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에서 제1야당 대표가 괴한이 휘두른 칼에 무참히 쓰러졌다. 전국에 날것 그대로 방영된 섬찟한 폭력에 모두 소스라쳤다. 바로 그 순간 ‘속된 일상의 시간’이 멈췄다. 갈가리 찢겼던 정치 진영이 한목소리로 이 사건을 테러로 규정하고 강력히 규탄했다. 윤석열 대통령은 “테러라고 하는 건 어떤 것이든 간에 피해자에 대한 가해 행위, 범죄행위를 넘어서서 인간의 자유를 억압하고 자유 사회를 지향하는 모두의 적, 자유민주주의의 적”이라고 규정했다. 국민의힘 한동훈 비대위원장은 “우리 국민의힘은 모든 폭력을 강력하게 반대할 뿐만 아니라 진영과 상관없이 피해자의 편에 서서 행동하는 사람들”이라고 말했다. 더불어민주당의 권칠승 수석대변인은 “이번 사건은 이 대표에 대한 테러이며 민주주의에 대한 심각한 위협으로서 어떠한 경우에도 발생해서는 안 되는 일”이라고 말했다.
이러한 초일상적인 ‘연대의 시간’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정치적 이해관계의 득실을 전략적으로 따지는 일상의 세속 정치로 재빠르게 되돌아갔다. 다행히도 제1야당 대표가 목숨을 건졌던 것이 컸다. 이제 테러는 잊고 모두 정치판의 이해관계를 따지고 있다. 누군가는 개탄하지만, 이는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일이다. 자유민주주의에서 일상의 정치란 자기 정파의 이해관계를 내놓고 실현하려고 노력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매일 치고받고 싸운다. 그러면서도 상대방을 말살하려고 시도하지 않는다. 이는 전제주의 국가에서 정적을 절멸시키는 정치와 확연히 구분된다. 정치가 관객을 두고 벌이는 ‘사회적 공연’이 되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설사 이번 정치 싸움에서 지더라도 완전히 꺾이는 것이 아니다. 다음 싸움에서 더 좋은 정치상품을 만들어 유권자 관객에게 호소하면 된다.
그렇다 쳐도 ‘테러와 정치의 관계’를 근본적으로 따져보는 이가 드물다. 테러를 자유민주주의의 적으로 규정하면서도 국가주의 입장에 머문다. 현대 국가는 명확히 구획된 영토 안에서 합법적 폭력을 독점한 관료제다. 국가 덕에 모든 불법적 사적 폭력은 법으로 금지된다. ‘복수는 나의 것’이 아닌, ‘국가의 것’이 된다. 폭력에 의존하는 테러리즘이 멈추고 의사소통에 기반한 정치의 공간이 열린다. 1945년 해방 이후 합법적 폭력을 제대로 독점한 국가가 없었을 때 온갖 테러리즘으로 무장한 폭력이 횡행한 것을 기억하면 이해가 된다. 이렇게 보면 테러는 국가 이외 개인이나 집단이 불법적으로 휘두르는 물리적 폭력으로 좁혀진다.
9·11테러를 탐구한 문화사회학자 제프리 알렉산더는 다른 시각을 보여준다. 테러리즘은 세 가지 불안정을 만드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상징적 행위’다. 첫째, 핵심 지도자를 살해하고 당면한 정치과정을 뒤엎음으로써 ‘정치적 불안정’을 일으킨다. 둘째, 교환 네트워크를 파괴하고 공포를 조장해 불신이 정상이 되고 혼돈이 뒤따르는 ‘사회적 불안정’을 만든다. 셋째, 이러한 사회정치적 위협에 대처한다는 명분으로 당국이 핵심적인 제도들의 정당성을 어겨가면서 억압적 행위를 하도록 추동해 사회 전체를 ‘도덕적 불안정’에 빠트린다.
천만다행 제1야당 대표의 목숨을 앗으려는 시도는 실패했고, 정치적 불안정은 최소화되었다. 테러 방조자들의 사악한 시도가 잇따랐지만, 사회적 불안정과 도덕적 불안정도 나타나지 않았다. 그럼 단순한 우발적인 테러 ‘사건’으로 보면 되나? 국가가 합법적 폭력을 더욱 완벽하게 독점해서 핵심 지도자에 대한 경호를 절대 강화하면 그만인가? 국가주의자가 갈수록 국가를 장악해나가는 현실은 이와 다른 추악한 진실을 드러낸다. ‘주적’을 제거하기 위해 끊임없이 전쟁을 벌여 정치를 말살하고 테러를 길러낸다. 물리적 폭력의 외피를 뒤집어쓴 테러는 사실 ‘영혼의 폭력’이다. 우리 사회의 영혼을 얼마나 허약하게 봤길래 이따위 테러를 배양하고 저지르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