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조건, 국민의 조건

[정희진의 낯선 사이] 인간의 조건, 국민의 조건

이 글은 사회학자 오찬호의 글 “여자도 군대 갔다면, 달라졌을까”(경향신문, 2023년 12월18일자)에 대한 부연이다. 나는 그의 글을 금태섭 전 의원과 류호정 의원의 신당 추진 과정에서 나온 “여성 징병제 vs 남성 돌봄제(?)”에 대한 문제 제기로 읽었다.

정책 영역뿐 아니라 “국가를 위해 남성은 군대에 가고 여성은 출산한다”는 통념은 막강하다. 일상에서도 마치 자연의 이치인 양 회자되고, 징병제 문제가 나올 때마다 되풀이되는 이야기다. 물론 이는 어불성설이다. 실현되어야 할 바람직한 일도 아니다. 일단, 돌봄과 병역은 어느 성별이 수행하는가를 떠나, 자명한 인간사가 아니다. 두 가지 모두 인간이 만든 이데올로기다. 특히 징병제는 일시적이고 특수한 제도이다.

용어 사용부터 징병제에 대한 사회적 차원의 공부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근대국가의 구성 요소 중 군대는 독자적 자위력을 가진 독립국가의 상징으로 간주된다. 대표적인 모병 방식으로 징병제와 지원병제(혹은 용병)가 있다. 그러나 한국 사회에서는 모병(募兵), 징병(徵兵), 지원병(志願兵) 용어를 혼재해서 사용한다. 그만큼 구체적인 논의가 부족하다는 얘기다.

한국은 전 세계에서 유일한 남성 징병제 국가이다. 남성성의 표준에 맞는 ‘모든’ 남성이 특정 연령대에 특정 기간 의무 복무해야 한다. 징병에 해당하는 영어 단어 ‘con/script’는 글자 그대로, 종이 하나로 국가권력이 개인을 동원할 수 있다는 의미다.

한편 “대한민국 남자라면 피할 수 없다”는 통념과 달리 특혜, 비리, 기피, 거부도 일반적 현상이다. 모든 남성이 군대를 가는 것도 아니고 똑같은 방식으로 복무하는 것도 아니다. 물론 이 4가지 ‘안 가는 방식’의 의미는 다르다. 남성들 사이에도 안 갈 수 있는 자원, 안 가겠다는 신념 등에서 큰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가장 큰 문제는 이것이다. 남성 징병제를 둘러싼 한국 사회의 문제 제기가 군인의 인권, 군축 혹은 군대 없는 사회에 대한 상상력까지는 아니더라도 현재보다 뭔가 나은 방식이 아니라 매번 약자끼리 싸우는 방식으로 논란이 된다는 점이다. 남성 문화의 심리는 이중적이다. 자신을 군대에 보내는 국가와 ‘안 가도 되는 계급’에 저항하기보다, ‘못 가는 사람(장애인, 여성, 성소수자)’을 비하하고 혐오한다. 이는 출구 없는 전략이다. 게다가 실제로는 ‘비(非)국민’의 입대를 반기지 않으면서 “여자도 군대 가라”고 주장한다.

군 복무와 돌봄은 대칭적이지 않아

여성의 출산을 포함한 돌봄 노동과 남성의 병역의무를 동등한 가치로 보는 것은 생물학적 본질주의라는 점에서 더욱 문제적이다. 두 가지 모두 인간이 만들고 선택한 제도다. 그러나 일부 여성들조차 “남성이 군대 가는 대신 여성은 애를 낳는다”고 주장했고, 최근에는 저출산으로 인해 이러한 대응이 설득력을 잃어가고 있다. 남성 사회는 “요즘은 여자들이 애를 안 낳고 있지 않냐”며 분노한다.

남성 군대-여성 출산은 성별 분업 이데올로기일 뿐 상호 대칭적 인간 활동이 아니다. 금태섭 새로운선택 공동대표는 신당의 주요 정책으로 젠더 문제를 제시하면서 “지금 젠더 갈등은 정말 위험 수위에 달했다”며 “젊은 분들이 성별로 나뉘어 싸우면 나라 장래가 어떻겠느냐”고 말했다. 금 대표의 말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의미가 있다. 젠더를 주요 사회적 모순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반가운 일이지만, 젠더가 주로 “젊은 분들끼리의 싸움”이라는 발언은 성차별을 ‘젠더 갈등’으로 오해한 결과다.

지금 일부 20대에서 나타나는 ‘젠더 갈등’은 한국 사회의 성차별과 계급차별을 은폐하는 착시 현상이다. 장년, 노년층에서는 ‘젠더 갈등’이 없는가. 자본주의 사회에서 남성도 힘들다? 그렇다면 여성은 자본주의에서 살기 편한가. 당대 ‘젠더 갈등’은 여성이 피억압자인 성차별 사회에서, 20대 남성을 대상으로 한 징병제 때문에 나타난 현상이다. 문제는 국가가 제도화하고 곪을 대로 곪은 남성 징병제 자체다. 남성 문화는 성차별을 ‘젠더 갈등’으로 둔갑시키는 데 성공했다.

주지하다시피 남한의 징병제는 인류 역사 전체로 볼 때 짧은 시기 특정한 지역에서 행해지고 있는 매우 이례적인 인간 활동이다. 1953년 한국전쟁 와중에 제정되어 특정 로컬에서 70년 동안 실시된 특수한 제도다. 현역병의 복무 기간의 조정 사안을 다루고 있는 병역법 제19조의 역사는, 시대나 분야에 따라 복무 시간이 18개월에서 40개월까지 다양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무엇보다 20대 성별 갈등의 대안으로 제시된 “남성의 돌봄 노동 참여, 여성 대상 징병제”는 실현 가능성이 전혀 없을뿐더러 군사(軍事)와 보살핌 노동을 동등한 가치로 본다는 측면에서 매우 문제적이다. 현실적으로 두 가지 모두 필요한 일이라 할지라도, ‘군사주의’와 ‘보살핌의 윤리’는 대립하는 가치다. 또한 징병제처럼 남성의 가사 노동을 국가가 강제할 수 있을까. 여성의 성역할 활동처럼, 평생 동안 돌봄 노동에 종사할 남성이 얼마나 될까.

누구나 저절로 국민이 되는 것이 아니다. 귀화나 국적 획득이라는 말이 왜 있겠는가. 국민은 성취, 획득되는 지위이다. 국가는 언제든지 배제와 포함의 잣대를 마음대로 휘둘러 국민의 범위를 조정할 수 있다. 그중 하나가 군 복무다. 헌법 제2조는 ①항, “대한민국의 국민이 되는 요건은 ‘법률’로 정한다(작은 따옴표는 필자)”. 이처럼 국민은 법률로 정해지는 범주다. 제39조 ①항을 보자. “모든 국민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국방의 의무를 진다”. 남녀 모두 국방의 의무를 지지만, 남성은 병역이라는 ‘직접적인’ 방식으로, 여성은 ‘후방에서 간접적으로’ 국방 의무를 담당한다는 의미다.

군대는 합법적인 폭력 장치이다. 이 글에서 군대의 존재 의미를 다룰 여력은 없지만, 군대는 특수한 상황을 상정한 제도다. 군대의 목적은 ‘외부의 적’이 있다는 가정 아래, 국민을 보호하는 데 있다고 간주된다.

병역법은 국민이 되는 요건을 ‘법률’로 정하는 대표적 장치다. 국민을 보호하는 자와 보호받는 자로 나누고, 보호자는 보호받는 대상을 선별할 권력을 갖는다. 우리는 전쟁은 물론이고 일상의 수많은 사건·사고에서 국가가 국민을 선별하는 과정을 매일 목도한다. 양산되는 산업재해 노동자에 대한 조치나 이태원 참사에 대한 국가의 태도가 대표적이다. 국민이 차별받아서는 안 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누가 국민인가라는 규정이다.

남성 징병제는 국민의 조건에 관한 제도지만, 돌봄 노동은 생물학적 차원과 사회적 차원 모두에서 인간이 살아가기 위해 필수적인 조건이다. 문명 이래 주로 여성이 이 노동을 해왔기 때문에 그 내용을 남성보다 잘 알고 있고, 여성주의자들은 돌봄을 인간의 조건으로 보편화하자고 제안한다.

돌봄은 성별을 초월한 삶의 조건

그래서 나는 군 복무와 돌봄 노동을 성별과 연결하는 모든 시도에 반대한다. 가부장제 사회의 변화 없이 여성의 사회진출을 추구하는 자유주의 페미니즘은 여성이 군인이 되는 것을 지지할 수 있다. 문제는 여성은 군대를 비롯한 공적 영역에 참여하고 있는데, 남성은 사적 영역의 노동에 종사하지 않는 불평등, 즉 여성의 이중 노동이다. 돌봄 노동 없이 인간은 하루도 살아갈 수 없고 사회는 돌아가지 않는다. 타인의 노동에 의존하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은 없다. 독립은 관념이다. 독립의 반대는 의존이 아니라 관계성, 상호 보살핌이다. 경영자는 노동자에게 의존하고, 깨끗한 집은 청소하는 사람의 노동에 달려 있고, 정치인은 국민의 지지에 의존한다.

병역의 의무가 일시적이라면, 돌봄 노동은 평생에 걸쳐 누구나 해야 하는 인간의 조건이다. 여성이 군대에 가든 안 가든, 돌봄 노동은 남녀 모두가 수행해야 한다. 병역은 이미 공적인 가치지만 돌봄은 아직 그렇지 않다. 공사 영역의 성별화(여성은 사적 영역에 적합하다는 통념) 대신 돌봄이 공적인 영역에서도 통용되는 중요한 가치로 합의되어야 한다. 병역이 국민의 조건이라면, 돌봄은 인간의 조건이다.

한국 사회에서 젠더는 더 이상 낯선 단어가 아니다. 문제는 젠더 문해력이 향상되기보다는 단어만 남발되고 있다는 점이다. 인간과 사회 현상을 이해하는 인식론으로서 젠더 문해력이 제고되어야 ‘젠더 갈등’도, 성차별도 해결할 수 있다. 젠더는 공부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고방식이 성차별의 첫 번째 원인이기 때문이다.

정희진 월간 오디오매거진 <정희진의 공부> 편집장

정희진 월간 오디오매거진 <정희진의 공부> 편집장

<정희진 월간 오디오매거진 <정희진의 공부>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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