 앞으로 차근차근 간담회·집담회 등을 열어갈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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