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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자의 작은 이야기] 나란히
새벽의 오한은 어깨로 오고 인후와 편도에 농이 오고 눈두덩이가 부어오고 영은 내 목에 마른 손수건을 매어주고 옆에 눕고 다시 일어나 더운물을 가져와 머리맡에 두고 눕고 이상하게 자신도 목이 아파오는 것 같다고 말하고 아픈 와중에도 그런 것이 어디 있느냐고 웃고 웃다 보면 새벽이 가고 오한이 가고 흘린 땀도 날아갔던 것인데 영은 목이 점점 더 잠기는 것 같다고 하고 아아 목소리를 내어보고 이번에는 왼쪽 가슴께까지 따끔거린다 하고 언제 한번 경주에 다시 가보았으면 좋겠다고 하고 몇 해 전의 일을 영에게 묻는 대신 내가 목에 매어져 있던 손수건을 풀어 찬물에 헹구어 영의 이마에 올려두면 다시 아침이 오고 볕이 들고 그제야 손끝을 맞대고 눈의 힘도 조금 풀고 마음의 핏빛 하나 나란히 내려두고

- 시 ‘나란히’, 박준 시집 <우리가 함께 장마를 볼 수도 있겠습니다>


엊그제는 면 소재지에 있는 우체국에 다녀오다, 달포 전 윗니를 뽑고 제법 돈이 든다는 이 시술을 앞둔 맹보살 집에 들렀다. 마침 재가노인지원 복지사가 다녀가고, 인지워크북이라고 써 있는 공책이 펼쳐져 있었다. 쟁반에 동그란 떡이 그려져 있고, 그 위에 미운 놈 ○ 하나 더 준다, 누워서 ○먹기다 등등이 써 있었다. 빈칸에 연필로 떡을 써넣어 빨간 색연필로 큰 동그라미를 받은 흔적도 보였다.

거의 다 동그라미를 받았는데, 호랑이 그림에만 칭찬용 동그라미가 없었다. 내가 보기엔 대한민국 지도같이 생긴 호랑이인데 맹보살은 새우란다. 아, 새우여서 왼편에는 색칠을 안 했구나 싶었다. 다시 보니 새우랑 흡사하기도 했다. 연잎차에 만두를 먹으며 맹보살이 칠하다 만 호랑이 새우를 함께 완성하고, 자목련집 언니네를 들렀다. 언니는 올해 내내 아프다. 특히 겨울 들어 더 심해지고 있다.

이눔의 팔이 암것도 못하것어, 행주도 못 짠다니께, 눈이 오니께 더 에리네, 인저 봉사도 못 다니겄어. 끙끙 앓으니께 아저씨가 자다가 팔을 주물르고, 자다가 깨서 만져주고 허는디, 날이 푹해져서 그런지 어젯밤은 좀 잔 거 가텨…. 언니 말을 들으며 나도 언니 팔을 주무른다. 만지고 누르는 데마다 작은 신음이 흘러나온다. 그 많은 고구마 다 캐고 그 많은 고추 다 따고 그 하많은 마늘 다 심었으니 안 아픈 게 이상하지…. 나는 속엣말로 중얼거린다. 의사가 어깨에서부터 만져가며 악, 소리 나게 아픈 부위에 주사기를 찌른다 했다. 아저씨랑 아들내미는 이 추운데 밖에서 저렇게 일하는디, 한번 병원 가면 10만원 푹 나가고 뭐 하나 찍으믄 몇십만원 푹 나가고, 미안해 죽겄어…. 물 질질 흐르는 행주를 싱크대에 걸쳐놨다더니 부엌은 정갈했다. 동생이 와서 언니를 앉혀놓고 설거지하고 청소해주고 한참 있다 갔다 했다.

올핸 “마음의 핏빛”이 맺힌 날들이 유난히 많았다. 막 꽃몽울 터트리려는데 우박이 쏟아지고, 나무가 클 만하면 서리가 내렸다고나 할까. 가까이 지내는 사람들도 많이 아팠다. 가까운 사람이 아프면 비슷한 증상이 따라오는 것 같다. 착하고 고생하고 돈까지 아쉬운 사람이 아프면 전염속도가 한층 빠르다. 아픈 와중에도 얘기하고 “웃고 웃다 보면 새벽이 가고 오한이” 가기는 가겠지. 새삼스레 꿈을 꾸어보기도 하고, 과거를 “묻는 대신 내가 목에 매어져 있던 손수건을 풀어 찬물에 헹구어” 옆 사람 “이마에 올려두면 다시 아침이 오고 볕이 들”기도 하겠다.

사철나무와 대나무와 측백나무 울타리에 희푸른 잎꽃이 피었다. 가장자리를 빙 둘러 서리를 올린 채 빛나는 잎들과 발목에 눈토시를 덮은 나무들이 햇빛을 받고 있다. 비닐하우스를 들추니 시금치와 근대와 상추마저 쌩쌩하게 살아 있다. 비닐 두 장 덮었을 뿐인데, 영하 18도 내려가던 강추위에도 푸릇푸릇하다. 마당에 서서 중얼거린다. “손끝을 맞대고 눈의 힘도 조금 풀고 마음의 핏빛 하나 나란히 내려두”는 아침이 오기를. 돌아가며 아픔을 돌보다 보면, ○○야 놀자, 친구처럼 봄이 문밖에서 소리쳐 부르기를.

김해자 시인

김해자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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