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뒷걸음질로 미래에 들어선다.” 프랑스의 시인 폴 발레리는 다가오는 시간에 당당히 마주하지 못하고 주저하는 우리의 모습을 이렇게 표현했다. 미래는 희망과 설렘을 주기도 하지만, 동시에 불안과 두려움을 안겨주기 때문이다. 요즘처럼 하루가 다르게 급속도로 변화하는 세상 속에서 나름 발버둥을 치지만 다가오는 시간을 따라잡기는 여간해선 쉽지 않다. 이에 더해 우리 눈앞에 펼쳐진 현재의 풍경들은 어딘가 모순적이고 난해하다. 이맘때쯤이면 으레 각계각층에서 한 해를 대표할 만한 사건 혹은 의미를 근사한 핵심어로 제시하곤 한다. 개인적으로는 지난 한 해를 상징하는 단어로 ‘인공지능’과 ‘전쟁’이 떠오른다. 언뜻 생각해보면 인간 지성의 첨단을 상징하는 인공지능과 인간 야만성의 극한인 전쟁이라는 두 단어는 서로 어울리지 않는다. 물론 요즘에는 인공지능이 개발되자마자 제일 먼저 군사적으로 이용할 궁리부터 하니, 따지고 보면 두 단어 사이의 온도차가 그리 크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이 두 가지 이질적인 개념에 내재된 상반된 감정의 뒤엉킴은 낯설고 당혹감마저 느끼게 한다. 이렇듯 어울리지 않는 두 개념이 혼재하는 시공간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미래를 어떤 태도로 살아내야 하는가라는 물음이 또 하나의 무거운 화두가 된다.
우리는 ‘비동시성의 동시성’이라는 시대를 살고 있다. 독일의 철학자 에른스튼 블로흐는 각기 다른 시대에 존재하는 사회적 요소들이 같은 시대에 공존하는 현상을 이른바 ‘비동시성의 동시성’이라고 규정한 바 있다. 현재 지구 한편에서는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을 비롯한 이스라엘과 하마스 간의 원시적이고 야만적인 살육전이 진행 중이다. 여전히 키이우와 가자지구 하늘에서는 미사일이 하루에도 수백발씩 날아다니고, 군인과 민간인을 가리지 않고 무자비하게 죽이거나 죽임을 당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다른 한편에서는 챗GPT를 비롯한 생성형 인공지능이 일상으로 상용화되기 시작했다. 이제 인공지능은 미래가 아닌 현재의 이야기가 되었고, ‘인공지능’이라는 용어 자체도 더 이상 특별히 사용되지 않을 거란 전망도 꽤 설득력 있게 들린다. 앞으로는 우리 주변에서 인공지능이 상용화, 일상화를 넘어서서 인간의 삶과 하나가 되기 때문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미국의 민간 우주 기업 스페이스X는 매주 한 번씩 로켓을 우주로 쏘아 올리면서 화성 개척의 야심을 드러내고 있다. 어쩌면 이다지도 어울리지도 않고, 공존할 수 없다고 여겨지는 광경이 동시대에 지구라는 같은 장소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같은 시공간, 다른 사건들이 종횡으로 난장을 부리는 듯하다.
동지(冬至)를 맞아 산중에서는 스님들이 정진을 잠시 멈추고, 공양간에 오순도순 둘러앉아 팥죽에 들어갈 새알을 빚는 운력을 한다. 가야산 추위가 매섭지만, 스님들은 두 손바닥으로 반죽을 빙글빙글 돌려가며 새알심을 능숙하게 빚어낸다. 그 와중에 입담 좋은 스님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얼굴에 절로 웃음꽃이 피고 시간 가는 줄을 모른다. 동지가 되면 이 새알심을 넣어서 팥죽을 쑤고 부처님께 공양을 올리며 불공을 드리는 풍습이 여전히 절집에는 전해 내려온다. 마을에서는 동지를 ‘작은 설날’이라고도 부르는데, 추운 겨울을 나면서 병고에 시달리지 않고 잘 견뎠기 때문에, 기운을 보충하고 새해 건강을 기원하면서 팥죽을 끓여 먹는다. 민간신앙에서는 귀신이 싫어한다는 붉은색의 팥으로 만든 죽을 먹음으로써 질병과 귀신을 물리칠 수 있다고 믿었다고 전해진다. 동짓날을 기점으로 낮이 길어지고 밤이 짧아지기 시작하기 때문에 고대인들은 태양이 다시 살아나는 날로 여기고 태양신께 제사를 올렸다고 한다. 이처럼 우리는 인공지능 시대를 살아가면서도 농경시대의 풍습과 민간신앙이 오늘날까지 일상 곳곳에 스며들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인공지능이 시를 쓰고 작곡을 하며 그림을 그리는 이 시대, 우주 공간에 인터넷 망을 깔고 화성 개척을 준비하는 시대이지만 동시에 동지 팥죽을 끓여 먹으면서 귀신을 쫓고 건강을 기원하는 마음들이 혼재하는 비동시대의 현상들이 동시대에 공존한다. 미래를 향한 우리의 뒷걸음질과 머뭇거림 혹은 주저함은 아마도 이런 모순과 부조화에서 비롯한 것이 아닐까. 하지만 이 시대가 주는 모순과 난해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시간들을 어떻게든 살아내야 한다. 다가오는 새해는 뒷걸음질로 주저하다가 어쩌다 보니 열리는 문이 아니라, 희망과 기대 속에 당당히 활짝 열어젖힐 미래의 문이 되기를 기도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