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연말, 모두가 ‘제일 먼저 전하고 싶은 소식’이 가득한 사회가 되기를 소망한다. 이태원 참사 유가족 분들이 진상규명 특별법의 국회 본회의 통과를 촉구하며 한파 속 오체투지를 했다는 이야기를 전해들었을 때 더욱 그러했다. 하지만 고대했던 소식이 아닌 12월21일 임시국회에서마저 결국 무산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어디 실망스러운 소식이 이것뿐이었을까. 12월 초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로 ‘개정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과 ‘방송 3법’이 거부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국외에서는 11월20일까지 도쿄전력이 방사성 오염수 3차 방류를 완료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12월13일 마친 제28차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 총회(COP28)는 결국 화석연료에 대한 명확한 ‘퇴출’ 합의에 실패했다는 소식까지 들렸다. 이것뿐인가. 이스라엘과 하마스 전쟁 속 가자 지구 주민 절반이 굶주림에 떨고 있다는 소식과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마을을 공격했다는 소식 또한 끊이질 않는다.
반면, 많은 이의 기억에서 잊혀진 소식도 있다. 14명의 생명을 앗아간 오송 지하차도 참사가 발생한 지 5개월이 지난 지금까지 유가족은 외롭게 진상규명을 외치고 있다. 최근 유가족 인터뷰에서 전해진 소식은 “경찰과 검찰이 해야 할 일을 왜 우리가 아직도 이런 이야기를 해야 하는지”였다. 이들이 기억하는 건 참사 당시 관계자의 “도의적 책임은 있지만 법적인 책임은 없다”라는 발언이었다.
참사 당시 국무조정실 감찰조사 결과 23번의 예방 기회를 놓쳤다는 결과가 발표되었다. 하지만 이후 어떠한 공식적 사과와 책임자 처벌이 이루어졌는지 소식은 전해지지 않았다. 그런데 여기서 ‘도의적 책임’이란 무엇일까. ‘도의(道義)’는 사람이 마땅히 지키고 행해야 할 도덕적 의리를 말한다. 관계자들은 보편적 도덕에서 요구하는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완수했을까? 나에게 관계자의 위와 같은 발언은 오히려 ‘법이 도의적 책임까지 막아주고 있다’라는 확신처럼 들린다.
법 철학자 마사 너스바움은 수치심과 혐오가 법의 제정과 집행에 깊이 연루되어 있다고 지적한다. 가장 대표적 예로 공연음란죄처럼 ‘공연히 성적 수치심을 해하여 성적 도의관념에 반하는 행위’를 했을 때 1년 이하의 징역, 5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하는 것으로 규정하고 있다. 그렇다면 알몸을 보았을 때 시민들이 느꼈을 혐오감과 ‘사람이 할 소리’가 아닌 말을 하는 무책임한 공직자의 모습을 보았을 때 피해자 및 유가족이 받게 되는 심리적 고통 중에서 어느 쪽이 개인과 사회에 더욱 해로운 것일까. 과연 법은 어떤 수치심과 혐오에 더욱 엄정한 책임을 물어야 하는지 묻고 싶다.
그렇다면 이 같은 참사 관련 기사들이 우리에게 전해주는 진정한 소식은 무엇일까. 그것은 법이 다루지 못하는, 혹은 법이 방어해줘야 마땅한 도의적 역할을 당사자가 직접 해결해야 하는 암혹한 현실일지 모른다. 유가족의 사과 및 진상규명에 대한 요구에 여당은 경제적 지원과 추모사업에 집중하자며 반대 의견을 전하지 않았던가. 이 같은 현실은 폭력을 넘어 착취로까지 느껴진다. 즉, 유가족에게 죽음에 대한 모든 도의적 책임의 짐(떠난 사람에 대한 미안함과 애도 등)을 떠넘기고 그들이 가진 모든 도덕성을 남김없이 소모하도록 내모는 듯 말이다. 즉, 공적인 돌봄윤리의 공백을 개인들의 도의로 메꾸는 것이다.
인류학자 서보경의 책 <휘말린 날들>은 HIV 감염인과의 연대활동을 다루며 감염인을 “앞줄에 선 사람”으로 소개한다. 책은 먼저 재난을 만난 사람들이 “뒷줄에 선 사람”에게 홀로 고통받게 내버려두지 않겠다는 다짐을 전해준다. 참사의 희생자도, 생존자도, 유가족도 다른 모든 시민보다 그저 먼저 ‘앞줄에 선 사람’일지 모른다. 그들은 운이 없어 재난에 ‘휘말린’ 것이 아니라 그저 ‘먼저’ 경험한 시민이며, 그 참혹함을 알리려는 이들이다.
얼마 전 또 다른 최전선의 앞줄에 선 분으로부터 “제일 먼저 전하고 싶은 소식”을 듣게 됐다. 연말 하청업체 계약이 연장되지 않으면서 소속된 상담사 240명이 정리해고 위기에 처해 노숙농성을 했던 고객센터 노동조합 지부장님이 사측이 전원 고용승계를 약속했다는 소식을 전해온 것이다. 가장 앞줄에 선 사람으로서 체력, 정신력, 나아가 도의적 책임감마저 남김없이 소모하며 이끌어낸 결과였음을 알기에 나는 연신 감사하다는 말만 반복했다. 연말, 이제는 더욱 많은 소식들이 누군가에게 ‘제일 먼저’ 전해지기를 진심으로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