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투사 정치, 이준석(전 국민의힘 대표)다운 레토릭이다. “상대 정치 세력을 악의 상징, 빌런을 만들어 콜로세움에 세우는 검투사 정치”, 거대 양당의 전쟁 같은 정치의 본질을 꿰뚫은 면이 있다. 검투사 정치에서는 오로지 ‘너가 죽어야 내가 산다’는 검법만 존재한다. 거기에 대화와 타협을 통해 다기한 이해관계를 조정하고 사회 갈등을 해결하는 ‘정치’가 설 땅은 없다.
실제 2023년 정치는 ‘야당 대표 체포동의안’으로 시작해 ‘김건희 특검법’ 대치로 끝났다. 쟁점 법안은 야당의 일방 처리와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로 폐기되는 악순환이 반복됐다. 오로지 검찰 수사로 ‘이재명 민주당’을 끝장내려는 정권의 질주는 가혹했고, 다수 야당은 탄핵·해임안·특검법 등으로 맞서면서 대결정치는 극한으로 치달았다.
‘비토크라시’(Vetocracy)가 여의도를 지배하면서, 민생과 입법에서 여야 협치로 성과를 낸 경우는 찾기 힘들다. 공동체에 기여하는 정치, 문제 해결의 정치는 없었다.
지금 거대 양당이 하고 있는 것은 정치가 아니라 전쟁이다. 상대 정당을 경쟁자로 인정하지 않고 청산해야 할 적으로 삼는다. 적을 무찔러 이기는 것만이 목적인 게 전쟁이다. 전쟁 같은 정치에서 민생, 개혁, 정책, 가치와 비전 경쟁을 기대하는 건 참으로 무망한 일이다. 정치의 효용을 실감할 수 없으니 정치혐오, ‘반정치’가 득세하는 것이다.
9회말 투아웃에 구원 등판한 국민의힘 한동훈 비대위원장의 취임사는 ‘정치’가 아니라 ‘전쟁’의 문법이다. 야당에 대한 적의와 “싸우자”는 독전만 강렬하다. 2차 대전 당시 처칠의 ‘전쟁 연설’을 주로 인용한 것도 그렇다. 수직적 당정관계 수술과 내부 혁신의 능력이 아니라 대야 전투력이 ‘칼잡이’ 비대위원장을 ‘모셔온’ 이유일 터이다. 이제 한동훈 검투사가 이끄는 국민의힘과 ‘이재명 민주당’의 콜로세움 대결은 그야말로 선혈이 낭자할 수밖에 없게 됐다.
거대 양당만이 독점적 의석을 갖고 있는 구조에서 정치 양극화는 거대한 사회 분열을 불러온다. 양당의 증오정치가 지지층을 극한 대립으로 내몰고, 이게 다시 정치를 더 극단으로 내모는 악순환이다. 이대로 가면 필시 4월 총선은 “가장 극악한 진영대결로 펼쳐질 것”(홍준표 대구시장)이다.
상대 정당을 ‘닥치고 공격’하고 그 반사이익에만 기대어도 되니 양당의 자기 혁신과 정치개혁을 바라는 건 연목구어다. 극단정치를 내재화한 양당 구도를 허물지 않으면 한국 정치의 미래는 오지 않는다.
제3지대가 없는 극단적 양당 구도에서는 ‘전쟁 같은 정치’가 노멀이 될 수밖에 없다. 맹목적 이분법, 양자택일만 강요하는 독점적 양당 구도에서는 애초 공존과 타협의 정치가 들어설 공간이 비좁다. 노태우 정부 때 여소야대 4당 체제에서 협치가 가장 잘 발현되었다는 것은 시사하는 바 크다.
각종 여론조사에서 보면 무당층이 두 당의 지지율과 버금가는 비율로 존재한다. 갈수록 극단화되고 있는 양당 정치에 대한 실망이 새로운 정치 세력에 대한 갈망을 키우는 토양이 되고 있음이다.
거대 양당 체제를 깨려는 신당 창당이 이어지고 있다. 특히 여야의 전직 당대표가 깃발을 든 ‘이준석 신당’ ‘이낙연 신당’이 가시화되고 있다. 양당 모두 강경 노선이 득세하고, 사당화 조짐에 대한 반작용이 이들 신당의 동력이 되고 있다. 양당 체제 타파를 기치로 내건 ‘새로운 선택’도 출항했다. 제대로 가면 이들 신당들이 양당의 극단정치를 중화시킬 수 있다는 기대를 낳는다. 신당의 등장만으로도 양당의 변화 경쟁을 견인할 수 있다.
신당은 명멸했던 제3당의 역사에서 보듯 지난한 길이다. ‘적대적 공생’ 관계인 양당의 견제와 압력도 거셀 터이다. 사실 비례 선출방식 확정을 미루는 것도 신당들의 발목을 잡기 위한 양당의 묵시적 담합이기 십상이다.
단순히 ‘반윤석열’ ‘반이재명’만으론 신당의 공간이 열리지 않는다. 새로운 정치를 위한 가치와 비전, ‘누구’를 대변하고 ‘무엇’을 추구하는지를 분명히 제시해야 신당이 나아갈 수 있다. 양당과 차별화되는 신당의 존재 이유를 못 보여주면 시작만 창대할 수 있다.
비록 신당들이 양당 구도의 객토와 근원적 ‘정치교체’까지 주도하지는 못하더라도, 적대적 공생의 거대 양당 카르텔에 ‘균열’을 낼 수 있다면 정치발전에 값있다.
해서 누군가에게는, 선거 때마다 투표용지가 차악을 골라야 하는 ‘킬러문항’처럼 느껴지는 답답한 현실을 타개해주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