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주 ‘책건문’은 마사 누스바움(출판사는 ‘너스바움’으로 표기)의 <동물을 위한 정의>(이영애 옮김, 알레)입니다. 법철학자로 유명하죠. 정치철학, 윤리학, 페미니즘에 관한 글을 써왔습니다. 이번엔 동물이 주제입니다. 책을 감수한 생태학자 최재천은 “마치 평생 동물행동학을 연구하다 철학으로 전향한 학자처럼 구체적이고 현실적”이라고 평했습니다. 여러 현장 사례가 나옵니다.
누스바움의 딸 레이첼 누스바움 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을 듯합니다. 레이첼은 동물보호단체 프렌즈오브애니멀즈의 덴버 지역 야생동물 분과에서 일하다 47세 나이로 2019년 사망했습니다. 모녀는 동물법 등을 두고 오래 이야기를 나눴다고 합니다. 레이첼은 미국의 동물원으로 밀매되는 코끼리, 목장주들로부터 도태 위협을 받는 야생마, 멸종 위기의 들소 등 야생동물의 법적 문제를 다루는 일을 맡았습니다. 모녀는 해양 포유류의 법적 지위와 야생동물과 인간의 관계에 관한 논문을 함께 쓰기도 했습니다. 누스바움을 딸을 두고 “나의 멘토이자 영감의 원천이었다”고 말합니다. 책은 딸에게 보내는 애도문이기도 합니다.
책 내용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침팬지가 ‘정말로 똑똑하다’는 게 뭐가 문제?
누스바움은 스티비 와이즈가 2000년 낸 책 <철창을 덜컹거리는>과 와이즈가 주인공인 2016년 다큐멘터리 <철창을 열고>를 비판적으로 들여다봅니다. 와이즈는 동물법 분야의 개척자입니다. 영화는 침팬지의 제한적 인격권을 얻기 위한 법적 투쟁을 담았죠. <철창을 덜컹거리는>은 침팬지, 보노보, 코끼리, 고래, 돌고래 같은 동물이 “자의식이 있고, 자기 결정 능력, 마음 이론, 문화를 갖고 있으며, ‘본능에 갇혀’ 있지 않고, 자신의 미래를 관조하는 능력이 있다. 일반적으로 그들은 ‘정말로 정말로 똑똑하다’. 그들이 ‘자율적인 생물’이고 그런 이유로 ‘자율적인 삶’을 살아야만 한다고 주장”하는 내용의 책입니다.
좋은 말 아닌가요? 누스바움은 별문제 없어 보이는 이 주장을 비판합니다.
자연의 사다리라는 이미지는 자연을 바라보는 데에서 나온 것이 아니며, 오만을 제거하고 자연을 바라볼 때 우리에게 보이는 것과는 일치하지 않는다. 우리에게 보이는 것은 수천 가지 다른 동물 생명체다. 모두가 생존, 번영, 번식을 위해 나름의 질서에 따라 노력하고 있다.
자연의 사다리 사상은 생명체의 등급을 단일한 척도나 수직적 위계로 매기죠. 새는 공간 지각력과 먼 목적지를 기억하는 능력이 인간보다 훨씬 우월하다는 점에서 등급을 매길 수 없는데도 말이죠.
다른 인간군도 동물이라는 근거로도
누스바움은 자연의 사다리 사상이 다른 방식에서도 위험해질 가능성이 있다고 말합니다.
누스바움은 “와이즈의 전략은 이런 사악한 인간의 관행들을 약화시키는 데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한다. 오히려 경계를 그림으로써 그런 관행을 강화시킬 위험이 있다”고 말합니다.
‘우리와 너무 비슷해서’ 접근법
누스바움이 이 책에서 자주 비판하는 건 와이즈의 책과 다큐멘터리 등에 나오는, 인간과 매우 유사한 것 같은 생물(오로지 그들만)을 도우려 노력하는, “‘우리와 너무 비슷해서(So Like Us)’ 접근법”입니다. <철창을 열고>에 나오는 유인원의 수어 장면을 두고도 “동물의 삶의 형태의 핵심에 있는 일이 아닌 어떤 것을 보여주는 접대용 재주”라고 비판하죠.
누스바움은 고래가 개나 돼지보다 인간과 더 비슷하게 보인다는 이유로 고래에게 높은 점수를 주지 말고, 인간과의 유사성이 아니라 모든 생물의 일반적인 유사성에 주목하자고 제안합니다. “세상에 대한 시각을 가지고 있고 의식한 것에 따라 반응하며,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나아간다는 유사성”이다.
과학은 많은 무척추동물도 주관적으로 고통을 느낀다는 걸 밝혀냈습니다. 주관적인 세계관(세상이 어떻게 보이는가)도 갖고 있습니다. “우리는 더 우리 종과 ‘짐승’들 사이에 이전과 같은 경계선을 그을 수 없”게 된 것입니다. 현실은 어떤가요.
경이와 연민, 전환적 분노
책을 쓴 계기도 이 인용문에 있습니다. 인간에게는 책임지는 일이 남았습니다. 누스바움이 강조하는 건 “다른 동물들에 대한 우리의 윤리적 책임을 인식”하고, 변화를 위해 실천하는 일입니다. 동물들에 주의를 기울이고 관심을 두는 일이 우선이죠. 누스바움은 3가지 감정, 즉 경이, 연민, 격분을 제시합니다. “아이를 애정으로 키우는 부모들이 전 세계의 기아와 아동의 성적 학대를 근절하기 위해 노력하려는 동기를 부여받지는 않는” 현실에서 “자신이 알지 못하는 수백만의 동물에는 애정을 갖도록 하는 능력”입니다.
경이? 사람들은 새들이 다채롭게 지저귀는 소리나 개들이 신나는 질주를 마치고 돌아오면서 헐떡이는 소리를 들을 때 ‘경이’라는 감정을 느끼곤 합니다. 경이는 “우리를 자신에게서 벗어나 다른 대상으로 향하도록” 하는 감정이다. “삶 자체에 대한 본원적인 기쁨에 연결”된 감정이라고 누스바움은 설명합니다.
연민은 피해자를 돕도록 만드는 감정이죠. 다만 연민은 고통을 유발하는 가해자 행동의 부당성에는 온전하게 반응하지 않습니다. 즉 가해자가 가하는 추가적인 피해를 막지 못하죠. 이때 필요한 게 ‘격분’입니다. 격분은 분노의 한 형태죠. 분노는 보복으로 튀어나오기도 합니다. 누스바움은 보복을 바라지 않는 ‘전환적 분노’를 제시합니다.
‘더 이상은 안 돼!’라고 소리쳐야
누스바움은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 아마티아 센이 고안하고, 자신이 확장한 ‘역량 접근법’을 동물 문제에도 적용하려 합니다. “개인 각자의 역량이 실현될 수 있는 분배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철학 이론”의 중심 역량 목록은 ‘삶’ ‘신체적 건강’ ‘신체적 완전성’ ‘감각, 상상력, 사고’ ‘감정’ ‘실천이성’ ‘소속’ ‘다른 종’ ‘놀이’ ‘자기 환경에 대한 통제’ 등이죠. 누스바움은 자기 나름의 특징적인 삶의 형태를 영위하는 동물의 역량에 기반을 둔 이론적 근거를 마련하려 합니다. 동물에 대한 역량 접근법을 경이, 연민, 격분의 3가지 감정과도 연결하죠.
누스바움은 지적이고 복잡한 지각력을 가진 동물 각각이 괜찮은 삶을 얻어낼 개별적이고 사회적인 능력을 갖추고 있다고 봅니다. 쾌고감수능력이 있는(세상에 대한 주관적인 관점을 가지고 고통과 쾌락을 느낄 수 있는) 각각의 생물은 그 생물 특유의 삶의 형태로 번영할 기회를 얻어야만 한다고 거듭 강조하죠.
……
모든 척추동물과 많은 무척추동물을 비롯한 모든 쾌고감수능력이 있는 생물(세상에 대한 관점을 갖고 있으며 그런 것들이 중요한)이 번영하는 삶을 위한 적절한 시도를 할 수 있도록 서식지를 보호함으로써 말이다. 중요한 활동을 선택할 수 있는 이런 가능성이 바로 내가 “역량capabilites”이라고 말할 때 의미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동물의 역량을 지원해야 한다.
인간은 “다른 생물들의 목적에 절대적인 순위를 매겨 어떤 생물이 추구하는 어떤 목적이 다른 것들보다 중요하다고 정하려는 그릇된 시도”를 하죠. 역량 접근법의 전제는 인간만이 의식 혹은 자아를 가진 유일한 생물이라는 잘못된 생각을 버리는 겁니다. 누스바움은 모든 동물의 존엄성을 존중해야 하고, 그들에게 요구가 있다는 것도 인정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시민권’도 주장을 하죠. 누스바움은 인간과 일상을 함께 하며 인간과 공생하도록 진화해온, “다종 사회”와 동물을 동료 시민으로 보는 사상을 옹호합니다.
동물도 능동적인 시민이다
원고적격, 즉 소송의 원고로서 법정에 설 수 있는 자격에 관한 이야기죠. 변호사들은 이미 아이나 인지 능력이 떨어지는 노인 등을 법적으로 대리합니다. 거의 모두가 변호사를 고용해야 하죠. 인간 협력자가 동물을 대리하는 게 야단법석 떨 일은 아닙니다. 누스바움은 “동물에게 권리가 있다는 것은 이를 시행하기 위한 법적 메커니즘이 존재하거나 만들어져야 한다는 의미”라며 “동물에게 정식으로 선임된 관리인을 통해 법정에 설 수 있는 원고 자격을 부여하자”고 제안합니다.
누스바움은 거듭 동물이 지적이고 복잡한 지각력을 가졌고, 각각이 번영하는 삶을 얻기 위해 노력한다고 말합니다. 동물들은 이 세상에서 괜찮은 삶을 얻어낼 수 있는 개별적이고 사회적인 능력을 갖고 있다고 보죠.
고통스럽지 않은 방식으로 도살되는 인도적 축산은?
누스바움은 여러 쟁점도 다룹니다. 동물이 좋은 음식, 신선한 공기, 다른 동물과의 교류 등이 가능한 삶을 살다가 고통스럽지 않은 방식으로 도살되는 인도적 축산은 어떻게 봐야 할까요? 누스바움은 식용으로 도살하는 동물 중 일부가 아주 어린 동물이란 점을 들어 이렇게 말합니다.
이렇게도 말합니다. “인간을 위한 살육은 동물이 인간의 재산으로 여겨질 때만 정당화될 수 있다. 그들은 재산이 아니고, 생명의 주체다. 따라서 살육은 멈춰야 한다.”
누스바움은 반려동물 문제도 주요하게 다룹니다. 쟁점 하나는 인기 있는 품종 개의 근친교배입니다.
롤린의 말처럼 인간이 아이를 그런 식으로, 즉 심미적으로 그들을 만족시키는 형질을 선택하느라 아이가 위험하고 고통스러운 삶을 살게 할 가능성을 높인다면 사람들은 경악할 것이다. 나는 내셔널 도그쇼National Dog Show를 좋아하고 무대에 오른 개들에 게 경외감을 느낀다. 하지만 심미적인 목적의 근친교배를 없애야 할 때가 왔다. 그것은 비인도적이다. 그것은 상호 존중의 공생을 위한 것이 아닌 인간의 헛된 자만, 종종 브리더의 이익을 위한 것이다
인간은 굶주리며 죽어가는데
동물 권리 문제를 두곤 인간은 식량 부족으로 굶주리고, 의료 부재로 죽어가는데 다른 동물을 돌보는 데 상당한 시간과 돈을 쓰는 것을 정당화할 수 있는가라는 반문도 곧잘 나오죠. 누스바움의 답은 이렇습니다.
건강한 인간 공동체를 보존하기 위해 동물에게 고통을 가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 때라면 우리는 한발 물러서 우리가 어떻게 그런 나쁜 상황에 처하게 됐는지, 그리고 그런 암울한 선택이 필요치 않은 미래의 세상을 만들기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질문해야 한다. 해야 할 일이 있는데 울고만 있는 것은 방종이다. 이것은 정말 어려운 딜레마이고, 돌이킬 수 없는 손실이 생기지 않으리란 보장도 없다. 하지만 할 수 있는 것이 없는지 살펴보자. 모든 것이 가차 없이 나쁘다고 생각하는 데에서 재미를 느끼고 인류세가 우리의 죄악으로 인한 종말이라고 믿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라면 헤겔적 낙관주의에 만족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믿지 않는다. 나는 우리가 숙고를 통해 그럴듯한 다종 세계를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한다. 유일한 문제는 우리에게 그럴 의지가 있는가이다.
포경은 전통이자 문화 아닌가
알래스카 선주민의 고래잡이는 어떻게 봐야 할까요? 전통과 문화라며 포경을 옹호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누스바움은 이렇게 말합니다.
오늘날 고래를 사냥하는 대부분의 에스키모인은 문명의 변두리에서 생존을 위해 고군분투하는 원주민이 아니다. 그들은 포경에 열정을 가진 ‘문화적 자기 확증의 활동으로 고래를 잡는 젊은이들’이다. 그들은 그래야 하기 때문이 아니라 원해서 고래를 잡는다.
……
모든 종류의 나쁜 관행은 다분히 전통적이다. 가정 폭력, 인종 차별, 아동 성학대, 동물 고문이 모두 그런 예다. 이런 관행이 오랫동안 존재했다는 사실이 그런 관행을 지지하는 것은 아니다. 전통에 규범적 힘이 있다면, 옹호자들은 그것이 어떤 힘인지 규명하기 위해 더 노력해야 한다.…나는 우리가 현재 남성성의 문화적 표현으로 여성에 대한 폭력을 용인하지 않는 것처럼 동물의 살육을 문화적 표현의 한 형태로 용인해서는 안 된다는 결론을 내렸다. 모든 집단은 변할 수 있으며, 자신의 윤리적 역량에 대한 존중, 또 무엇보다 동물에 대한 존중을 바탕으로 한 변화가 모두에게 요구되어야 한다. 모든 인간에게는 더 나은 법과 제도를 위해 노력해야 할 집단적인 의무가 있다.
낭만적 폭력 깃든 ‘야생’, 대리 가학으로 돈을 보는 포식 현장
누스바움은 인간 지배가 뻗치지 않은 곳이 없다는 점에서 ‘야생’도 일종의 허구로 봅니다. 그는 야생을 낭만적으로 보는 것은 부분적으로 폭력에 대한 동경 때문이라고 말하죠. 대형 포식 동물의 포식 장면을 예로 들며 이렇게 말합니다.
야생 개는 절멸에 대단히 가까운 종이며 사람들은 야생 개를 보존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이 종의 보존은 좋고 나쁨을 가릴 수 없는 문제지만, 여기서 보존을 촉구하는 핵심적인 이유는 좋지 못한 것, 즉 가학 관광에서 나오는 돈에 있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더 큰 사안을 미루어두는 동안, 생각해봐야 할 포식에 대한 몇 가지 소극적인 개입이 있다. 첫째, 가학 관광으로 돈을 벌지 않는 것이다. 인간의 가학성을 충족시키기 위해 동물을 고문하는 또 다른 스포츠인 여우 사냥을 불법화한 것처럼, 나는 포식을 인간이 없는 공간으로 제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책은 마을에 버려진 작은 새를 발견했을 때 수의학적 치료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동물 간 포식(捕食) 문제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도 들여다봅니다. 진전도 다룹니다. 신축이나 리노베이션 때 조류 충돌을 막는 데 도움이 되는 유리로 외벽을 만들어야 하는 내용의 ‘조류 안전 건물법’(미국 일리노이주 의회) 등 ‘전환적 분노’가 만들어낸 개선 사례 등을 소개합니다.
책은 아리스토텔레스, 벤담, 밀, 칸트 등 여러 철학자의 동물 관련 사상도 다룹니다. 오래된 사상입니다. 그리스의 플라톤주의 철학자 플루타르코스(46~119)와 포르피리오스(234~305)가 “인간의 동물 학대를 한탄하면서 동물의 명민함과 사회생활 능력을 설명하고 인간들에게 식습관과 생활 방식을 바꾸라고 촉구하는 논문”을 썼죠. 당시 동물은 고기를 위해 죽임을 당하는 고통을 겪었지만, 비좁고 격리된 끔찍한 환경에 감금 상태로 지내진 않았습니다. “인간의 잔혹 행위나 방치의 범위가 비교적 좁았던 것”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