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 위기의 실체

[김윤철의 알고 싶은 정치] 민주주의 위기의 실체

현재 민주주의의 위기는
특정 세력 집권이 아니라
힘의 관계 불균형이
시정되지 못하는 데에서
찾아져야 한다

민주주의 위기 극복은
민주 vs 독재 구도
조성을 주도하는
기성 정치세력들 간
선거 게임으로
이루어질 일이 아니다

그 구도가 실제 약자의
주권을 증진하기 위한
내용들로 채워지고
전 사회 걸쳐 만들어질 때
그리고 일련의 결과들이
축적될 때 가능할 일이다

민주주의, 한국에서 정치를 논할 때 정치인과 학자를 위시로 한 정치관계자들이 가장 흔하게 입에 올리는 용어다. 대체로 민주주의가 잘되고 있다는 것보다는 잘 안되고 있다는 차원에서 사용된다. 이때 꼭 ‘위기’라는 말이 함께 쓰인다. 즉, ‘민주주의의 위기’라고 일컬어진다. 현 윤석열 정권의 지지기반인 보수세력의 경우, 그냥 민주주의의 위기가 아니라 꼭 자유민주주의의 위기라고 한다. 민주주의가 무엇인지에 대한 진보세력과의 이념적 시각 차이를 반영한 것이다. 하지만 그게 자유민주주의든, 그냥 민주주의든 진보세력과 보수세력 모두 정치 현실에 대한 문제의식을 ‘민주주의의 위기’라고 표현한다. 왜 그런 걸까? 민주주의가 진짜 위기에 처해 있기 때문인 걸까?

흥미로운 것은 보수세력과 진보세력 모두 당시의 집권세력을 독재라고 칭하는 데에서 민주주의 위기 진단을 끌어내고 있다는 것이다. 보수세력은 지난 문재인 정권을 독재정권이라고 했고, 진보세력은 현 윤석열 정권을 독재정권이라고 부른다. 주말의 광화문 태극기 집회 현장이나 더불어민주당 정치인들의 윤석열 정권에 대한 비판적 언사를 통해 쉽게 확인할 수 있다. 문재인 정권과 윤석열 정권 모두 진짜 독재정권인 것일까?

일단 한국의 보수 진보 간의 정치·사회적 쟁투 과정에서 민주주의는 좋은 것, 독재는 나쁜 것이다. 가끔 박정희 유신 정권을 미화하며 독재가 필요하다는 주장을 하는 이들도 있긴 하지만. 또 최근 정치학 관련 수업을 하다보면 더 효율적이라는 이유로 독재를 지지하는 학생들도 볼 수 있지만. 여하튼 민주주의는 좋은 것이고, 독재는 나쁜 것이라는 전제하에 자기는 민주주의의 쟁취자 및 수호자이고, 상대는 민주주의의 파괴자 및 독재자다. 즉, 민주주의와 독재는 주로 자신과 상대방의 정체성을 규정하고 차별성을 드러내는 용어로 쓰이고 있는 것이다. 왜 이리 되었을까?

원칙적으로 민주주의가 진짜 위기에 처해 있는지 아닌지를 가늠하기 위해서는 민주주의가 뭔지에 대한 사유와 규정이 필요하다. 특정 정권을 독재정권이라고 규정하기 위해서도 마찬가지다. 이뿐만 아니라 독재 규정을 위해서는 민주주의에 더해 독재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밝혀야 한다. 민주주의는 직관적으로 쉽게 파악할 수 있는 일상의 용어라기보다는 이론적으로 구성된 개념어이기 때문이다. 정치학자의 수만큼이나 많다는 정치에 대한 개념 규정만큼은 아니어도, 민주주의 역시 그것이 무엇인지는 여전히 논쟁적이다.

몇년 전 박근혜 정권 때 국내 한 연구기관이 주최한 ‘민주주의 국제포럼’ 참석차 한국을 방문했던 스웨덴의 한 정치학자는 민주주의는 물론, 민주주의의 위기라는 말을 쉽게 해서는 안 된다고 조언하기까지 했다. 자기가 보기에 한국의 정치인과 학자, 사회운동가 등은 민주주의의 위기라는 말을 너무나 쉽게 한다면서. 당시 그는 포럼 주최 측과 한국 참가자 상당수가 스웨덴은 좋은 민주주의 국가이고, 박근혜 정권은 그에 비추어 볼 때 독재까지는 아니어도 민주주의 정권이라고 하기 어렵다는 말을 듣고 싶어 한다고 여겼던 것 같다. 그게 사실이든 아니든 간에 민주주의와 독재를 논할 때, 특히 현존하는 정치사회 세력을 민주주의나 독재라고 규정하는 데 보다 신중할 필요가 있다는 그의 주장에 귀기울일 필요가 있다.

하지만 민주주의든 독재든 그 개념이 먼저 있고 정치·사회적 현실이 있는 게 아니다. 민주주의와 독재 모두 특정 시대의 정치·사회적 현실에 기초해 생겨난 개념이다. 그게 뭔지에 대해 여전히 논쟁적인 이유다. 특히 민주주의와 독재같이 정치·사회적 쟁투와 갈등의 현장에서 흔히 쓰이는 용어의 경우는 이론보다 특수한 역사적 경험이 더 크게 영향을 끼친다.

‘난 민주주의, 넌 독재’의 차별성

한국에서 민주화 이후 시기에도 정치·사회적 쟁투 과정에서 실제 그런지의 여부를 떠나 자신을 민주주의로 규정하고, 상대방을 독재로 몰아 비난하고 공격하는 이유는 이승만-박정희-전두환-노태우 정권에 이르는 40여년에 걸친 독재 정권의 경험 때문이기도 하다. 이승만 정권은 경찰독재, 박정희-전두환-노태우 정권은 군부독재였다. 이런 독재 정권들이 자행한 국가폭력으로 목숨을 잃고 차별받고 배제되는 경우를 목격하거나 겪어오면서 독재는 저항하고 무찔러야 할 악임을 인식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경험과 인식이 민주화 이후 지금에 이르기까지 영향을 끼치는 두 가지 유산을 낳았다. 하나는 권력을 차지한 세력, 특히 집권 세력의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여겨지는 부정적인 정치·사회적 행태를 독재라는 관점에서 바라보고 이해하고 인식하게 하는 민감함을 심어 놓았다. 다른 하나는 그런 민감함 때문에 경쟁자와 상대방을 가장 거세게, 또 효과적으로 비난하고 공격할 수 있는 방법이 독재라고 낙인을 찍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독재를 염려하는 예민한 감수성, 그리고 상대방을 독재로 규정하는 것의 정략적 활용성에 대한 인지가 민주화 이후의 정치·사회적 현실과 쟁투와 갈등 현장에서 작용해 온 것이다.

그런 중에 이명박 정권은 미국산 쇠고기 수입과 4대강 정비사업의 독단적 감행 그리고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작성 등을 이유로 유사파시즘 정권으로까지 명명되기도 했으며, 박근혜 정권은 최순실 게이트 발발 이전에 이미 박정희 독재정권의 계승자라는 의미에서 신유신 정권으로 불리기도 했다. 노무현, 문재인 정권은 주도 세력의 과거 이력에 타깃을 맞춰 386 운동권 독재 혹은 좌빨 독재 정권 등으로 불렸다. 현 윤석열 정권은 통치의 조직기반 때문에 검찰독재정권으로 불린다. 이런 식의 용례에서 민주주의의 위기는 독재로 규정되는 정권의 등장과 집권 그 자체이다.

역사적 경험과 유산에 따른 것이기 때문에 계속 이리 사용해도 문제가 없는 것일까? 그렇지는 않다. 부정적 효과가 크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시대 상황에 부합하는 방식으로 재개념화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어떻게 재규정해야 할까? 민주주의를 독재에 대비해 그저 좋은 것으로, 그 위기를 독재로 명명한 세력의 집권으로 보는 것을 넘어서야 한다. 이때 여러 이론들이 다 같이 인정할 수밖에 없는 공통성과 작금의 삶의 현실에 기초해야 한다.

약자의 주권 마련에 초점 둬야

이때 상기할 게 있다. 민주주의 개념 규정의 중요성을 알려준 미국의 정치학자이자 <절반의 인민주권>의 저자인 샷츠슈나이더가 강조했던 것처럼, 민주주의를 위해 사람들이 있는 게 아니라, 사람들을 위해 민주주의가 있는 것임을. 그래서 민주주의를 모든 사람들에게 죄의식을 심어줄 뿐 실현할 수 없는 규범으로 정의해선 안 된다는 것을.

민주주의는 그것의 형식과 절차를 중시하든 아니든 간에, 그 작동의 결과가 인구의 다수를 차지하는 소수자와 약자의 주권을 증진하는 것이어야 한다. 민주주의라는 말 자체가 그것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현재 강자와 약자 간의 힘의 관계의 불균형이 너무나 크기 때문이다. 단지 사회경제적 불평등의 심화를 말하는 게 아니다. 그것과 동반한 소수자와 약자에 대한 차별과 배제의 문제를 말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현재 민주주의의 위기는 특정 세력의 집권이 아니라, 그와 같은 힘의 관계의 불균형이 시정되지 못하고 있는 데에서 찾아져야 한다. 자신을 민주주의자라고 또 상대방을 독재자라고 명명하는 이들 간의 치열한 쟁투와 갈등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이것이 민주주의 위기의 실체이다.

그래서 민주주의 위기의 극복은 결코 자기와 타자에 대한 네이밍에 불과한 ‘민주 vs 독재’ 구도의 조성을 주도하는 기성 정치세력들 간의 선거 게임으로 이루어질 일이 아니다. 선거제도의 이런저런 개편으로 군소정당의 의석수를 늘리거나 원내 의석을 차지하는 군소정당의 수가 늘어나는 것으로 이루어질 일도 아니다. 그 구도가 실제 소수자와 약자의 주권을 증진하기 위한 내용들로 채워지고 전 사회에 걸쳐 만들어질 때, 그리고 일련의 결과들이 축적될 때 가능할 일이다. 지금 우리 사는 세계의 핵심 문제인 기후 위기와 (탈)성장 그리고 전쟁과 평화의 문제 역시 그러한 관점에서 다뤄져야 할 것이다. 단지 우리 모두 기후위기를 극복해야 하고, 탈성장의 노선을 택해야 하고, 전쟁을 중단하고 평화를 지키자는 주장의 옳음을 강변하는 데 머물러서는 안 된다. 그것들이 소수자와 약자에게 고통을 전가시키는 구조, 그럼에도 이들의 정책결정권을 박탈하거나 보장하지 못하는 제도와 운용 방식에 주목해야 한다. 일상적 정치와 정책결정과정에서 소수자와 약자들이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힘과 자리를 마련하는 것에 초점을 둬야 한다. 이를 위해서도 민주주의의 의미가 무엇이고, 그 위기의 실체가 무엇인지 유념할 필요가 있다.

김윤철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김윤철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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