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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절과 미소 뒤에 있는 것들

입력 2023.12.05 20:28

<히든 피겨스>는 흑인 차별이 극심하던 1960년대 초반 미국 항공우주국(NASA)에 입사하여, 수많은 난관을 이겨내고 최고의 수학자로 인정받게 된 여성의 실화를 바탕으로 만든 영화다. 분노 유발 차별 장면들 중에서도 가장 어이없고 가슴 아팠던 것은, 사무실에서 800m나 떨어진 흑인여성 전용 화장실을 오가기 위해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질주하는 모습이었다. 이토록 열악한 환경을 꿈에도 모르는 백인 남성 상사는 업무시간 중에 너무 오래 자리를 비운다며 질책을 하고, 설움에 북받친 주인공이 결국 울분을 터뜨리며 항변한다. 충격을 받은 상사가 건물 내의 ‘백인전용’이라 쓰인 화장실 표지판을 깨부수는 장면은 10년 체증이 해소되는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한다.

“인간이 달에 가는 것보다 흑인과 백인이 한 교실에 있는 것이 더 요원하다”던 시대에나 있었을 “자유로운 오줌권 박탈”의 문제. 그런데 21세기의 대한민국에도 그 같은 현실이 펼쳐지고 있는 것을 아는 사람은 매우 드물 것 같다.

소외된 집단의 생활환경과 건강의 관련성을 연구해 오신 김승섭 교수의 저서 <타인의 고통에 응답하는 공부>에는 “백화점 면세점 화장품 판매직 노동자의 근무환경”이 소개된다. 고급스럽고 쾌적하게만 보이는 백화점 매장의 이면은 충격적이었다. 고객의 화장실을 이용할 수 없는 직원들은 건물 지하나 멀리 떨어진 곳에 하나쯤 있는 데다 오래 기다려야 하는 화장실 왕복을 극히 자제했다. 생리대 교체도 제 시간에 못해 피부질환이나 우울증세를 겪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병원 중환자실에서 일했던 21년차 간호사 역시 비슷한 증언을 한다. 부족한 인력과 장시간 노동 속에서 화장실 갈 짬이 나지 않아 성인용 기저귀를 차고 근무했다는 것이다.

책에는 저자와 마찬가지로 일평생 여성의 노동 환경에 대해 연구해 온 캐나다 퀘벡대학교의 명예교수 캐런 메싱과의 대담 장면이 있다. 메싱 교수는 “사람들은 건설 노동자가 추락해서 부상당하는 것은 중요한 문제로 여기지만, 여성들이 주로 맡고 있는 서비스나 감정노동으로 인한 정신적, 신체적 질병에 대해서는 무관심하다”고 말한다. 깊이 동의한다. 사회건 가정이건 감정노동이나 돌봄과 관련된 일들은 여전히 여성들이 다수다. 하지만 소속 노조도 없는 이러한 노동의 대부분은 제도적으로 개선하거나 구제를 요청할 방법이 마땅치 않을 때가 많고, 산업재해 보상도 어렵다.

홀로 계신 엄마를 모시면서 변화되는 감정과 사고에 대해 SNS(사회관계망서비스)에 글을 올린 적 있다. 노쇠하고 병약해지는 모습을 접하며 살다보니 허무함·우울감 같은 감정이 자주 들고 사회적 의욕도 저하되는 것 같다는 내용이었다. 놀란 것은 이에 공감하는 무수한 댓글이었다. 같은 이유로 마음고생을 겪었거나 겪고 있는 이야기, 치매 노인을 간병하며 우울증이 깊어져 극단적 선택을 하거나 입원하게 된 사례까지. 간혹 남성들도 있지만 대부분 중년 여성들이다. 돌이켜보니 엄마도 돌아가시기 몇년 전부터 치매를 앓으셨던 할머니를 모셨는데, 그 수고를 모르진 않았지만 직장생활로 바빴던 때라 얼마나 힘드셨을지를 다 헤아리지는 못했다. 인간은 가장 가까운 이의 아픔도 온전히 이해할 수 없고, 비슷한 경험을 통해서만 다가갈 수 있는 부실한 존재다.

위험하고 열악한 근로환경에 노출된 무수한 노동자들의 삶은 끊임없이 개선되어야 한다. 더불어 겉으로는 안전하고 때로는 고급스러운 환경 뒤에서, 정작 자신의 몸과 마음은 잠식되어가고 있는 무수한 감정노동자, 조용한 돌봄자들의 삶 또한 세심하게 배려하는 사회가 되길 바란다. 2023년 한 해도 저물고 있다. 희망적인 소식은 별로 없지만, 그런 삶을 이나마 지탱하게 만드는 그늘 속 주변인들의 친절을 돌아보며 서로가 감사를 표하는 연말을 만들어 보면 어떨까 싶다.

박선화 한신대 교수

박선화 한신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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