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수들의 ‘봉숭아학당’

이창민 한양대 경영학부 교수

최근 윤석열 정권의 위기는 좋지 않은 경제, 부산 엑스포 참패, 김건희 리스크 등이 겹친 것이지만 보다 본질적으로는 한국 보수의 밑천이 드러나고 있다. 윤 대통령은 보수를 자처하지만 자신의 확고한 철학이 없는 백지상태이다. 그런데 주변 참모·국민의힘·보수지식인들은 “대통령님, 저요! 저요!”하면서 대통령에게 각자 준비한 개인기를 들이밀기 바쁘다. 한마디로 봉숭아학당식 난장판인데 최고 권력자의 눈에 들고 싶어 하는 거야 어느 정권이든 마찬가지이니 별문제가 아닐까? 아니다. 윤 정부는 한국 보수가 공유하는 철학 없이 오직 권력을 위한 선거결사체로 변질된 지 오래인데, 정권 1년 반이 지나도록 이렇게 오리무중 정국을 만들기도 쉽지는 않다.

최근 한국 보수의 밑천을 드러내는 상징적 사건으로서 첫 번째가 부산 엑스포 결과에 대한 예측 실패이다. 대통령 스스로 예측 실패라고 말했지만 단순 정보력 부재보다 훨씬 문제가 심각하다. 내가 보는 스토리 라인은 우선 대통령이 듣고 싶은 것만 듣고 자기 확신을 강화하는 에코챔버(echo chamber) 경향이 강하다. 자기가 중요시하는 것에 대해서는 에코챔버 경향이 더 강하다. 그리고 주변 참모들은 그걸 안다. 그러면 주변 참모들은 더 편향된 정보만 올린다. 여기서 포인트는 윤 대통령이 도대체 왜 부산 엑스포 유치에 이 정도로 집착했는지 아무도 설명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국정 우선 과제를 설명하지 못하는 정권을 본 적이 있는가? 더 걸작은 엑스포 관련 경질을 해도 모자랄 방문규 산업부 장관을 3개월 만에 총선에 차출했다. 우리는 진정한 대인배 대통령을 만나고 있다.

두 번째, 엑스포 유치 실패 이후 부산 민심을 달랜다고 윤 대통령이 재벌총수들을 대동해 부산에 내려가서 떡볶이를 먹은 것이 문제가 되었는데 그게 다가 아니었다. 떡볶이를 먹은 후 또 바로 삼성 이재용 회장을 데리고 네덜란드 국빈방문을 갔다. 명분이 한·미·일·네덜란드 반도체 동맹이라는데 그 결과로 나온 것은 삼성전자가 네덜란드 반도체 장비업체 ASML과 공동으로 1조원을 투자해 한국에 연구개발센터를 만드는 것이다. 알 만한 사람은 다 안다. 삼성전자가 한참 전부터 ASML에 공을 들여왔다는 것을 말이다. 이건 정경유착도 아니고 윤 대통령의 무임승차이다. 윤 대통령이 삼성전자가 노력으로 얻은 결실에 숟가락을 얹은 것이다. 화룡점정은 엑스포 투표 나흘 전 프랑스 파리에서 윤 대통령이 총수들을 불러 폭탄주를 마신 것으로 찍었다. 심지어 폭탄주를 먹은 지난달 24일 김은혜 대통령실 홍보수석의 파리 현지 브리핑은 웅장하기까지 하다. “팀코리아(정부와 기업의 원팀)와 함께 일분일초를 아끼지 않고 쏟아붓는 윤 대통령의 혼신의 대장정은 이 시각 현재도 진행형”이란다.

윤 대통령은 공과 사, 정부자원과 민간자원을 구분하지 못한다. 심지어 정부가 민간을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민간의 업적에 올라타는 것에 창피함도 없다. 대통령의 이러한 인식은 국가운영에 상당한 위험요인이다. 여기에 대통령은 정경유착의 선을 아슬아슬 넘나드는데 입만 열면 자유시장경제를 외치던 보수는 너무나 조용하다. 시장경제의 핵심은 자원의 효율적 배분 아니었나? 국가 부채가 증가하면 나라가 망할 것처럼 입에 거품을 물던 사람들이 부산 엑스포 국면에서는 다 숨어버렸다. 그들이 아는 시장 왜곡은 재정지출 증가 하나뿐인가보다. 이러니 내용은 하나도 없고 감세가 성장의 마법이라는 40년 전 좀비 아이디어에 갇혀 있는 냉동인간이라는 소리를 듣는 것이다. 설마 재벌들이 윤 대통령과 함께 전 세계를 누비면서 전 대우그룹 김우중 회장의 1989년 저서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의 지혜를 체득했다고 감동하고 있는 건가.

마지막으로 그나마 보수가 윤 대통령에게 쓴소리하는 내용을 살펴보면 결국 무슨 방법을 써서라도 내년 총선에서 이겨야 한다는 것이다. 총선에서 국민의힘이 패배하면 윤석열 정부는 식물정부가 될 것이고 그러면 임기와 상관없이 결단해야 할 것이라고 한다. 더 이상 김건희 리스크를 안고 갈 수 없으니 사저에서 근신시키라고도 한다. 겉으로 보기엔 엄중한 경고 같지만 결국 윤 대통령이나 보수나 총선 승리만 바라본다는 것에서 별반 다르지 않다. 정치에서 선거가 중요하다는 것은 삼척동자도 다 안다. 그런데 생각해보자. 김건희 여사가 사저에서 근신해서 내년에 국민의힘이 총선에서 승리하면 윤 대통령은 유능한 국가지도자로 환골탈태할까? 한국 보수는 사라진 철학과 내용을 복원해 봉숭아학당에서 탈피할 수 있을까? 사람이 쉽게 변하지 않고 내공이 쉽게 생기지 않는다는 것도 삼척동자는 안다.

이창민 한양대 경영학부 교수

이창민 한양대 경영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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