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원, 국제 협약 근거 “한반도서 저지른 불법행위 재판 가능”
“피해자, 강제로 동원돼 죽음까지 감수”…일 배상 책임 명시

“항소심 판결 환영”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이용수 할머니와 소송대리인단이 23일 서울 서초구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대회의실에서 일본 정부를 상대로 낸 2차 손해배상 소송 항소심에서 승소한 뒤 입장을 밝히고 있다. 문재원 기자 mjw@kyunghyang.com
일본 정부는 일본군의 ‘위안부’ 동원·강요 행위와 관련해 ‘위안부’ 피해자들에게 손해를 배상해야 할 책임이 있는가. 그간 법원은 이 질문에 명확한 답변을 내놓지 못했다. 주권국가인 일본을 대한민국 법정에 세울 수 있는지를 두고 1심에서 의견이 엇갈렸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서울고법이 23일 ‘위안부’ 피해자들이 일본을 상대로 낸 2차 손해배상 소송 항소심에서 “일본에 배상 책임이 있다”고 판결한 것은 의미가 크다. 국내에서 일본이 저지른 반인권 범죄에 대해선 한국 법원의 재판권을 인정할 수 있으며 일본 정부는 합당한 위자료를 지급해야 한다고 판시한 이번 판결은 이른바 ‘국가면제론’을 두고 엇갈린 1심 판결을 교통정리한 셈이기 때문이다.
이번 재판의 주된 쟁점은 일본에 ‘국가면제’를 적용할 수 있는지 여부였다. 국가면제란 한 나라의 주권 행위를 다른 나라 법원이 재판할 수 없다는 국제관습법상 규범이다. 1심 재판부는 일본군의 위안부 동원·강요 행위에 대해서도 국가면제를 적용해야 한다며 원고 패소 판결했다.
반면 항소심 재판부는 일본 정부에 대한 한국 법원의 재판권이 인정된다고 했다. 1심과 달리 불법행위에 대한 국가면제를 부정하는 일반 관행이 있다고 본 것이다. 항소심 재판부는 유엔 국가면제협약, 유럽국가면제협약, 우크라이나 대법원 판결 등을 예로 들면서 “가해국이 다른 국가에서 저지른 불법행위에 대해선 국가면제를 인정하지 않는 국가 실행들이 다수 확인됐다”고 했다.
항소심 재판부는 국제사법재판소(ICJ)의 ‘페리니 판결’에 대해서도 1심과 다른 해석을 내놨다. 2004년 한 이탈리아인은 제2차 세계대전 중 독일에 끌려가 9개월간 강제노역을 했다며 자국 법원에서 독일 정부를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해 승소했다. 독일 법원은 이에 불복해 ICJ에 제소했고, ICJ는 2012년 독일의 국가면제를 인정하는 결정을 내렸다. “무력분쟁 과정에서 다른 나라의 영토 내에서 발생한 강행법규 위반 등에 대해선 국가면제를 인정하는 것이 일반적인 관행”이라는 것이 ICJ의 다수의견이었다. 1심 재판부도 일본의 국가면제를 부정하는 것은 일반 관행이 아니라며 이 판결을 근거로 들었다.
그러나 항소심 재판부는 이번 사건과 ‘페리니 사건’은 다른 경우라고 봤다. 일본군이 피해자들을 동원해 ‘위안부’ 생활을 강요한 것은 ‘무력분쟁 수행 중’에 발생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같은 논리를 적용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항소심 재판부는 나아가 일본 정부를 상대로 손해배상 책임을 물을 수 있다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일본이 전쟁 중 “군인들의 사기 진작 등을 목적으로 위안소를 설치·운영했으며, 당시 10·20대에 불과했던 피해자들을 기망, 유인하거나 강제로 납치해 위안부로 동원했다”고 했다. 또 “피해자들은 최소한의 자유조차 억압당한 채 일본군들로부터 매일 원치 않는 성행위를 강요당했고, 그 결과 무수한 상해를 입거나 임신, 죽음의 위험까지 감수하고 전쟁이 끝난 후에도 정상적인 사회생활에 적응할 수 없는 손해를 입었다”고 했다.
재판부는 일본이 당시 가입해 있던 인신매매 금지나 강제노동에 관한 국제조약 등을 어긴 것은 물론 대한민국 민법상 불법행위를 저질렀다고 했다. 일본 정부는 소송 서류를 거듭 반송하며 이번 소송의 참여를 거부해왔다. 재판부는 “항변 사항에 해당하는 ‘1965년 청구권 협정’ 또는 ‘위안부 관련 2015년 한·일 합의’ 등이 피해자들의 손해배상 청구권을 소멸시킬 수 있는지, 소멸시효의 완성 여부 등에 대해서는 일본이 변론하지 않아 쟁점 자체가 되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