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보람과 효능감을 느끼는 일은 젠더, 빈곤, 장애, 불평등에 대해 사회적 의미를 생산해내는 말하기와 글쓰기, 그 의미를 구현하는 공동체를 위한 프로젝트 기획이다. 고연봉은커녕 풀타임 고용도 안 되니까, 생계 노동도 병행해왔다. 후자를 할 땐 뭔가를 ‘꺼둬야’ 했다.
올해 주된 생계 노동은 서울대형 RC(기숙형 대학) 사업을 개시하는 LnL시범사업단 근무였다. 거의 신입생 270여명의 생활, 학습 지도를 맡은 대학원생 조교로 일했다. 처음엔 충실한 직장인으로 일할 작정이었다. 학생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저는 사업단의 수족이에요.
학기 초에 꼬마 퀴어 커플이 찾아와 말했다. 여긴 안전하지 않은 느낌인데, 조교님은 어른이잖아요.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요?
속으로 생각했다. 아이고. 여긴 다양성이 멸종한 공동체니까 그렇지. 결국 소수자 관점의 서사(김초엽), 이성애 결혼-가족 제도 밖 늙음과 죽음(한채윤), 의료 보건 중심 양적 연구의 한계(김새롬), 장애운동의 역사와 의미(변재원)를 다루는 특강형 연속 세미나 ‘다양성 탐구’를 기획하고 말았다.
이 칼럼을 쓰는 건 마지막 특강 때문이다. 한 학생이 자폐스펙트럼 장애를 드러낼 때의 불이익, 낙인에 대한 불안감을 익명 메모로 제출했다. 잠깐 고민하다 내가 당사자란 걸 밝히고 반갑다는 댓글을 달았다.
그런데 그날 ‘커밍아웃’한 건 나뿐이라 자폐인 대표가 되고 말았다. 뻔한 당사자 얘기를 했다. 어릴 때부터 사회와 인간에 대해 지대한 관심이 있었지만 스스로 자폐라고 생각해본 적은 없었단 것, 어릴 때보다 지금 ‘사회생활’을 더 잘하지만 그것은 인간을 수없이 만나 배운 것이고 집에 가면 매우 피곤하다는 것(자폐인의 ‘마스킹’), 논의가 발전해 이전보다 사회구조와 연계되어 자폐의 설명 방식이 다양해졌단 것, 최근 연구에 따르면 자폐는 무엇의 결핍만이 아니고 다른 것이 ‘있음’이라는 것. 말하면서도 생각했다. 아마 여기도 더 많을 텐데.
실은 생계 노동에서 ‘꺼둬야’ 하는 부분, 사람에 대해 너무 많은 것을 알아채고 기억하고, 되도록 모두를 소외시키지 않으려 하고, 남들이 연결시키지 않는 것들을 한 프레임으로 읽어내 문제의 근본적 해결을 고민하는 나의 특성을 신경 다양인의 특징과 연결해 이해한다.
나는 사람을 자폐와 자폐 아님으로 나누어 인식하곤 하는데, 누군가 어떤 능력이 ‘없어서’ 정말로 말이 안 통하기도 하지만, 그게 ‘있어서’ 매끄럽게 소통되는 사람도 꽤 많다. 그들에게 진단명이 있든, 없든. 미국의 자폐스펙트럼 장애 유병률은 36명당 1명으로, 매년 늘고 있다(2022 질병통제예방센터). 한국은 약 2%로 잡힌다.
이 부분은 꼭 적어두고 싶다. 그간 장애를 드러내는 게 피곤하고 불리할 것 같단 ‘느낌’이 들 때가 있었는데, 곱씹어보면 정치와 정책을 다루는 영역에서 그랬다. 자폐인에게 유독 피곤하고 불리하단 ‘느낌’을 주는 영역과 거기서 주류가 되는 사람들의 특성이 있다. 그걸 살펴보면 귀납적으로 비자폐인의 ‘결핍’도 정의할 수 있지 않을까? 사회적으로 비자폐인이 노력해야 하는 방향도 제시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