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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회 세계 인권의 날, 인권위 현주소는①

벼랑 끝에 선 진정인들, 인권위 문 두들겼지만 상처만 남았다

세계인권선언 75주년 기념식이 열린 서울 종로구 역사박물관에서 8일 경로이탈 국가인권위원회 바로잡기 공동행동 회원들이 김용원, 이충상 상임위원의 사퇴와 인권위를 설립 정신 기억 등을 촉구하는 침묵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한수빈 기자

세계인권선언 75주년 기념식이 열린 서울 종로구 역사박물관에서 8일 경로이탈 국가인권위원회 바로잡기 공동행동 회원들이 김용원, 이충상 상임위원의 사퇴와 인권위를 설립 정신 기억 등을 촉구하는 침묵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한수빈 기자

국가인권위원회에는 인권침해를 당했다는 진정인들이 문을 두들긴다. 성희롱, 경찰의 과잉진압, 장애인 차별, 고용 형태에 따른 차별대우 등 피해 내용은 다양하다. 진정인 중에는 사법제도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 했지만 제도의 미비나 인권 감수성이 부족한 판단 등으로 인해 피해를 구제받지 못한 사람도 있다. 이들은 인권위가 사법부나 수사기관과 다르게 인권침해 사건을 조사하고, 인권침해가 발생한 기관이 적절한 시정 조치를 하도록 권고나 의견표명을 하길 바라며 인권위에 진정을 넣었다.

1948년 유엔의 세계인권선언 채택을 기념해 만든 ‘세계 인권의 날’인 10일, 한국 인권위의 모습은 여느 때와는 다르다. 인권위를 찾은 진정인들이 인권위로부터 외면당한 사례가 하나둘씩 쌓여가고 있다. 인권위 침해구제 1위원회는 4개월 가까이 열리지 않았다. 인권위 상임위원이 시민단체에 손해배상 민사소송을 제기하거나 경찰에 군사망 유가족에 대한 수사 의뢰를 하는가 하면, 혐오 발언의 주체가 되기도 했다. 인권위에 도움을 요청했다가 오히려 상처받은 진정인 4명의 이야기를 지난 4일부터 9일까지 들어봤다.

차헌호 ‘비정규직 이제그만 공동행동’ 집행위원은 지난 6개월을 기다림의 시간으로 기억했다. 차 집행위원은 지난 5월 서울 서초구 대법원 앞 야간문화제를 진행할 당시 경찰이 집회 참가자들을 과잉 진압했다는 취지로 인권위에 진정을 제기했다. 지난 7월에도 경찰이 광화문 인근 야간문화제를 강제로 해산시켰다며 추가로 진정을 넣었다.

인권위에서 결정이 나올 때까지 길어야 2개월 정도 걸릴 것으로 봤던 그의 예상은 빗나갔다. 차 집행위원의 진정은 4개월이 지나도록 위원회에서 논의조차 되지 않았다. 경찰에 의한 인권침해 진정을 담당하는 침해구제 1위원회가 사실상 ‘개점 휴업’ 상태였기 때문이다. 침해구제 1위원장인 김용원 상임위원은 사무처 직원과의 갈등을 이유로 넉 달가량 위원회를 열지 않다가 지난 7일에서야 위원회를 열었다.

그 사이 경찰의 과잉 진압은 계속됐다. 차 집행위원은 “진정 이후 총 세 차례 충돌이 있었다. 모두 전면 차단 형식으로 집회 자체를 열지 못하게 했다”면서 “경찰이 참가자들을 마구잡이로 끌어내다 보니 인대가 늘어나거나 기절하는 사람도 나왔다”고 했다. 차 집행위원도 경찰에 끌려나가다 한 차례 실신해 병원에 입원했다. 그는 “경찰의 강경 진압을 인권위가 사실상 용인해준 꼴”이라고 말했다.

차 집행위원은 인권위에서 피해자들의 목소리가 지워지고 있다고 했다. 그는 “내부에 어떤 불만이 있든 없든 (인권위원은) 최소한 자기가 맡은 역할은 해야 하는 것 아니냐”면서 “인권위의 결정이 나오기 전까지 인권침해가 계속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 결정을 계속해서 미룬 것은 진정인에 대한 2차 가해”라고 했다. 그는 “인권위의 판단은 사법부의 판단보다 빨리 이뤄져야 의미가 있다”며 “경찰의 집회 해산 과정에서 참가자들의 권리가 침해되지 않았는지를 판단하는 게 그리 어려운 일인지 되묻고 싶다”고 했다.

“군인권보호관, 유가족이 준 권한으로 유가족 상처 헤집어”

윤승주 일병 매형 김진모씨. 본인 제공

윤승주 일병 매형 김진모씨. 본인 제공

군인권보호관을 겸직하고 있는 김 상임위원은 2014년 선임에게 가혹행위를 당하다 숨진 윤승주 일병 사망 사건 은폐 의혹에 대한 진정을 지난 10월10일 각하했다. 지난 4월 진정이 제기된 지 약 6개월 만이었다. 윤 일병의 매형 김진모씨(48)는 10월18일 각하 결정에 항의하며 인권위를 방문했다. 김씨는 “진정을 제기할 때만 해도 은폐 의혹이 밝혀지리라는 기대가 있었는데, 갑작스러운 각하 결정을 이해할 수 없어 인권위원장실을 찾았다”고 했다.

이후 김씨는 경찰 수사 대상이 됐다. 김 위원이 지난 3일 임태훈 군인권센터 소장과 윤 일병 유가족 등이 인권위 내부에 불법 침입했다며 특수감금 등 혐의로 경찰에 수사를 의뢰했기 때문이다. 복도에서 유가족들이 난동을 부려 상임위원실 밖으로 나가지 못해 감금됐다는 게 김 위원의 주장이다. 김씨는 “정작 우리는 김 위원의 얼굴조차 보지 못했는데 자신이 문을 잠근 것을 감금했다고 주장하는 게 말이 되느냐”면서 “군 인권보호관이라는 사람이 군사망 유가족들의 겨우 아물어가는 상처를 난도질하고 있다”고 했다.

김씨는 각하 결정 과정도 석연치 않다고 했다. 군사망 유가족들이 박정훈 해병대 대령의 긴급구제 신청 기각 결정을 두고 비판의 목소리를 내자 그때부터 김 위원의 태도가 달라졌다는 것이다. 김씨는 “8월 이전까지만 해도 김 위원이 전화를 걸어 ‘자료는 다 보내달라’고 할 정도로 적극적이었다. 그런데 9월5일 박 대령의 긴급구제 신청 기각 규탄 기자회견을 연 뒤 한 달 만에 각하 결정이 이뤄졌다”면서 “기각 결정을 항의한 것에 대한 보복성이라는 의심이 들 수밖에 없다”고 했다.

일부 상임위원이 내분을 일으켜 인권위를 무력화시키고 있다는 의심도 든다고 했다. 김씨는 “김용원·이충상 상임위원이 의도적으로 분란을 만드는 것 같다”며 “송두환 인권위원장의 말도 전혀 따르지 않는 것은 사실상 인권위를 자기들 뜻대로 운영하겠다는 것”이라고 했다. 그는 “군인권보호관 제도는 윤 일병 사건을 계기로 만들어졌는데 새로 온 군 인권보호관이 유가족의 가슴에 대못을 박을 줄 누가 알았겠느냐”고 했다.

이태원 참사 희생자 이상은씨의 어머니 강선이씨(53)는 지난 6월26일 이태원 참사 특별법을 논의하는 인권위 전원위원회를 방청했다가 충격을 받았다. 이 상임위원이 회의장에서 “참사에는 구조적인 문제가 없다” “이태원 참사가 5·18보다 더 귀한 참사냐” 등의 2차 가해성 발언을 쏟아냈기 때문이다. 이 위원은 특별법을 두고 “민주당이 정치적 이득을 얻겠다고 이용하는 것으로 보인다”고도 했다. 방청을 온 일부 유가족은 이 위원의 발언에 항의하다가 퇴장당했다.

참사 이후 “놀러 가서 죽었다” “자식 죽음을 가지고 장사한다” 등과 같은 혐오 표현을 숱하게 접해온 유가족들은 한때 혐오 표현을 막아줄 마지막 보루로 인권위를 떠올렸었다. 강씨는 인권위에서 이태원 참사 특별법을 검토한다는 소식을 듣고는 ‘힘을 얻을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댓글에서나 볼 법한 이 위원의 ‘막말’에 강씨는 그 같은 생각을 지웠다.

강씨는 이 위원이 참사를 피해자 잘못으로 돌리는 것에 가장 많이 화가 났다고 했다. 그는 “인권위는 인권을 보장받지 못하는 사람들을 돕는 기관으로 알고 있었는데 이 위원은 반대로 유가족의 인권을 침해하는 발언을 너무 많이 했다”며 “피해자가 잘못해 참사가 일어난 것처럼 말하고, 5·18 참사와 비교하는 걸 듣고는 속이 뒤집혔다”고 했다.

강씨는 ‘구조적인 문제가 없다’는 이 위원의 발언을 두고는 “159명의 사람이 길을 가다가 갑자기 죽은 게 구조적인 문제가 아니면 뭐냐”라며 “이 위원의 태도는 ‘잘못이 없다’고 참사를 대하는 정부의 태도와 일맥상통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인권위원이라는 사람에게서 사람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마저도 찾아볼 수 없다”고 했다.

강씨는 “유가족들은 참사를 겪기 전까지 일반 시민이었다. 나도 평생 어떤 법안을 발의해야 한다는 생각은 해본 적도 없었다”면서 “그저 자식 죽음의 진상규명이라는 목적 하나로 특별법을 원한 것인데 여당이 동의해주지 않아 답답한 상황에서 특별법을 정쟁의 대상으로 몰아가는 게 이해되지 않는다”고 했다.

“내 권리 찾겠다는데 ‘딱하다’뇨”

한국옵티칼하이테크 노동자 이희은씨. 본인제공

한국옵티칼하이테크 노동자 이희은씨. 본인제공

한국옵티칼하이테크에서 13년간 제품 품질 검수를 해온 이희은씨(43)는 지난해 12월 회사로부터 문자메시지 한 통을 받았다. ‘희망퇴직 미신청자에 대해 청산 절차 진행에 따른 고용관계종료(통상해고) 예고 통지서를 회사에 신고된 주소지로 등기우편 발송했음을 알려드립니다.’ 지난해 10월4일 공장에 불이 난 이후 사측은 국내 사업 철수를 발표하며 이처럼 해고 통보를 내렸다. 이후 이씨는 거의 매일 경북 구미시 한국옵티칼하이테크 공단 내 노조 사무실을 찾아 농성에 나섰다. 이에 사측은 지난 9월7일 노조 사무실 등에 단수 조치를 했다.

이씨를 비롯한 노동자 13명이 농성을 한 것은 ‘일할 권리’를 되찾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단수 조치로 인해 물을 사용할 기본권마저 잃게 됐다. “이곳에서 아침·점심·저녁 모두 해 먹었는데 이젠 어려워졌고요, 화장실 가고 싶어도 자전거 빌려서 멀리 있는 건물로 가야 해요. 요즘은 춥기도 하고, 물 뜰 수 있는 데가 많이 없어서 최대한 참다가 가요. 한때는 구성원으로서 회사를 운영해나가는 데 도움이 됐던 사람들한테 사람의 기본적인 것도 못 누리게 하니까 비참한 생각이 듭니다.”

금속노조 한국옵티칼하이테크지회는 지난 9월11일 인권위에 긴급구제를 신청했다. 단수 조치로 인해 노동자들의 인권이 침해되고 있는 사실을 조사하고, 사측에 적절한 권고를 해주길 바란 것이었다. 하지만 이 위원은 지난 10월30일 인권위 전원위원회에서 해당 진정 건을 두고 “구미 사건은 기각할 거다. 불쌍한 근로자들을 위해서”라고 발언했다. 국회 국정감사에서는 “(그들이) 딱하다고 생각한다”며 “진정과 소송에 매달리지 말고 하루라도 빨리 다른 일자리를 찾으라고 하는 게 그분들을 돕는 것”이라고 했다.

이씨는 이 위원의 발언을 듣고 또 한 차례 충격을 받았다고 했다. 이씨는 “우리를 아랫사람으로 생각하면서 무시하는 것 같았다. 계급을 지고 사시는 분인 것 같다”며 “저희가 하는 일을 하찮은 일로 분류하는 것 같아 굉장히 기분이 안 좋았다”고 했다. 이씨는 “‘딱하다’는 말은 ‘정말 불쌍하다’는 뜻인데, 제 일자리를 찾기 위해 하는 행동이 딱하고 안타까운 상황은 아니다. 구걸하고 이러려고 하는 게 아니고 기본권을 찾기 위해 하는 것”이라며 “저희를 짓밟는 것 같다. ‘회사에 빨리 굴복해서 그냥 너희 자리로 그냥 돌아가면 돼’ 식의, 단수 조치를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는 발언”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이 위원은 우리한테 와 보지도 않고, 단수를 당해보지도 않았다. 그러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런 얘기를 하겠나”라며 “회사로부터 손해배상 소송도 걸려 있고, 국회를 통한 해결 과정은 지지부진하다. 인권위가 도움을 줄 수 있는 유일한 국가기관인줄 알았는데 그렇지 못해 절망적”이라고 했다.

결국 한 달이 지나도록 긴급구제 결정이 나오지 않자, 노조는 10월17일 긴급구제 사건을 인권침해 진정 사건으로 전환했다. 이들은 긴급구제 건을 담당한 침해구제 2위원장인 이 위원에 대해 기피신청서를 낸 상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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