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주 ‘책건문’에 소개할 신간은 세 권입니다. 각각 어머니, 형, 친구를 잃은 이들의 이야기입니다. 죽음, 슬픔, 상실, 애도를 다루지요. 공통점은 또 ‘예술’입니다. 필립 케니콧의 <피아노로 돌아가다>(정영목 옮김 | 위고)는 바흐 음악, 후아 쉬의 <진실에 다가가기>(정미나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는 얼터너티브 록 등 대중음악에 관한 이야기가 줄기에 흐릅니다. 패트릭 브링리의 <나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경비원입니다>(김희정·조현주 옮김|웅진지식하우스)는 제목에서 드러나듯, 미술 작품에 관한 감상도 곁들인 책입니다.
다른 공통점 하나는 ‘삶’입니다. ‘그래도 어떻게든 살아간다’ ‘삶은 지속한다’ 정도로 요약할 수 있을 듯합니다. 저자들의 공통분모도 있습니다. 케니콧과 쉬는 각각 2013, 2023년 퓰리처상을 받았습니다. 쉬와 브링리는 ‘뉴요커’로 이어집니다. 쉬는 지금 전속 작가이고, 브링리는 미술관에 가기 전 이곳에서 일했습니다. 이제 책 내용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죽음과 상실이 강조하는 공포
다른 사람들의 죽음은, 도래할 ‘나의 죽음’을 불러내기도 합니다. 죽음 앞에서 상실감과 함께 공포감도 느끼죠. 음악가이자 ‘워싱턴포스트’ 예술·건축 평론가인 케니콧은 영국 시인 제라드 맨리 홉킨스의 시 ‘봄과 가을’(1880)을 읽으며 괴로워했다고 합니다. 시 화자가 어린아이 마거릿에게 말하는 내용으로 이뤄졌습니다.
케니콧은 이 시를 읽으며 괴로워 한 건 “다른 사람들의 죽음을 포함한 상실이 우리에게 일으키는 깊고 자기 본위적인 공포감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 때문입니다. 그는 이렇게도 말합니다.
부모의 죽음에서 우리의 죽음을 재발견한다
모두가 경험하는 죽음에서 위안이란 게 있을까요. 케니콧은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은 삶에 들어서면서 치르는 대가라는 생각에서 약간 위안을 얻은 기억이 난다”고 했습니다. 삶의 의미? “우리 모두가 죽음이라는 오직 한 가지 사실로 단결을 이루는 우애 클럽에 소속되어 있음을 깨닫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질 수밖에 없는 죽음과의 싸움에서는 우아하게 물러나는 법”을 배우는 일이기도 합니다.
케니콧의 어머니는 불행했고, 불행한 채로 죽었다고 합니다. 죽는 과정에서도 “괴로움이 가득”했습니다. 케니콧은 “불행한 삶이 불행한 종말을 맞이하는 것을 지켜보는 무력함”에 시달렸습니다.
이 고통의 와중에 떠올린 건 바흐 음악입니다. 위로와 위안을 받으려 한 건 아닙니다.
음악은 고통, 향수, 기억에 더 예민하게 만든다
죽음과 삶이 얽힌 바흐 음악
왜 바흐였을까요. “바흐 음악의 핵심은 절대적으로 죽음과 삶 사이의 대화, 처음부터 끝까지 우리 삶을 지배하는 두 기본적 충동의 얽힘이었다.” 케니콧은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다시 배우려고 합니다. 이 변주곡은 “상실 후에 찾아오는 어떤 것, 길을 잃고 헤매면서도 동시에 자신이 어디 있는지 아는 데서 오는 혼란이라는 고무줄 같은 감각을 희미하게 알려”준 “삶의 풍요를 가없이 늘려줄” 음악이었다고 합니다. 삶을 돌아오게 한 계기이기도 합니다.
책엔 바흐에 관한 이야기도 많이 나옵니다. 바흐는 “가슴 아픈 상실”을 겪은 사람이기도 합니다. 자녀 스무 명 중 열한 명이 죽었습니다. 바흐 지휘자인 존 엘리엇 가디너는 바흐 전기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그의 삶에 끈질기게 달라붙은 죽음-부모, 형제자매, 첫 부인, 그리고 아주 많은 자식-때문에 사랑하는 것에는 기본적으로 상실의 위험이 따른다는 경험에 기초한 감정적 은둔 또는 경계심이 생겼을 수도 있다.” 케니콧은 바흐가 음악으로 위로를 받은 게 아니라 “음악이 그의 삶을 확대하고 예측 불가능성을 다루는 수단을 제공”했다고 말합니다.
글렌 굴드와 골드베르크 변주곡
책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은 글렌 굴드와 ‘골드베르크 변주곡’입니다. 굴드가 1955년 연주한 이 변주곡을 두곤 이렇게 썼습니다.
책엔 1981년 연주에 관한 이야기나 굴드가 이 곡을 두고 “바흐의 수준 낮은 잡동사니”라고 했다는 말도 전합니다.
케니콧은 자기 홈페이지에 이 책 이야기와 함께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치는 영상도 올려뒀습니다. 아래 페이지 중간에 나옵니다.
애도는 우리를 공동체로 묶어준다
‘애도란 무엇인가’에 관한 생각도 전합니다. “우리는 삶에서 애도의 존재와 기간을 최소화하기를 바라며, 좋은 삶이란 어떤 애도도 없는 삶으로 보인다”며 이렇게 썼다. “하지만 아직은 애도처럼 우리 세계를 잘 조직해주는 것이 없다. … 애도는 우리를 공동체로 묶어주며 최악이 아닌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더 친절해지도록 흔들어놓는다.”
어머니의 죽음과 바흐 배우기를 통해 깨달은 삶의 의미는 이렇게 정리합니다.
살해당한 친구, 죄책감과 정신적 외상
친구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살아남은 이에게 어떤 의미일까요. 그것도 친구가 살해당했다면 말이죠. ‘뉴요커’ 전속 작가인 후아 쉬는 <진실에 다가가기>에서 가장 친한 친구의 죽음 뒤 상실과 우정을 회고합니다.
‘켄’은 1998년 살해당했습니다. 쉬는 켄 아파트 발코니 앞을 왜 그냥 지나쳤는지 같은 죄책감에 오래 시달립니다. 켄이 주최한 파티에서 일찍 나와버린 것도 후회가 됐죠. 정신적 외상은 지속했습니다. 특정한 감정을 상기시키는 노래를 피했습니다. 과거를 떠올리게 하는 사람과 함께 있는 시간도 차츰 줄었습니다. 전화하기로 한 친구에게서 전화가 오지 않으면, 그 친구가 죽었을지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경찰서에 전화까지 합니다. “무언가 끔찍한 일이 일어나리라는 생각 때문에 내가 본 사람들의 마지막 모습들을 늘 생생히 기억했다.”
상담사의 조언이 도움이 됐습니다.
그런 생각을 안 해봤던 건 아니지만 다른 사람의 말로 직접 들으니 기운이 났다.
우리가 평생 화합에 이끌리는 이유
두 사람은 아시아계 이민자의 후손입니다. 쉬는 대만계, 켄은 일본계죠. 책엔 1990년대 미국의 대중음악 이야기도 많이 나옵니다. 켄은 펄 잼을, 쉬는 너바나를 좋아했습니다. 두 사람은 나중에 두 밴드를 좋아하게 됩니다. 대학 시험공부를 할 때, 너바나의 실황음반 <From the muddy banks of the wishkah>를 같이 듣곤 했습니다. 쉬는 친구들과 함께 차에서 비치 보이스의 ‘God Only Knows’를 따라 부르던 순간을 떠올리며 우정에 관한 이야기를 이어갑니다.
우정에 관한 철학자들의 말들도 떠올립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청춘의 우정이 언제나 즐거움을 따라 궤도를 돈다고 말했습니다. ‘청춘의 삶’을 두고는 “감정에 이끌려, 즐거움을 주는 대상과 그 순간의 경험을 열렬히 좇기 마련이다. 나이를 먹으면서 즐거움의 대상도 달라지고, 급속도로 친구가 되었다가 또 그만큼 빨리 멀어지기도 한다. 즐거움의 대상이 달라지면서 우정 역시 변한다. 젊은이의 즐거움이란 금방금방 변하기 때문이다”라고도 했죠.
쉬는 아리스토텔레스 말을 이렇게 이어 받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 이전에는 친해지는 순간이 있다.
어떻게 해야 그를 버리지 않으면서 그대로 버려 두는 걸까
쉬는 데리다의 글에서 켄의 죽음과 관련되는 말을 찾았습니다.
쉬는 추도에 그치지 않으려고 다시 펜을 듭니다. “글 속에서 나 자신을 과거로 다시 돌아가게 하려고 했다.” 책 모서리 여백에 적어 둔 친구들의 말, 낙서를 끄적였던 냅킨 등을 찾았습니다. 쉬는 죽은 켄에게 날마다 편지를 쓰며 모든 것들을 시시콜콜 늘어놓고, 매일매일의 일을 전합니다.
E. H.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도 떠올립니다. 쉬는 밑줄 친 “미래만이 과거를 해석하는 열쇠가 될 수 있으며, 오로지 이런 의미에서만 역사의 궁극적인 객관성을 말할 수 있다. 과거가 미래에 빛을 비추고 미래가 과거에 빛을 비추는 것이 바로 역사의 명분이자 이유다”라는 카의 문장을 두고 이렇게 썼습니다. “우리는 카의 이런 생각의 양 끝에 있었다. 켄은 과거에, 나는 미래에.”
기쁨에 굴복하는 게 너를 버린다는 뜻은 아냐
쉬는 이 책을 20년 넘게 써왔다고 말합니다. 친구에게 책을 바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세상을 멈추는 일은 없으리라는 증거 앞에서
<나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경비원입니다>는 형의 죽음에서 비롯된 책입니다. 스물다섯 살 생일을 맞이한 직후 스물여섯이던 형 톰이 암으로 세상을 떠납니다. 세상은 아랑곳없이 잘도 돌아가죠.
형이 죽고 무력감 때문에 ‘뉴요커’를 그만둡니다. “형이 세상을 떠나고 나자 나는 내가 아는 공간 중 가장 아름다운 장소에서, 떠올릴 수 있는 가장 단순한 일을 하는 일자리에 지원”합니다. 바로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경비원이죠.
형의 죽음 뒤 예전 본 그림들은 새로운 의미로 다가옵니다. 어머니가 대학 때 부전공이 미술사였죠. 어린 시절부터 자주 미술관을 다녔습니다. 예전 본 그림 중 하나가 니콜로 디 피에트로 제리니의 ‘무덤의 예수와 성모’죠. “매우 아름답지만 당돌하리만치 죽은 게 확실한 젊은이를 그의 어머니가 온몸으로 받치고 있는 장면”을 담았습니다. ‘피에타’ 또는 ‘통곡’이라는 부르는 장르에 들어가는 그림입니다. 형의 죽음 뒤 어머니와 함께 다시 이 그림을 봅니다.
위대한 그림은 거대한 바위처럼 보일 때가 있다
브링리는 미술관에서 10년을 일합니다. 그가 미술관 경비원으로서 수행한 마지막 임무는 바로 맨 처음 미술관에 갔을 때 배운 일입니다. 20여 년 전 어머니는 시카고 미술관에서 자녀들에게 가장 마음에 드는 작품을 고르라고 했죠.
프라 안젤리코,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 출처: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브링리는 20년 뒤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소장품 중 프라 안젤리코의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를 고릅니다. “너무도 고통스럽지만 이 그림이 톰을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 좋았죠. 죽음과 삶에 관해 생각합니다.
그러나 안젤리코 수사가 묘사한 것은 예수의 몸뿐만이 아니다. 그는 십자가의 발치에 뒤죽박죽으로 모여 있는 구경꾼 한무리를 상상했다. 옷을 잘 갖춰 입은 사람, 말을 타고 있는 사람 등등 꽤 많은 구경꾼들의 얼굴에는 놀라우리만치 다양한 반응과 감정들이 떠올라 있다. 침통해하는 사람들, 호기심을 느끼는 사람들, 지루해하는 사람들, 심지어 다른 곳에 신경이 팔려 있는 사람들도 있다. 옛 거장들의 그림에서 자주 보이는 리얼리즘이다. W. H. 오든의 시 「뮤제 데 보자르Musee des Beaux Arts(미술관)」에도 나와 있듯 “끔찍한 순교”가 벌어지는 와중에도 어떤 사람은 음식을 먹고, 창문을 열고, 별생각 없이 그 옆을 걸어간다. 나는 사람들이 몰려 있는 가운데 부분이 혼란스러운 일상생활을 제대로 표현한다고 생각한다- 디테일로 가득하고, 모순적이고, 가끔은 지루하고 가끔은 숨 막히게 아름다운 일상. 아무리 중차대한 순간이라 하더라도 아무리 기저에 깔린 신비로움이 숭고하다 할지라도 복잡한 세상은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돌아간다. 우리는 삶을 살아가야 하고, 삶은 우리를 내버려 두지 않는다.
삶은 우리를 내버려 두지 않는다
브링리가 더 주목한 건 그림 하단입니다.
삶과 예술에 관한 생각을 경비원 일과도 연결하죠.
책은 미술과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이야기도 많습니다. 브링리는 몇 가지 안내도 합니다.
대다수 작품의 고해상도 이미지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홈페이지(metmuseum.org)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작품 취득 번호(예를 들어 “29.100.6”)로 검색하면 좋습니다. 책 뒷장 그림 취득 번호 목록을 적어뒀습니다. 브링리는 자기 홈페이지(patrickbringley.com/art)에서도 목록과 함께 미술관 페이지를 링크해뒀습니다. 미술관 공식 출판물은 metmuseum.org/art/metpublications에서 무료로 읽을 수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