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미나의 경계에 살다] 전쟁의 비극은 사상자 수 너머에 있다…삶과 역사에 깊숙이 박힌 채](https://img.khan.co.kr/news/2023/12/01/l_2023120201000008300001882.jpg)
사소한 일
아다니아 쉬블리 지음 | 전승희 옮김
강 | 172쪽 | 1만5000원
지난달 29일 찬 바람이 쌩쌩 부는 저녁 8시 서울 중구의 주한 이스라엘 대사관 맞은편에는 팔레스타인 청소년의 증언을 낭독하기 위해 모인 사람들이 있었다. 팔레스타인 아슈타르 극장은 세계 전역의 공연예술인에게 11월29일 국제 팔레스타인 연대의 날에 ‘가자 모놀로그’를 공개 낭독하고 상연해줄 것을 요청했고, 수요일 행사는 이에 응답한 한국의 런더앤싸이트닝, 안티무민클럽AMC, 지금아카이브가 마련한 자리였다.
2008~2009년 이어진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공격이 중단된 후, 2010년 7월 아슈타르 극장은 가자지구 청소년들이 자신이 경험한 전쟁에 대해 남긴 증언을 수집해 ‘가자 모놀로그’를 만들어 전 세계에 무료로 배포했다(한국어 버전의 글은 www.gazamonologues.com/copy-of-team에서 확인할 수 있다).
전쟁을 경험한 아이는 어떤 목소리로 말할까? 낭독을 하는 사람은 으레 특정한 종류의 정서를 전제하고 글을 읽어내려가기 마련이다. 모인 이들은 때로는 슬프게, 때로는 비장하게, 때로는 덤덤하게 글을 읽기 시작했다. 그 목소리에서 읽히는 정서는 듣는 이가 점차 알게 될 증언의 내용과 어울리기도, 어울리지 않기도 했다. 내 생각에 더 중요한 순간은 후자였다. 그러니까 우리가 전쟁 생존자의 증언을 듣기 위해 비통한 마음을 준비해둘 때 가자시의 셰이크 라드완에 사는 1996년생 야스민 카트베흐는 2023년 서울에서 추위에 떨고 있는 한국인의 입을 빌려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전쟁이 끝나고, 내 안에 많은 것이 달라졌어. 난 사물을 다르게 보기 시작했어. 이 도시를 좋아하기 시작했고, 삶이 더욱 아름답게 느껴졌으며 나 자신 또한 그렇게 느껴졌어. 친구들도 달라졌고, 나이가 더 많고 더 성숙한 친구들을 새로 사귀게 되었어. 아빠 앞에서도 용감하고 거침없이 말하기 시작했고, 누구와도 상대할 수 있게 됐지. 엄마와는 친구가 되어 자주 밤을 새우며 모든 것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어. 만약 내가 미래에 어른이 된다면 말이야 -가자에서 어른이 되는 건 그 자체로 성취니까, 죽음이 늘 문 앞을 지키고 서 있어서- 난 아이들을 보호하고 아이들의 권리를 지켜주는 사람이 되고 싶어. 팔레스타인 애들은 노인으로 태어나는 것만 같다는 느낌이 들거든. 여섯 살 된 아이가 가족을 돌보기도 하고.”
‘가자 모놀로그’에 수록된 31개의 증언은 하나의 주제로 요약될 수 없었고, 내게 이것은 사망자의 숫자에만 초점이 맞춰진 전쟁에 대한 재현의 가장 대척점에 있는 것으로 여겨졌다. 그렇다면 더 이상 증언을 할 생존자가 없는 사건의 경우에는 어떠한가?
팔레스타인 출신 작가 아다니아 쉬블리의 소설 <사소한 일>은 70만명 이상의 팔레스타인인들이 강제로 고향에서 폭력적으로 추방당한 사건, 팔레스타인인들은 ‘나크바’(대재앙)라는 이름으로 애도하지만 이스라엘인들은 독립전쟁이라는 이름으로 경축하는 바로 그 전쟁 1년 후인 1949년 여름으로부터 시작된다. 그해 여름 이스라엘 병사들이 팔레스타인 소녀 한 명을 생포해 강간한 뒤 살해해 사막에 매장한다. 이후 사건은 잊힌다. 25년 뒤 망각 속에 묻힌 이 ‘사소한 일’에 대해 우연히 알게 된 팔레스타인 여성은 자신이 태어난 날과 정확히 같은 날 이 사건이 벌어졌다는 이유만으로 이 사건에 사로잡히고 진실을 추적하기 시작한다.
<사소한 일>은 여러 면에서 독특한데 첫째로 시점의 사용과 전개 방식이 눈에 띈다. 1부는 이스라엘 점령군 소대장의 행동을 삼인칭 시점으로 매우 건조하고 객관적으로 묘사하는 데 반해 2부는 25년 후 소녀의 사건에 기이할 정도로 이끌리는 한 팔레스타인 여성의 행동과 생각을 일인칭 시점으로 주관적으로 보여준다. 곧 작가는 희생자인 소녀의 목소리를 대변하거나 그 진실을 직접 밝히는 대신(작가는 그런 진실을 보유하고 있지 않다) 이미 망각된 사건을 추적하는 두 가지 방식을 보여준다.
둘째로 기승전결의 전개 구조를 따르고 있지 않다. 이 소설에는 이야기의 완결이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 계속해서 반복되는 현실세계의 역사처럼 그렇다. 셋째로 세부사항이 끊임없이 나열된다. 소녀가 강간 살해되는 장면만큼이나 책상 위에 내려앉은 먼지나 개 짖는 소리를 묘사한 문장이 비중 있게 다뤄진다. 살인자인 소대장에 대한 묘사 역시 디테일해서 그에게 친밀감까지 느낄 정도이다.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팔레스타인 땅에서 벌어지는 비극은 오랜 시간 동안 반복해서 일어나고 있으며 외부의 사람들에게 전달되는 과정에서 끊임없이 왜곡된다. 우리에게 최종적으로 전달되는 타인의 고통은 사상자 숫자로 압축되거나, 내 편 네 편을 가르는 정치적 선동으로 이용되거나, 지적인 사람들의 정의감을 전시하기 위해 쓰인다. 이때 작가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소설 <사소한 일>은 오랫동안 침묵을 강요받아온, 언어를 빼앗길까봐 악몽을 꾼다는 한 작가의 대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