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꽉 껴안는다

[김해자의 작은 이야기] 꽉 껴안는다
당신은 머리를 적시며

물의 온도가 어떤지 묻는다

삼단처럼 탐스러운 머리카락들

풍만하고 부드러운 거품들


당신의 긴 손가락들이 한꺼번에

머리카락 사이로 밀려온다


두피를 문지르며 당신은

밤이 오면 용접공이 된다고 속삭인다


나는 눈을 감고

일렁이는 푸른 불꽃을 더듬는다


낮이나 밤이나 당신은

아름다움을 만들어 내는군요


당신 손등의 어렴풋한 흉터가

선명하게 떠오른다


아담한 두상을

당신의 두툼한 손바닥이 꽉 껴안는다


뜨거운 숨결이 훅 불어오고

나는 푸른 불꽃 속으로 들어간다

- 시, ‘머리를 감는 동안’ 김선향 시집 <F등급영화>



어제는 청년들 몇이 집에 다녀갔다. 충북 옥천과 지리산 자락에 산다는 감자, 팔매, 아라 등과 강아지까지 여섯 명이 놀러와서 너댓 시간 동네를 젊게 물들여 놓았다. 농촌에서 오래 살아온 어른들께 궁금한 것들이 많다 했다. 미리 부탁해둔 언니들 댁도 두 곳 방문하고, 우리집에 함께 와서 본격적인 이야기보따리를 풀었다.

여든넷인 맹대열 어머니는 학생 신분을 마감한 지 오래인 30·40대 청년들에게 대뜸 ‘학생’이라 불렀다. 이짝에서 주고 저짝에서 빼간다는 기초수급 얘기며, 김대중 선생 버스기사며, 흙탕물 미꾸라지 이야기를 들으며 청년들은 재밌어 했다. 반쯤이 웃음으로 채워졌을 영상도 찍었다. 양승분씨는 힘든 것도 좋은 것도 다 사람 때문이라며, 일 힘든 것은 아무것도 아니라 했다. 몇년 전까지만 해도 김장도 같이하고, 서로 나눠 먹으며 웃음꽃 피우던 날들을 전해주며 눈시울을 적셨다.

청년들이 기본소득에 대해 묻자, 내가 들은 이야기부터 전했다. 배울 만큼 배운 젊은이가 식당 일 나가는 엄마한테 나 차비 좀, 나 밥값 좀 달라고 할 때 얼마나 자존심 상하고 미안하겠냐고. 그깟 20만~30만원 주는 게 뭐가 도움이 되냐고 물을지 모르지만, 그 돈이면 손 안 벌리고 일단 집을 나설 수 있다고. 그 종잣돈이면 친구 만나 밥 먹고 놀다, 친구 따라 알바도 할 수 있다고. 만국의 백수여, 당당하라고. 백수는 부끄러운 흰 손의 백수(白手)가 아니라, 손 벌리는 곳마다 달려가 그들의 손이 되어 준 백수(百手), 백개의 손이라고. 선심 쓰듯 주지 말고 봉사도 노동도 강제하지 말라고. 만인에게 만인의 것을 돌려주는 기본소득은 공생과 자치와 협조의 공동체적 우정을 만들어가는 최소한의 안전판이라고. 가난과 사랑과 고독과 자유를 어찌 수치로 잴 수 있냐고. 서로를 갈라치는 선별적 복지처럼 서류 더미로 불운을 판정하지 말고, 구걸하듯 불행을 꾸미지 않게 하라고. 받기 위해 주는 자는 서로를 타락시키므로. 그러므로 만국의 백수여, 단결하자고. 각자….

문뜩 이상해서 고개를 돌렸더니 바로 내 옆에 있는 팔매씨 눈자위가 빨개져 있었다. 팔매씨 어깨에 가만히 손을 얹고 있다, 왼쪽을 보니 수림씨 눈에도 눈물이 맺혀 있었다. 바로 옆인데도 청년들이 울고 있다는 걸 알아채지 못하다니. “밤이 오면 용접공이 된다고 속삭”이는 소리를 들었는가. 보았어도 알아채지 못한 “손등의 어렴풋한 흉터”들이여. 나는 당신들에게 “머리를 적시”며 “물의 온도가 어떤지” 물으며 살긴 하는가,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가을비가 추적추적 내렸다. 울었지만 젖었던 흔적이 없는 청년들이 씩씩하게 집을 나섰다. 여름내 땅속에서 붉게 자라준 고구마를 담은 봉지를 들고. 양승분씨가 바리바리 담아 놓은 배추 몇 포기씩 챙겨서. 나는 뒤늦게야 내 딸아이랑 동갑인 그 청년들이 밤새워 고투한 “일렁이는 푸른 불꽃을 더듬”는다. 그리고 8년8개월 같은 직장에서 근무하다 어느 날 갑자기 때려치운 내 딸아이의 숱한 밤들을 상상한다. 당신들의 머리를 내 “두툼한 손바닥이 꽉 껴안는다”. 나는 그 “푸른 불꽃 속으로 들어간다”.

김해자 시인

김해자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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