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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명이 신분인 사회

입력 2024.01.03 22:23

수정 2024.01.03 2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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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래 개인적으로 무명 가수들의 오디션 프로그램인 <싱어게인 3>를 즐겨 본다. 다른 프로그램과 달리, 음반을 낸 경험 있는 무명 가수들이 참여하는 경연이다 보니 참가자들의 실력은 담보되어 있다. 거기에 참가자들의 음악에 대한 열정과 개인의 사연까지 더해지면서, 자연스럽게 그들 노래에 주목하게 만든다. 그런데 가끔 그들의 음악보다 나의 귀를 더 사로잡은 것은 심사위원으로 참여한 가수 임재범이 내뱉는 “에휴…” 하는 낮은 탄식이다.

가수 임재범의 이 탄식은 주로 실력이 뛰어남에도 오랫동안 무명 생활을 해 온 참가자의 노래를 들을 때 터져 나온다. 이 탄식은 음악에 대한 열정으로 살아온 임재범 자신의 삶에 대한 반추이자, 뛰어난 실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무명으로 버텨 온 동료·후배 가수들에 대한 안타까움의 표현으로 읽힌다. 또한 더 이상 무명으로 버틸 수 없어, 마지막 한 번만 더 유명 가수에 도전하는 아픈 현실에 대한 탄식으로도 읽힌다.

1707년 음력 11월16일, 젊은 선비 엄경수의 탄식 역시 이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날 새벽, 엄경수의 집으로 김중진이라는 양민이 찾아왔다. 당시 엄경수는 부인 해산으로 다른 사람을 만나기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김중진에 대해 들은 말이 있어 쉽게 물리치지 못했다. 김중진은 비록 양반은 아니지만, 도학(道學·도덕 실천을 강조하는 조선 성리학)을 흠모했다. 이를 위해 그는 스스로 어렵게 글을 배워 도학 입문서인 <소학>을 읽을 정도였다. 그냥 읽는 게 아니라, 그 가르침을 실천하기 위해 오랫동안 수양을 게을리하지 않았다고 했다. 장사치였지만, 이익만 탐하는 장사꾼의 삶에 대해선 부끄러워했으며, 관청의 일이라도 옳지 않으면 그 일을 얻기 위해 굽신거리지 않았다. 그 와중에도 나이 많은 노모를 지극정성으로 섬겨 고을 전체가 그의 효행을 알고 있을 정도였다.

그런 김중진이 새벽 댓바람부터 엄경수 집에 발걸음을 했다. 한참을 망설이던 그가 입을 뗐다. 자신을 머슴으로 삼아 달라는 청이었다. 엄경수 입장에서 당황스러운 청이었지만, 들어보니 사정이 이해되었다. 장사치라고는 하지만 이익 내는 일에 관심이 없었고, 그러니 생계를 꾸리는 일이 힘들어졌을 터였다. 특히 그를 힘들게 한 것은 노모마저 봉양하기 힘든 여건이었다. 종살이라도 해서 생계를 꾸려야겠다고 마음먹은 이유였다. 오랜 고민 끝에 믿을 만한 양반이면서 일정 정도 경제력이 있는 사람을 찾았고, 그래서 그가 선택한 사람이 엄경수였다.(출전 : 엄경수, <부재일기>)

기록엔 없지만 엄경수 역시 “에휴…” 하며 탄식을 내뱉었을 듯하다. 양반이라 해도 돈벌이와 상관없이 유학적 이념만을 좇는 게 어려운 일인데, 양민 신분으로 그런 삶을 실천하고 있었으니 김중진의 삶이 얼마나 힘들었을지 짐작이 가능했다. 도덕적 가르침을 평생 실천한 김중진의 삶에 대한 경외와 그런 삶이 인정받지 못하는 사회 시스템에 대한 탄식이 교차할 수밖에 없었다. 이념적으로 도학의 실천이야 양반이 아니라도 해야 할 일이지만, 양반이 아니기에 그의 성취는 인정받지 못했다. ‘임시’ 조건을 붙여 머슴으로 받아들이고 품삯도 후하게 쳐주라 명했지만, 안타까운 마음은 어쩔 수 없었다. 노력보다 신분이 우선하는 사회였기 때문이다.

신분제가 사라진 지 이미 오래지만, 여전히 김중진과 동일한 선택을 해야 하는 우리 시대 많은 ‘무명인’들이 있다. 신분에 따라 삶과 행동양식이 결정되는 사회를 견뎌야 했던 김중진의 삶만큼이나, 노력만으로 꿈을 이룰 수 없는 우리 시대 다양한 분야 무명인들의 삶 역시 팍팍하기는 마찬가지다. 노력과 실력이 없어 발생한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무명인들 스스로 어찌할 수 없는 상황마저 조선시대 신분제와 닮았다. 이러한 상황에도, 앵무새처럼 노력과 공정만 외치는 사회가 바로 조선시대 신분제를 탈피했다고 자신하는 2024년 우리 사회다.

이상호 한국국학진흥원책임연구위원

이상호 한국국학진흥원
책임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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