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두환의 교육개혁

오창민 논설위원

조직에서 성과를 내는 방법의 하나는 상관과의 협력이다. 상관의 관심사를 파악해 그의 마음을 사로잡는 보고서를 적절한 시점에 들이미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독재자 전두환의 영향력을 가장 잘 이용한 사람은 일군의 교육학자와 관료가 아닐까 싶다.

12·12 군사쿠데타와 5·18 광주 학살로 주권을 찬탈했지만 전두환과 신군부 세력은 불안했다. 정국을 안정시키고 국민의 환심을 사려면 뭐든 해야 했다. 당시에도 학부모들은 자녀 과외비 때문에 허리가 휠 지경이었다. “과외만 잡아라, 그러면 대통령도 시켜준다”는 게 민심이었다. 군인들은 무지막지했다. 전 국민 과외금지를 추진하기로 했다. 고교 수준을 넘어 서울대를 비롯한 전국 모든 대학을 평준화하는 방안까지 구상했다. 교육개혁을 꿈꾸는 학자와 관료에겐 기회였다.

1980년 5월31일 전두환을 상임위원장으로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가 출범했다. 국보위는 입법·사법·행정부 위에 군림하는 초법적 기구였다. 반대하는 야당도, 시비를 거는 언론도 없었다. 여기서 2개월 만에 나온 것이 전격적인 과외금지 조치였다. 그러나 이는 빙산의 일각이었다. 국보위에 관여한 교육관료와 한국교육개발원 연구원들은 7월30일 발표한 ‘교육정상화 및 과열과외 해소 방안’을 통해 대학 입시의 틀을 완전히 바꿨다. 본고사를 폐지하고 예비고사와 내신만으로 신입생을 선발하도록 했다. 대학 입학정원은 1981년에만 10만5000명 증원을 추진했다. 신군부는 졸업정원제로 반정부 성향의 학생은 중간에 걸러내겠다는 의도였지만, 입학한 학생을 중도 탈락시키는 일이 쉽지 않다는 것을 교육 전문가들은 알고 있었다. 국립대 간 교수 교류제를 실시하고, EBS의 모태가 된 교육전용 방송도 도입했다.

교육관료가 경제관료에 압승을 거둔 것은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재무부(현 기획재정부)의 반발에도 문교부(현 교육부)와 국보위 문공분과위원회는 공동 작업으로 6년간 3조6986억원의 교육세 신설 방안을 확정하고, 같은 해 9월9일 대통령 전두환의 재가를 얻었다. 당시 한국의 국내총생산이 40조원 규모인 점을 감안하면 엄청난 금액이다. 용도가 지정된 교육세는 학교 시설과 교원 처우 개선이 목적이었다. 교육세법안은 1981년 국회를 통과하고 1990년과 2000년 개정을 거쳐 지금껏 이어지고 있다.

전두환의 온갖 패악질과 폭정에도 교육정책은 국민의 지지를 얻었다. 2000년 헌법재판소에서 위헌 결정이 났지만 지금도 기성세대는 과외금지 조치에 향수를 갖고 있다. 강압적이고 획일적인 입시정책이라는 비판을 받지만 그나마 1980년대가 개천에서 용이 나는 시절이었다는 평가도 있다. ‘7·30 교육개혁’으로 불리는 일련의 국보위 정책이 진정한 교육개혁인지, 전두환의 국면 전환용인지 논란이 있다. 교육학자와 관료가 권력자의 힘을 빌려 교육 난제를 해결해보겠다고 나선 것인지, 개인 영달을 위해 신군부 독재에 부역한 것인지 지금도 판단하기 어렵다. 다만 국보위와 전두환의 교육정책이 결과적으로 교육의 기본 구조를 바꾸고 교육 투자를 늘려 사회발전과 경제성장에 일익을 담당했다는 점은 부인하기 어렵다.

시간이 흘렀고 시대가 달라졌다. 교육재정은 여유가 생겼는데 이젠 학생이 턱없이 줄었다. 늘려놓은 대학 정원도 골칫거리다. 사교육비로 인한 학부모들의 고통과 학생들의 경쟁은 날이 갈수록 심해지고 있다. 계층 이동의 사다리 역할을 해야 하는 교육이 지금은 오히려 부의 대물림과 사회 양극화를 강화하는 기제가 됐다. 교육의 주체이자 교육개혁의 핵심 동력인 교사들은 교권 추락의 고통을 호소하고 있다. 그런데도 윤석열 정부의 교육개혁 작업은 뒷전이고, 교육관료와 학자들은 위축돼 있다. 대학수학능력시험 킬러문항 배제와 사교육 카르텔 척결이 교육계 최대 화두라는 것이 참담하기만 하다.

윤석열 대통령과 이주호 교육부 장관의 무능과 무책임 탓이 크지만 이들에 대한 비난만으로는 아무 일도 해결되지 않는다. <역사란 무엇인가>를 쓴 E H 카는 “개인의 도덕적 유죄를 열렬히 주장하는 사람은 때로는 무의식적으로 집단과 사회 전체에 면죄부를 주고 있는 것”이라고 했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교육개혁은 결국 시민의 몫이다. 시민들의 각성과 참여가 중요하다. 그래야 교육학자와 관료들을 견인하고, 정책 결정권자들을 강제할 수 있다. 현대사의 암흑기인 전두환 정권 시절에도 교육은 앞으로 나아갔다. 갑진년 새해가 교육개혁의 원년이길 기대한다.

오창민 논설위원

오창민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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