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 80주년 경향신문

마르지 않는 공동창고, ‘무진장’



완독

경향신문

공유하기

  • 카카오톡

  • 페이스북

  • X

  • 이메일

보기 설정

글자 크기

  • 보통

  • 크게

  • 아주 크게

컬러 모드

  • 라이트

  • 다크

  • 베이지

  • 그린

컬러 모드

  • 라이트

  • 다크

  • 베이지

  • 그린

본문 요약

인공지능 기술로 자동 요약된 내용입니다. 전체 내용을 이해하기 위해 본문과 함께 읽는 것을 추천합니다.
(제공 = 경향신문&NAVER MEDIA API)

내 뉴스플리에 저장

마르지 않는 공동창고, ‘무진장’

입력 2023.12.13 20:20

수정 2023.12.13 20:21

펼치기/접기
[이희경의 한뼘 양생] 마르지 않는 공동창고, ‘무진장’

한없이 크고 많다는 뜻의 무진장(無盡藏). 원 출전이 <유마경>으로 부처님의 끝없는 자비심과 공덕을 일컫는 말이다. 여기서 유래하여 중국 남북조 시대에는 가난한 중생들에게 낮은 이자로 돈을 빌려주는 ‘무진장’이라는 구제적 금융기관이 생겨나기도 했다. 우리 공동체에도 그와 유사한, ‘마르지 않는 공동창고, 무진장’이 있다. 시작은 7년 전이었다. 당시 공동체에는 갑작스러운 파산, 실직, 질병 등으로 삶이 취약해진 회원이 여럿 생겼다. 뭔가 공동의 대책이 필요했다. ‘다른 앎’은 ‘다른 밥’으로 나아가야 했다.

처음 떠올린 모델은 마이크로크레디트나 신용협동조합 같은 것이었다. 공동의 기금을 마련하여 돈이 필요한 친구들에게 담보나 이자 없이 돈을 대출하면 좋지 않을까? 그런데 논의하면 할수록, 상환 날짜를 꼭 정해야 할까? 대출의 기준과 절차가 꼭 필요할까? 라는 질문이 생겼다. 서로의 처지를 이미 아는데, 급전이 필요하면 묻지도 따지지도 말아야 하는 게 아닐까? 결국 우리는 대출-상환의 형식이 아니라 누구라도 여유 있을 때 입금하고, 언제라도 필요하면 출금하는 공동통장을 만들어 그곳에서 서로의 돈을 섞고 순환시키기로 했다.

스물네 명의 회원, 3000만원의 출연금으로 2017년 4월 창립총회를 열었을 때 우리는 사적 소유를 넘어 돈을 섞는다는 이 이상하고 야릇한 실험에 좀 흥분했다. 그런데 열기는 금방 냉각되었다. 한동안 입금도 출금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리고 생각지도 못했던 문제들이 드러났다. 우선 가정경제와의 충돌. 주로 기혼여성회원들이 어려움을 토로했다. 집에서는 남편과 ‘무진장’ 입금에 관한 생각을 공유하기가 어려워 남편 눈치를 보게 된다고 했다. 반대로 ‘무진장’에서는 가족주의에 빠져 있다는 비난을 받을까 두렵다고 했다.

출금도 마찬가지였다. 공식적으로 출금의 기준 따위는 없지만 각자에게는 심리적 가이드라인이 있었다. 대학생 자녀의 학비를 출금하는 것은 떳떳한데 초등학생 자녀의 영어학원 출금은 눈치가 보인다고 했다. 입금은 하지 못하고 출금만 하는 것도 속이 부대낀다고 했다. 사회학자 김찬호의 말대로 “돈은 개인의 가장 깊은 곳에 감춰두는 문제”였고, 우리는 “돈에 대한 나의 느낌이나 욕망도 솔직하게 털어놓지 않는다”. 돈은 생각보다 훨씬 내밀한 문제였다. 돈을 섞기 위해서는 돈에 대한 자신의 온갖 지질한 욕망과 상념부터 털어놓고 섞어야 했다.

하지만 장자에 나오는 ‘철부지급(轍鮒之急)’의 에피소드처럼 목마른 붕어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물 한 모금이다. 우리는 ‘무진장’에 대한 서로 다른 감각들을 천천히 조율해 가는 한편 생활비 문제로 곤란을 겪는 친구에게 월 50만원 정도의 기본소득을 일정 기간 정기적으로 지급하는 마중물 제도를 마련했다. 더 나아가 공동체 식당에서 밥을 먹을 때, 마을약국에서 쌍화탕이나 비타민을 살 때, 마을 청년들이 운영하는 동네서점에서 책을 살 때, ‘무진장’의 공동지갑을 이용했다. 돈이 섞이고 삶이 섞이고 이웃과의 관계도 조금씩 더 돈독해졌다.

돈을 쓰는 기술이 늘면 돈을 모으는 기술도 늘어나야 한다. 이 기술은 유머가 넘치는 친구들이 이끌었다. 한 친구는 얼마 전 슈퍼문을 보았다며, 인증샷과 더불어 1만원을 입금한다고 알렸다. 그러자 줄줄이 슈퍼문 입금 챌린지가 벌어졌다. 다른 친구 한 명은 입금을 3만7320원, 13만9930원, 9만9909원 식으로 한다. 매달 10만원 자동 이체 같은 방식으로는 우리의 ‘무진장’을 돌볼 수 없다는, 늘 들여다보고 애써야 한다는 메시지를 그렇게 남긴 것이라 짐작한다.

우리 ‘무진장’은 규모가 매우 작아 대안경제 실험이라고 말하기에는 민망하다. 하지만 각자의 실감은 구체적이고 적실하다. 몇년간 마중물 기본소득을 받아왔던 한 친구는 ‘무진장’은 자기에게 비빌 언덕이라고 했다. 사람에 대한 믿음이 생겼다고도 했다. 다른 한 친구는 “여유 있는 친구들이 주변에 있어서 참 다행이다”라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동시에 돈을 더 잘 써야겠다는 생각, 더 잘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출금을 주로 하든 입금을 주로 하든 ‘무진장’이라는 공동통장을 함께 돌보는 행위는 우리가 호모 에코노미쿠스로 살지 않겠다는 다짐, 시시한 존재가 되고 싶지 않다는 바람을 드러낸다.

요즘 다들 형편이 어려워 바닥이 보이는 잔액이 마음 쓰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년에도 후년에도 ‘무진장’이 무궁하게 마르지 않는 마음의 창고, 재화의 창고로 유지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이희경 인문학공동체 문탁네트워크 대표

이희경 인문학공동체 문탁네트워크 대표

  • AD
  • AD
  • AD

연재 레터를 구독하시려면 뉴스레터 수신 동의가 필요합니다. 동의하시겠어요?

경향신문에서 제공하는 뉴스레터, 구독 콘텐츠 서비스(연재, 이슈, 기자 신규 기사 알림 등)를 메일로 추천 및 안내 받을수 있습니다. 원하지 않는 경우 [마이페이지 〉 개인정보수정] 에서 언제든 동의를 철회할 수 있습니다.

레터 구독을 취소하시겠어요?

뉴스레터 수신 동의

경향신문에서 제공하는 뉴스레터, 구독 서비스를 메일로 받아보실 수 있습니다. 원하지 않는 경우 [마이페이지 > 개인정보수정] 에서 언제든 동의를 철회할 수 있습니다.

※ 동의를 거부하실 경우 경향신문의 뉴스레터 서비스를 이용할 수 없지만 회원가입에는 지장이 없음을 알려드립니다.

  • 1이메일 인증
  • 2인증메일 발송

안녕하세요.

연재 레터 등록을 위해 회원님의 이메일 주소 인증이 필요합니다.

회원가입시 등록한 이메일 주소입니다. 이메일 주소 변경은 마이페이지에서 가능합니다.
이메일 주소는 회원님 본인의 이메일 주소를 입력합니다. 이메일 주소를 잘못 입력하신 경우, 인증번호가 포함된 메일이 발송되지 않습니다.
뉴스레터 수신 동의
닫기

경향신문에서 제공하는 뉴스레터, 구독 서비스를 메일로 받아보실 수 있습니다. 원하지 않는 경우 [마이페이지 > 개인정보수정] 에서 언제든 동의를 철회할 수 있습니다.

※ 동의를 거부하실 경우 경향신문의 뉴스레터 서비스를 이용할 수 없지만 회원가입에는 지장이 없음을 알려드립니다.

  • 1이메일 인증
  • 2인증메일 발송

로 인증메일을 발송했습니다. 아래 확인 버튼을 누르면 연재 레터 구독이 완료됩니다.

연재 레터 구독은 로그인 후 이용 가능합니다.
경향신문 홈으로 이동
뉴스레터 구독
닫기

전체 동의는 선택 항목에 대한 동의를 포함하고 있으며, 선택 항목에 대해 동의를 거부해도 서비스 이용이 가능합니다.

보기

개인정보 이용 목적- 뉴스레터 발송 및 CS처리, 공지 안내 등

개인정보 수집 항목- 이메일 주소, 닉네임

개인정보 보유 및 이용기간- 원칙적으로 개인정보 수집 및 이용목적이 달성된 후에 해당정보를 지체없이 파기합니다. 단, 관계법령의 규정에 의하여 보존할 필요가 있는 경우 일정기간 동안 개인정보를 보관할 수 있습니다.
그 밖의 사항은 경향신문 개인정보취급방침을 준수합니다.

보기

경향신문의 새 서비스 소개, 프로모션 이벤트 등을 놓치지 않으시려면 '광고 동의'를 눌러 주세요.

여러분의 관심으로 뉴스레터가 성장하면 뉴욕타임스, 월스트리트저널 등의 매체처럼 좋은 광고가 삽입될 수 있는데요. 이를 위한 '사전 동의'를 받는 것입니다. 많은 응원 부탁드립니다. (광고만 메일로 나가는 일은 '결코' 없습니다.)

뉴스레터 구독
닫기

닫기
닫기

뉴스레터 구독이 완료되었습니다.

개인정보 수집 및 이용
닫기

개인정보 이용 목적- 뉴스레터 발송 및 CS처리, 공지 안내 등

개인정보 수집 항목- 이메일 주소, 닉네임

개인정보 보유 및 이용기간- 원칙적으로 개인정보 수집 및 이용목적이 달성된 후에 해당정보를 지체없이 파기합니다. 단, 관계법령의 규정에 의하여 보존할 필요가 있는 경우 일정기간 동안 개인정보를 보관할 수 있습니다.
그 밖의 사항은 경향신문 개인정보취급방침을 준수합니다.

닫기
광고성 정보 수신 동의
닫기

경향신문의 새 서비스 소개, 프로모션 이벤트 등을 놓치지 않으시려면 '광고 동의'를 눌러 주세요.

여러분의 관심으로 뉴스레터가 성장하면 뉴욕타임스, 월스트리트저널 등의 매체처럼 좋은 광고가 삽입될 수 있는데요. 이를 위한 '사전 동의'를 받는 것입니다. 많은 응원 부탁드립니다. (광고만 메일로 나가는 일은 '결코' 없습니다.)

닫기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