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에서 건진 문단
‘책에서 건진 문단’(책건문)은 경향신문 책 면 ‘책과 삶’ 머리기사의 확장판 이름입니다. 지면 서평은 ‘지면 제약’ 때문에 한두 문장만 인용할 수밖에 없습니다. ‘책건문’은 문단 단위로 내용을 소개합니다. 지면 서평도 더 쉽게 자세하게 풀었습니다. 지은이 뜻을 더 정확하게 전하려는 취지의 보도물입니다. 경향신문 칸업 콘텐츠입니다. 책 문단을 통째로 읽고 싶으시면 로그인 해주세요!

이번 주 ‘책건문’에 소개할 신간은 세 권입니다. 각각 어머니, 형, 친구를 잃은 이들의 이야기입니다. 죽음, 슬픔, 상실, 애도를 다루지요. 공통점은 또 ‘예술’입니다. 필립 케니콧의 <피아노로 돌아가다>(정영목 옮김 | 위고)는 바흐 음악, 후아 쉬의 <진실에 다가가기>(정미나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는 얼터너티브 록 등 대중음악에 관한 이야기가 줄기에 흐릅니다. 패트릭 브링리의 <나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경비원입니다>(김희정·조현주 옮김|웅진지식하우스)는 제목에서 드러나듯, 미술 작품에 관한 감상도 곁들인 책입니다.

다른 공통점 하나는 ‘삶’입니다. ‘그래도 어떻게든 살아간다’ ‘삶은 지속한다’ 정도로 요약할 수 있을 듯합니다. 저자들의 공통분모도 있습니다. 케니콧과 쉬는 각각 2013, 2023년 퓰리처상을 받았습니다. 쉬와 브링리는 ‘뉴요커’로 이어집니다. 쉬는 지금 전속 작가이고, 브링리는 미술관에 가기 전 이곳에서 일했습니다. 이제 책 내용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책에서 건진 문단]사랑하는 이들의 죽음···우리를 내버려 두지 않는 삶 앞에서

죽음과 상실이 강조하는 공포

다른 사람들의 죽음은, 도래할 ‘나의 죽음’을 불러내기도 합니다. 죽음 앞에서 상실감과 함께 공포감도 느끼죠. 음악가이자 ‘워싱턴포스트’ 예술·건축 평론가인 케니콧은 영국 시인 제라드 맨리 홉킨스의 시 ‘봄과 가을’(1880)을 읽으며 괴로워했다고 합니다. 시 화자가 어린아이 마거릿에게 말하는 내용으로 이뤄졌습니다.

마거릿, 너는 슬퍼하고 있니/ 골든그러브가 잎을 벗는 것에?/ 너는 마치 사람의 일처럼 잎을/ 네 어린 생각들로 걱정하고 있구나./ 아! 마음이 늙어갈수록/ 그런 광경에는 더 차가워지기 마련이란다./ 창백한 숲의 세계가 한 잎 한 잎 떨어져 내려도/ 한숨 한번 짓지 않게 되지./ 그러나 너는 울면서 그 이유를 알려 할 거야./ 아이야, 이름이 어떻든/ 슬픔의 원천은 똑같단다./ 어떤 입도, 어떤 정신도 표현하지는 않았지/ 마음이 들은 것, 영혼이 짐작한 것을./ 그러나 인간은 시들기 위해 태어났으며/ 네가 애달파하는 것은 마거릿 너 때문이란다.

케니콧은 이 시를 읽으며 괴로워 한 건 “다른 사람들의 죽음을 포함한 상실이 우리에게 일으키는 깊고 자기 본위적인 공포감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 때문입니다. 그는 이렇게도 말합니다.

부모의 죽음에서 우리의 죽음을 재발견한다

우리는 부모의 죽음에서 죽음을 불가피하고 보편적인 것으로 재발견한다. 이상적으로 보자면 부모의 죽음은 우리가 죽는 것을 배우도록 돕는다. 가끔은 명시적으로 통찰을 주고 자신들의 죽음 때문에 슬퍼할 우리를 위로하여, 결국 우리는 우리 자신의 죽음이 올 때 견디기 쉬워질 것이다.

모두가 경험하는 죽음에서 위안이란 게 있을까요. 케니콧은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은 삶에 들어서면서 치르는 대가라는 생각에서 약간 위안을 얻은 기억이 난다”고 했습니다. 삶의 의미? “우리 모두가 죽음이라는 오직 한 가지 사실로 단결을 이루는 우애 클럽에 소속되어 있음을 깨닫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질 수밖에 없는 죽음과의 싸움에서는 우아하게 물러나는 법”을 배우는 일이기도 합니다.

케니콧의 어머니는 불행했고, 불행한 채로 죽었다고 합니다. 죽는 과정에서도 “괴로움이 가득”했습니다. 케니콧은 “불행한 삶이 불행한 종말을 맞이하는 것을 지켜보는 무력함”에 시달렸습니다.

이 고통의 와중에 떠올린 건 바흐 음악입니다. 위로와 위안을 받으려 한 건 아닙니다.

음악은 고통, 향수, 기억에 더 예민하게 만든다

나는 음악이 위로를 준다거나 음악에 치유의 힘이 있다는 식의 발상에 발끈한다. 그것은 음악 한담에 등장하는 클리셰이자 교향곡에 돈을 대거나 오페라하우스 벽에 이름을 새겨놓는 사람들이나 하는 말이다. 그것은 베토벤과 모차르트에 관한 형편없는 다큐멘터리에서 내레이션을 하는, 누구의 것인지 모를 목소리의 쓸데없는 말이다. …… 음악은 기껏해야 삶에서 더 고통스러운 것들로부터 눈을 돌리게 할 뿐이다. 우리가 음악의 힘을 위로와 혼동한다면 그것은 엉성한 사고 때문이다. 위로는 세상 또는 삶에 관하여 마음 놓이게 해주는 진술, 음악이 어떤 방식으로도 할 수 없는 철학적 진술을 요구한다. 위로는 삶이 덜 고통스러워지도록 생각을 정리하는 데 도움을 준다. 아주 많은 경우 위로란 어머니가 죽어가는 동안 내가 나 자신에게 반복했던 것과 같은 일종의 클리셰다. 어떤 사람들에게 그것은 달력이나 포스터에서 발견하는 진부한 문구다. 다른 많은 사람들에게 그것은 종교의 기반을 이루는 소망적 사고다. 우리가 음악이 위로를 준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마 음악이 너무 자주 종교의 하녀가 되어 종교적 관념에 대한 우리의 감정적 반응을 증폭시키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음악 자체는 어느 편인가 하면 우리의 생살을 드러내 우리를 고통, 향수, 기억에 더 예민하게 만든다.

죽음과 삶이 얽힌 바흐 음악

왜 바흐였을까요. “바흐 음악의 핵심은 절대적으로 죽음과 삶 사이의 대화, 처음부터 끝까지 우리 삶을 지배하는 두 기본적 충동의 얽힘이었다.” 케니콧은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다시 배우려고 합니다. 이 변주곡은 “상실 후에 찾아오는 어떤 것, 길을 잃고 헤매면서도 동시에 자신이 어디 있는지 아는 데서 오는 혼란이라는 고무줄 같은 감각을 희미하게 알려”준 “삶의 풍요를 가없이 늘려줄” 음악이었다고 합니다. 삶을 돌아오게 한 계기이기도 합니다.

어머니가 죽고 나서 바흐를 공부하기 시작했을 때 그것은 삶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노력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묘한 일이 일어났다. 삶은 저절로 돌아왔다. 이제 음악은 내가 한때 살았던 장소들을 방문하는 동안 피어났다가 삶의 배경으로 사라지는 어떤 오래된 우정을 떠올리게 한다. 절대 죽지 않고, 또 절대 성장하지도 않을 관계. 피아노를 연습하는 것은 운동할 때처럼 그냥 기술, 힘, 통제력을 쌓아 올리는 것이 핵심이 아니라 줄어드는 능력을 평가하는 것이기도 하다. 어머니가 죽은 후 몇 달 또 몇 년 동안은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익히려는 다급함이 강했다 그 다급함은 막 시작된 우울에 의해, 또 어머니가 죽음을 맞을 때 느낀 것과 같은 무게의 후회로 나의 죽음을 맞이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으로 더 강화되었다 그러나 삶이 돌아오면서 바흐는 내 삶에서 더 합당한 자리로 돌아왔다.

책엔 바흐에 관한 이야기도 많이 나옵니다. 바흐는 “가슴 아픈 상실”을 겪은 사람이기도 합니다. 자녀 스무 명 중 열한 명이 죽었습니다. 바흐 지휘자인 존 엘리엇 가디너는 바흐 전기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그의 삶에 끈질기게 달라붙은 죽음-부모, 형제자매, 첫 부인, 그리고 아주 많은 자식-때문에 사랑하는 것에는 기본적으로 상실의 위험이 따른다는 경험에 기초한 감정적 은둔 또는 경계심이 생겼을 수도 있다.” 케니콧은 바흐가 음악으로 위로를 받은 게 아니라 “음악이 그의 삶을 확대하고 예측 불가능성을 다루는 수단을 제공”했다고 말합니다.

글렌 굴드와 골드베르크 변주곡

책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은 글렌 굴드와 ‘골드베르크 변주곡’입니다. 굴드가 1955년 연주한 이 변주곡을 두곤 이렇게 썼습니다.

지금까지 나온 녹음 가운데 가장 감탄할 만하면서도 가시가 돋친 것이었다. 이 녹음은 디지털 사운드 이전 가냘픈 소리 특유의 그윽함으로 한 피아니스트가 기적적인 일을 해내는 과정을 포착하고 있으며, 반복되는 저음 패턴 위에 바흐의 서른 개 변주곡의 서로 엮이는 선율을 다채로운 빛으로 명료하게 밝혀준다. 이 녹음이 가끔 건조하다거나 거의 공격적으로 음악의 껍질을 벗겨 그 힘줄을 드러내는 과정이 지나치게 과격하다고 생각하는 비평가들조차 여전히 경외감에 사로잡힌다. 만일 이것이 소리를 비틀고 왜곡하는 데 이용하는 오늘날의 그 수많은 도구를 갖춘 상태에서 만들어졌다면 사람들은 피아니스트, 그리고 엔지니어들이 스튜디오에서 사기를 쳤다고 의심할 것이다. 나는 굴드의 연주에 귀를 기울이면서 어머니의 임종의 날들 동안 「샤콘」에서 느꼈던 무궁무진한 감정과 의미를 『골드베르크 변주곡』에서 똑같이 느꼈다. 굴드의 완벽한 연주, 정신적 강인함에 전율했다.

책엔 1981년 연주에 관한 이야기나 굴드가 이 곡을 두고 “바흐의 수준 낮은 잡동사니”라고 했다는 말도 전합니다.

케니콧은 자기 홈페이지에 이 책 이야기와 함께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치는 영상도 올려뒀습니다. 아래 페이지 중간에 나옵니다.

애도는 우리를 공동체로 묶어준다

‘애도란 무엇인가’에 관한 생각도 전합니다. “우리는 삶에서 애도의 존재와 기간을 최소화하기를 바라며, 좋은 삶이란 어떤 애도도 없는 삶으로 보인다”며 이렇게 썼다. “하지만 아직은 애도처럼 우리 세계를 잘 조직해주는 것이 없다. … 애도는 우리를 공동체로 묶어주며 최악이 아닌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더 친절해지도록 흔들어놓는다.”

어머니의 죽음과 바흐 배우기를 통해 깨달은 삶의 의미는 이렇게 정리합니다.

내적 삶에 대한 나의 감각은 단순하다. 심지어 원시적이다. 그것은 고통과 상실, 죽음과 인간이기에 타고난 고립에 맞서는 울타리로서 우리가 의미를 쌓아두는 창고다. 우리는 무언가가 어떻게 또는 왜 우리에게 의미가 있는지 절대 설명할 수 없을지 모르지만, 의미 있는 것이 무엇이든 적어도 계속 계발하고 보존해야 한다는 것만은 확신할 수 있다. 음악과 문학은 반드시 그 순간에 나에게 쾌락을 주지는 않지만 내가 ‘거기에 넣어두는’ 것, 일반적인 경험과는 달리 오래 간직하고 보존할 수 있는 것이다.

살해당한 친구, 죄책감과 정신적 외상

친구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살아남은 이에게 어떤 의미일까요. 그것도 친구가 살해당했다면 말이죠. ‘뉴요커’ 전속 작가인 후아 쉬는 <진실에 다가가기>에서 가장 친한 친구의 죽음 뒤 상실과 우정을 회고합니다.

‘켄’은 1998년 살해당했습니다. 쉬는 켄 아파트 발코니 앞을 왜 그냥 지나쳤는지 같은 죄책감에 오래 시달립니다. 켄이 주최한 파티에서 일찍 나와버린 것도 후회가 됐죠. 정신적 외상은 지속했습니다. 특정한 감정을 상기시키는 노래를 피했습니다. 과거를 떠올리게 하는 사람과 함께 있는 시간도 차츰 줄었습니다. 전화하기로 한 친구에게서 전화가 오지 않으면, 그 친구가 죽었을지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경찰서에 전화까지 합니다. “무언가 끔찍한 일이 일어나리라는 생각 때문에 내가 본 사람들의 마지막 모습들을 늘 생생히 기억했다.”

상담사의 조언이 도움이 됐습니다.

나는 다른 누구에게 묻기 두려웠다. 내가 나의 슬픔을 가면 삼아 혼자 뒤처진 지 오래되었기 때문이다. 상담사는 내가 붙잡고 있는 것은 슬픔이 아니라 죄책감이라고, 죄책감을 느껴 봐야 할 수 있는 일이 없으므로 다 부질없는 일이라고 했다. 그 죄책감이 나를 과거에 붙잡아 두고 있다고. 일당은 세 명이었고 그중 한 사람은 총을 가지고 있었다고 이제는 그런 죄책감을 그만 놓아주는 것이 어떻겠냐고.
그런 생각을 안 해봤던 건 아니지만 다른 사람의 말로 직접 들으니 기운이 났다.

우리가 평생 화합에 이끌리는 이유

두 사람은 아시아계 이민자의 후손입니다. 쉬는 대만계, 켄은 일본계죠. 책엔 1990년대 미국의 대중음악 이야기도 많이 나옵니다. 켄은 펄 잼을, 쉬는 너바나를 좋아했습니다. 두 사람은 나중에 두 밴드를 좋아하게 됩니다. 대학 시험공부를 할 때, 너바나의 실황음반 <From the muddy banks of the wishkah>를 같이 듣곤 했습니다. 쉬는 친구들과 함께 차에서 비치 보이스의 ‘God Only Knows’를 따라 부르던 순간을 떠올리며 우정에 관한 이야기를 이어갑니다.

[책에서 건진 문단]사랑하는 이들의 죽음···우리를 내버려 두지 않는 삶 앞에서
우정이 피어나는 계기는 다양하다. 우리는 함께 있으면 즐거운 사람에게 끌릴 수도 있고 같이 있으면 언제나 웃게 되는 사람에게 끌릴 수도 있다. 이해관계를 기반으로 하는 우정도 있을 테다. 그런 관계에서는 상대가 가진 매력이 명확하고, 그 상대가 우리에게 해줄 수 있는 일이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진지한 얘기만 나누는 친구들이 있는가 하면 밤늦도록 술에 취해 웃고 떠들게 되는 친구들도 있다. 어떤 친구는 우리를 더 완전하게 만들고 또 어떤 친구는 우리를 더 나쁘게 물들인다. 친구들과 음악을 들으며 차를 몰아 밤새 영업하는 도넛 가게를 찾아다니는 것만큼 기분 좋은 일이 있을까? 아무 말을 하지 않아도 그 자체로 이상적이다. 물려받은 볼보에 빽빽이 낑겨 타 ‘God Only Knows’를 따라 부르며 그 노래가 끝날 때까지 차에서 내리지 않는 그런 순간들, 바로 그때 비로소 우리가 왜 평생토록 화합에 이끌리는지 이해될지도 모른다.

우정에 관한 철학자들의 말들도 떠올립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청춘의 우정이 언제나 즐거움을 따라 궤도를 돈다고 말했습니다. ‘청춘의 삶’을 두고는 “감정에 이끌려, 즐거움을 주는 대상과 그 순간의 경험을 열렬히 좇기 마련이다. 나이를 먹으면서 즐거움의 대상도 달라지고, 급속도로 친구가 되었다가 또 그만큼 빨리 멀어지기도 한다. 즐거움의 대상이 달라지면서 우정 역시 변한다. 젊은이의 즐거움이란 금방금방 변하기 때문이다”라고도 했죠.

쉬는 아리스토텔레스 말을 이렇게 이어 받습니다.

순간의 경험. 우정의 앞을 내다볼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서로가 점점 나이를 먹고 헤어지리라는 사실을 알고, 어느 날 지금은 상상하지 못하는 이유로 서로가 필요해질 수도 있음을 알 수 있다면, 우리는 우정이 가볍고 일시적이라는 걸 일찌감치 깨닫는다. 우정은 불균형, 보이지 않는 여러 겹, 사소함, 불안감으로 가득하다. 어떤 사람들은 우정이 한결같이 이어져야 한다고 믿고 또 어떤 사람들은 우정이 산발적으로 이어져도 괜찮다고 믿는다. 수년간 서로를 보지 못하다가 다시 만나도 자기들만의 농담이나 대화를 늘어놓을 수 있듯이.
하지만 이 모든 것 이전에는 친해지는 순간이 있다.

어떻게 해야 그를 버리지 않으면서 그대로 버려 두는 걸까

쉬는 데리다의 글에서 켄의 죽음과 관련되는 말을 찾았습니다.

데리다 같은 이론가들의 설명에 따르면, 현대의 삶은 중심을 찾아다니며 삶의 원동력에 의문을 갖는, 원자화된 개인〔atomized individual〕들로 가득하다. 데리다의 글은 복잡하기로 유명하며, 인용과 난해한 용어가 수두룩하다. 하지만 관계를 성찰한 대목은 어느 정도 명확한 편이다. 그는 어떤 글에서 우정의 친밀함은 상대의 눈에서 자신을 알아보는 느낌에 있다고 썼다. 일들은 언제나 ‘이미’ 일어나고 있다. 우리는 계속해서 친구를 안다. 그 친구가 더는 세상에 없을 때에도 여전히. 첫 만남 때부터 내가 친구보다 더 오래 살거나 친구가 나보다 오래 살 거란 사실을 안다. 언젠가 친구를 어떻게 기억할지 이미 상상한다. 울적하게 하려고 꺼낸 말이 아니다. 데리다는 쓰길, 우정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미래를 사랑해야 한다”. 동료 철학자 장 프랑수아 리오타르의 사망 후에 쓴 글에서는 “어떻게 해야 그를 버리지 않으면서 그대로 버려려 두는 걸까” 라고 말한다. 세상을 떠난 친구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는 것이야말로 우정의 궁극적인 표현이 아닐까? 그저 산 자와 산 자의 슬픔에 주목하는 추도에 그치지 않는 것이.

쉬는 추도에 그치지 않으려고 다시 펜을 듭니다. “글 속에서 나 자신을 과거로 다시 돌아가게 하려고 했다.” 책 모서리 여백에 적어 둔 친구들의 말, 낙서를 끄적였던 냅킨 등을 찾았습니다. 쉬는 죽은 켄에게 날마다 편지를 쓰며 모든 것들을 시시콜콜 늘어놓고, 매일매일의 일을 전합니다.

내가 이 모든 것을 늘어놓는 이유는 이것이 심연 위로 다리를 만들어 그 이야기들을 복제하고 말하고, 생각하는 나만의 방법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그것은 유산이자, 켄을 이 순간으로 데려오는 방법이었을 것이다.

E. H.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도 떠올립니다. 쉬는 밑줄 친 “미래만이 과거를 해석하는 열쇠가 될 수 있으며, 오로지 이런 의미에서만 역사의 궁극적인 객관성을 말할 수 있다. 과거가 미래에 빛을 비추고 미래가 과거에 빛을 비추는 것이 바로 역사의 명분이자 이유다”라는 카의 문장을 두고 이렇게 썼습니다. “우리는 카의 이런 생각의 양 끝에 있었다. 켄은 과거에, 나는 미래에.”

기쁨에 굴복하는 게 너를 버린다는 뜻은 아냐

쉬는 이 책을 20년 넘게 써왔다고 말합니다. 친구에게 책을 바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진실된 이야기는 필연적으로 침울하기보다 큰 기쁨을 주게 될테고 기쁨에 굴복하는 게 내가 너를 버린다는 뜻은 아닐 거야. 단지 분노와 증오의 이야기가 아닌 사랑과 의무의 이야기가 되고, 꿈, 한때 미래를 기대했던 기억, 다시 꿈꾸고픈 갈망이 가득할 거야. 지루할지도 몰라. 네가 그 자리에 있어야 할 테니까. 그 이야기는 역사가 아니라 시가 될 거야.

세상을 멈추는 일은 없으리라는 증거 앞에서

<나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경비원입니다>는 형의 죽음에서 비롯된 책입니다. 스물다섯 살 생일을 맞이한 직후 스물여섯이던 형 톰이 암으로 세상을 떠납니다. 세상은 아랑곳없이 잘도 돌아가죠.

몇 달 후, 우리는 필라델피아에 사는 어머니의 네 형제자매를 찾아갔다. 스물여섯 살짜리 아들을 땅에 묻은 후에 자신의 형제자매 그리고 그들의 자녀들과 이야기하는 것이 얼마나 위로가 되는지 혹은 되지 않는지, 또 얼마나 어려운 일일지 짐작이 갈 것이다. 시간을 보내다가 어머니가 좀 더 단순하고 조용한 곳으로 가자고 제안했고 우리 두 사람은 자리에서 슬쩍 빠져나왔다. 차 창문 밖으로 평범한 도시의 삶이 흘러가고 있었다. 거리는 조깅하는 사람, 개를 데리고 산책하는 사람을 비롯해서 누군가에게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일이 벌어졌다고 한들 세상이 멈추는 일이 없으리라는 증거들로 넘쳐났다.

형이 죽고 무력감 때문에 ‘뉴요커’를 그만둡니다. “형이 세상을 떠나고 나자 나는 내가 아는 공간 중 가장 아름다운 장소에서, 떠올릴 수 있는 가장 단순한 일을 하는 일자리에 지원”합니다. 바로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경비원이죠.

[책에서 건진 문단]사랑하는 이들의 죽음···우리를 내버려 두지 않는 삶 앞에서

형의 죽음 뒤 예전 본 그림들은 새로운 의미로 다가옵니다. 어머니가 대학 때 부전공이 미술사였죠. 어린 시절부터 자주 미술관을 다녔습니다. 예전 본 그림 중 하나가 니콜로 디 피에트로 제리니의 ‘무덤의 예수와 성모’죠. “매우 아름답지만 당돌하리만치 죽은 게 확실한 젊은이를 그의 어머니가 온몸으로 받치고 있는 장면”을 담았습니다. ‘피에타’ 또는 ‘통곡’이라는 부르는 장르에 들어가는 그림입니다. 형의 죽음 뒤 어머니와 함께 다시 이 그림을 봅니다.

위대한 그림은 거대한 바위처럼 보일 때가 있다

어머니는 늘 잘 울었다. 결혼식에서나 영화관에서나 눈물을 흘리곤 하는 사람이었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싼 채 어깨가 흔들리고 있었다. 나와 눈이 마주쳤을 때 그녀가 심장이 부서지는 동시에 충만해져서 그렇게 울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그림이 어머니 안의 사랑을 깨워서 위안과 고통 둘 다를 가져다주었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경배’를 할 때 아름다움을 이해한다. ‘통곡’을 할 때 ‘삶은 고통이다’라는 오래된 격언에 담긴 지혜의 의미를 깨닫는다. 위대한 그림은 거대한 바위처럼 보일 때가 있다. 말로 표현하기에는 너무 냉혹하고 직접적이며 가슴을 저미는 바위 같은 현실 말이다.

브링리는 미술관에서 10년을 일합니다. 그가 미술관 경비원으로서 수행한 마지막 임무는 바로 맨 처음 미술관에 갔을 때 배운 일입니다. 20여 년 전 어머니는 시카고 미술관에서 자녀들에게 가장 마음에 드는 작품을 고르라고 했죠.

프라 안젤리코,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 출처: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프라 안젤리코,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 출처: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브링리는 20년 뒤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소장품 중 프라 안젤리코의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를 고릅니다. “너무도 고통스럽지만 이 그림이 톰을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 좋았죠. 죽음과 삶에 관해 생각합니다.

예수의 몸은 태풍에 요동치는 배의 돛대에 못 박힌 것처럼 보인다. 그를 중심으로 나머지 세상이 흔들리며 돌아가고 있는 듯하다. 우아하면서도 부서진 몸은 뻔한 사실을 다시 상기시킨다. 우리가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이라는 것, 고통 속의 용기는 아름답다는 것, 상실은 사랑과 탄식을 자극한다는 사실 말이다. 그림의 이런 부분은 성스러운 기능을 수행해서 우리가 이미 밀접하게 알고 있으면서도 불가해한 것에 가닿게 해준다.
그러나 안젤리코 수사가 묘사한 것은 예수의 몸뿐만이 아니다. 그는 십자가의 발치에 뒤죽박죽으로 모여 있는 구경꾼 한무리를 상상했다. 옷을 잘 갖춰 입은 사람, 말을 타고 있는 사람 등등 꽤 많은 구경꾼들의 얼굴에는 놀라우리만치 다양한 반응과 감정들이 떠올라 있다. 침통해하는 사람들, 호기심을 느끼는 사람들, 지루해하는 사람들, 심지어 다른 곳에 신경이 팔려 있는 사람들도 있다. 옛 거장들의 그림에서 자주 보이는 리얼리즘이다. W. H. 오든의 시 「뮤제 데 보자르Musee des Beaux Arts(미술관)」에도 나와 있듯 “끔찍한 순교”가 벌어지는 와중에도 어떤 사람은 음식을 먹고, 창문을 열고, 별생각 없이 그 옆을 걸어간다. 나는 사람들이 몰려 있는 가운데 부분이 혼란스러운 일상생활을 제대로 표현한다고 생각한다- 디테일로 가득하고, 모순적이고, 가끔은 지루하고 가끔은 숨 막히게 아름다운 일상. 아무리 중차대한 순간이라 하더라도 아무리 기저에 깔린 신비로움이 숭고하다 할지라도 복잡한 세상은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돌아간다. 우리는 삶을 살아가야 하고, 삶은 우리를 내버려 두지 않는다.

삶은 우리를 내버려 두지 않는다

브링리가 더 주목한 건 그림 하단입니다.

거기에는 슬픔에 겨워 쓰러진 어머니를 돌보는 연민 가득한 사람들이 있다. 수동적인 구경꾼들과 달리 그들의 마음은 같은 방향, 즉 선행으로 향하고 있다. 그림의 이 마지막 부분은 따르고 싶은 모범이다. 내 앞에 펼쳐진 삶에서 나를 필요로 하고, 내가 필요한 경우들이 있을 것이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고, 다른 이들도 나를 위해 그렇게 해줄 것이라는 게 나의 희망이다. 이제 형은 세상에 없다. 나는 그 상실을 느낀다. 형은 그림에서 성모 마리아를 돌보기 위해 정신을 바짝 차린 채 몸을 굽히고 있는, 칭찬받아 마땅한 현실적인 사람들 중 하나일 것이다. 하지만 내 마음속에는 지금도 형의 초상화, 티치아노가 그린 듯한 밝고, 솔직한 형의 얼굴이 선명하게 살아 있고, 그 모습에서 나는 위안을 찾는다. 이 그림이라면 확실히 내가 메트 바깥으로 품고 나갈 수 있을 것이다.

삶과 예술에 관한 생각을 경비원 일과도 연결하죠.

때때로 삶은 단순함과 정적만으로 이루어져 있을 때도 있다. 빛을 발하는 예술품들 사이에서 방심하지 않고 모든 것을 살피는 경비원의 삶처럼 말이다. 그러나 삶은 군말 없이 살아가면서 고군분투하고, 성장하고, 새로운 것을 창조해내는 것이기도 하다.

책은 미술과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이야기도 많습니다. 브링리는 몇 가지 안내도 합니다.

대다수 작품의 고해상도 이미지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홈페이지(metmuseum.org)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작품 취득 번호(예를 들어 “29.100.6”)로 검색하면 좋습니다. 책 뒷장 그림 취득 번호 목록을 적어뒀습니다. 브링리는 자기 홈페이지(patrickbringley.com/art)에서도 목록과 함께 미술관 페이지를 링크해뒀습니다. 미술관 공식 출판물은 metmuseum.org/art/metpublications에서 무료로 읽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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