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롭힘 경험자 10.9% ‘극단적 선택 고민’
위기 심각한데 사용자·회사 조치 ‘부적절’
“정부, 괴롭힘 판단기준 후퇴시키면 안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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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한 업무 분장을 거부하면 찍히고, 순순히 업무를 받으면 스트레스를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일을 해야 하는 분위기입니다. 악몽, 우울, 불안, 극단적 선택 충동에 치료를 받고 있습니다.”
“다른 간호사들이 자기들끼리 쪽지를 주고받으며 제 험담을 합니다. 직장 내 괴롭힘으로 왜 극단적 선택을 하는지 이해가 됩니다. 밥도 먹지 않고 종일 집에서 눈물만 흘리고 있습니다.”
직장 내 괴롭힘 피해자 10명 중 1명이 극단적 선택을 고민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괴롭힘 피해를 자주 볼수록 극단적 선택을 생각하는 비율은 늘었고, 2021년에는 정신질병 사망 산재 신청만 158건이 접수됐다.
노동인권단체 직장갑질119는 지난 9월4일부터 11일까지 직장인 1000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진행한 결과, 지난 1년 동안 괴롭힘을 경험한 응답자의 10.9%가 괴롭힘으로 인해 극단적 선택을 고민했다고 26일 밝혔다. 조사는 여론조사전문기관 엠브레인퍼블릭이 수행했고 95% 신뢰수준에 표본오차 ±3.1%포인트다.
직장갑질119는 지난 1월부터 11월20일까지 단체가 접수한 신원이 확인된 제보 중 53건에 극단적 선택을 언급하거나 관련 내용이 포함됐다고 밝혔다. 극단적 선택 생각·시도에 관한 제보가 48건, 직장 동료의 극단적 선택을 인지·목격했다는 제보가 4건, 당사자 유족의 제보가 1건이었다.
직장인들은 심각한 심리적 위기를 호소했다. 직장인 A씨는 “인신공격과 모욕을 당하며 우울증과 공황장애가 왔다”며 “이제 자살이 무섭지도 않습니다. 숨이 막혀온다”고 했다. B씨는 “은근한 괴롭힘, 차별, 무시에 정신과도 가고 극단적 선택 충동도 느껴져 자살예방센터에 전화한 적도 있다”며 “손님을 응대하면서도 눈물을 보이거나 잠도 제대로 못 이루는 등 지옥 같은 시간을 보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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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자를 보호해야 할 의무가 있는 사용자·회사는 제대로 된 조치를 하지 않았다. 직장갑질119 조사 결과 괴롭힘 경험자 19.2%는 ‘사용자(대표·임원·경영진)가 괴롭힘 행위자였다’고 답했다. 직장 내 괴롭힘을 신고해 본 응답자 중 ‘회사가 조사조치 의무를 제대로 지켰다’는 응답은 32.1%에 그쳤다. ‘신고를 이유로 불리한 처우를 경험했다’는 응답은 26.8%에 달했다.
괴롭힘으로부터 보호받지 못하는 상황이 직장인들을 더 큰 위기로 내몰고 있다. 직장인 C씨는 “노동청에서 괴롭힘 인정을 받았지만 회사가 가해자와 분리조치를 해 주지 않아 1년 넘게 가해자와 같이 근무하고 있다”며 “제가 죽으면 가해자들이 잘못을 인정할까 하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직장 내 괴롭힘과 극단적 선택의 연관성은 다른 조사에서도 드러났다. 2017년 국가인권위원회의 ‘직장 내 괴롭힘 실태조사’ 보고서를 보면, 최근 1년간 직장 내 괴롭힘 경험이 없다고 답한 직장인 중 극단적 선택을 생각한 비율은 7.7%였는데 1주에 1회 정도 괴롭힘을 당한다는 직장인의 극단적 선택 생각은 20.6%로 3배 가까이 늘었다. 거의 매일 괴롭힘을 당한다는 직장인은 33.3%가 극단적 선택을 생각했다. 실제 극단적 선택 시도도 괴롭힘 경험이 없는 직장인은 1.5%였지만 1주 1회 괴롭힘 경험자는 6.0%, 거의 매일 괴롭힘 경험자는 10.6%로 크게 뛰었다.
용혜인 기본소득당 의원실이 근로복지공단으로부터 받은 정신질병 사망자 산재 현황 자료를 보면 2021년 정신질병 사망 산재 신청 건수는 158건으로, 2~3일에 1건꼴로 접수됐다.
정부, ‘괴롭힘 판단기준 명확화’ 논의
“판단기준 후퇴” 우려 제기…이유는?
정부는 직장 내 괴롭힘 판단기준을 명확히 하는 논의를 진행 중이다. 이정식 고용노동부 장관은 지난 1일 청년 노동자 간담회에서 “직장 내 괴롭힘 판단 기준을 명확히 하고, 노동위원회를 통한 조정·중재 도입 등 실효성 있는 제도 개선을 추진하겠다”며 논의 추진을 공식화했다.
이정식 고용노동부 장관이 지난 1일 오전 서울 마포구 북카페 ‘채그로스페이스’에서 청년 노동자들과 간담회를 갖고 있다. 노동부 제공
지난 3월 한국직업능력연구원이 노동부의 연구용역을 받아 제출한 ‘직장 내 괴롭힘 분쟁 해결 방안 연구’ 보고서는 괴롭힘의 유형을 단 한번만으로도 괴롭힘이 성립되는 ‘일회성 행위’와 그렇지 않은 ‘지속·반복적 행위’로 구분했다. 이어 ‘지속·반복적 행위’의 인정 기준을 ‘3개월 이상 지속, 평균 주 1회 이상 반복’으로 두는 방안을 언급했다. ‘일회성 행위’의 예시로는 퇴사 강요, 신체적 폭력, 욕설 등이, ‘지속·반복적 행위’의 예로는 업무·휴식에 대한 감시, 업무능력·성과 미인정 및 조롱, 훈련·승진·보상·일상 중 차별, 힘들고 꺼리는 업무 몰아주기 등이 제시됐다.
보고서를 작성한 서유정 한국직업능력연구원 연구위원은 지난 10일 노동부가 후원하는 ‘한국괴롭힘학회’ 창립기념 학술대회에 발제자로 나서 “최근 한국에서는 허위신고가 이슈가 되고 있다. 직원의 가족이 구체적인 사실관계가 없는 감정적 주장을 하거나, 피해자라는 이유로 수개월 유급휴직을 하거나 ‘을질’을 하는 경우도 발생하고 있다”며 기준 개편 필요성을 언급했다.
노동부는 “해당 보고서는 연구자 개인의 의견”이라며 “정부가 ‘주 1회, 3개월 지속’ 등을 검토한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며, 다양한 의견과 현장 사례 등을 종합적으로 검토해 보완방안을 마련할 예정”이라고 했다. 노동계는 판단 기준 강화와 허위신고 대책 등은 경영계에서 오랫동안 제기해 온 주장인 만큼 우려를 거두지 못하고 있다.
직장갑질119는 “(보고서에 담긴 주장은) 괴롭힘 행위의 지속성과 반복성을 개념 정의 규정에 명시해야 한다는 한국경영자총협회(경총)의 주장과 결을 같이 하는 것으로 사실상 죽기 직전까지 참으라는 지침이나 다름없다”며 “괴롭힘으로 인한 죽음을 막기 위해서는 허위신고로 회사를 운영하기 어렵다는 사용자들의 주장이 아닌, 죽음을 고민하는 피해자들의 호소에 먼저 귀를 기울여야 한다”고 했다.
최승현 직장갑질119 노무사는 “(판단 기준 강화는) 피해자들을 더욱 고립 시켜 극단적 선택 가능성을 높이는 최악의 조치이자 국가의 책임 방기”라며 “괴롭힘 금지법 제정은 직장이 더욱 안전한 공간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을 심어줬다. 괴롭힘 인정 요건 강화로 희망을 꺾어서는 안 된다”고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