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적

동료 시민

손제민 논설위원
‘나의 동료 시민들’이라는 제목이 붙은 미국 역대 대통령 취임 연설 모음집 표지.

‘나의 동료 시민들’이라는 제목이 붙은 미국 역대 대통령 취임 연설 모음집 표지.

미국 대통령들이 연설에서 즐겨 쓰는 ‘나의 동료 시민들(my fellow citizens)’은 한국에 건너오면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으로 번역됐다. 에이브러햄 링컨의 연설도, 존 F 케네디의 연설도 그랬다. 버락 오바마에 와서야 이따금 ‘동료 시민’이 함께 쓰였다. 그런데 한국 대통령들 입에서는 동료 시민이라는 말이 잘 안 나온다. 대통령이 그 국가 내에서 가장 윗사람이고 왕과 같은 존재라는 인식, 그 공동체 성원들을 자율적 주체로 보기보다 통치의 대상으로 보는 시각이 작용했을 것이다. 그것은 언론도 마찬가지다. 시민운동의 맥락이 아닌, 보통 사람들을 가리킬 때 시민으로 부르기를 꺼렸다. 은연중에 이 공동체를 그저 국가와 그에 종속된 구성원으로 보는 틀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 아닌가 싶다.

한동훈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이 지난 26일 연설에서 ‘동료 시민’을 여러 차례 입에 올렸다. 우선은 반갑다. 필자는 집합적 의미의 국민을 써야 할 때가 아니면 되도록 능동적·다원적 주체로서의 의미가 담긴 시민을 쓰려고 해왔다. 이따금 ‘왜 국민이라고 안 쓰느냐’고 항의하는 독자들에게 해명해야 했는데, 이번 기회에 이 말이 널리 퍼져 해명할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 더구나 점점 더 권위주의적 통치 행태를 보이는 대통령이 속한, 국민의힘이라는 당명을 가진 보수정당 지도자가 그 말을 여러 번 썼으니 말이다. 국가를 하나의 단일한 실체로 보지 않고, 자유로운 시민들의 연합체로 보는 듯한 한 위원장의 어휘 선택은, 좀 더 민주주의에 부합한다고 본다.

하지만 두고 볼 것이 많다. 그가 말한 동료 시민에 기득권을 비판하고 자기 권리를 위해 싸우는 모든 사람이 포함되는지, 그는 아직 행동으로 보여준 것이 거의 없다. 그가 차별에 항의하는 비정규직 노동자들과 장애인·성소수자·이주노동자, 그들이 만든 결사체까지 동료 시민으로 여기는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만약 한 위원장이 그 동료 시민으로 이미 법에 의해 충분히 보호되는, 그에게 호감을 가질 가능성이 높은, 한국 국적의 중산층 사람들을 주로 생각하고 있다면 그의 화법은 민주적 리더십의 표현이 아니라 또 하나의 한동훈식 스타일에 그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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