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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이 있어 여기까지 왔다

입력 2024.01.21 20:15

수정 2024.01.21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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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랫동안 마을 사람들이 한데 모여 따뜻한 밥 한 그릇 나누어 먹을 곳이 없어 애태우다, 2019년에 마을회관을 지었다. 지금 생각해도 그날이 봄날 연둣빛 새순처럼 새록새록 떠오른다.

농촌 마을은 몇가구 이상 모여 살면 나라에서 마을회관을 지어 준다. 그런데 마을회관 지을 터는 마을에서 구해야만 했다. 그런데 내가 이 마을에 들어오고 13년이 지나도록 그 터를 구하지 못해 애를 먹었다. 2017년 어느 날, 마을회관 지을 수 있는 터를 하동 할머니가 내어 주셨다. “갈수록 마을 사람들이 나이 들고 몸도 불편한데 함께 쉴 수 있는 곳이 필요하다”며 그냥 내어 주셨다. 나는 그 말을 듣고 어찌나 기쁜지 밥을 먹지 않고도 배가 부르고 잠까지 설쳤다.

그러나 마을회관 지을 터에 언덕이 있어 굴착기로 평탄 작업을 하고, 언덕 쪽에는 큰 돌을 쌓아야만 했다. 그래야만 큰비가 와도 언덕이 무너지지 않기 때문이다. 한평생 농사밖에 모르고 살아온 가난한 마을 사람들은 집집마다 기쁜 마음으로 기금을 냈다. 그리고 오래전에 마을을 떠난 분들도 마을회관 짓는다는 소식을 듣고 곳곳에서 기금을 보내 주셨다. 그 덕으로 토목 공사를 시작했다.

합천군과 가회면 담당 공무원 그리고 고마운 분들의 정성으로 마을회관을 다 짓고 나서 주방 비품을 사러 가던 날, 설렘과 기쁨에 찬 어르신들 얼굴을 잊을 수가 없다. 그런데 마을회관을 짓기까지 도와주신 분들 모시고 잔치를 열려고 준비하고 있는데, 지구촌에 코로나19가 터졌다. 마을회관을 다 지어 놓고도 들어가서 밥 한 그릇 제대로 나누지 못하고 몇해가 그렇게 흘러갔다.

2024년 새해를 맞아 마을 사람들이 모여 올해는 돈이 들더라도 마을잔치를 열자고 뜻을 모았다. 그래서 지난 16일에 윗마을 어르신들과 면사무소 직원들, 농협 직원들을 초대해 점심을 나누어 먹었다. 손님들이 오순도순 모여 앉아 점심을 드시며 덕담 나누는 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으니 참으로 흐뭇했다. 밥을 굶고 사는 시절이 아니라서, 밥 한 그릇 나누어 먹는 게 무어 그리 대단한 일은 아니다. 그렇지만 ‘밥’이 있어 여기까지 왔다는 생각을 하니, 밥 앞에 저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100가지 곡식 가운데 쌀(밥)이 으뜸이다. 죽은 사람 입에 넣어 준다는 쌀. 그래서 저승까지 가지고 간다는 쌀. 100가지 약보다 좋다는 쌀. 나누어 먹으면 먹을수록 이웃을 도울 줄 아는 착한 마음이 저절로 생긴다는 쌀. 수천년 우리 겨레의 목숨을 이어 온 쌀. 사람은 쌀로 지은 밥을 나누어 먹어야 한다. 흩어진 식구들 한데 모으는 밥. 산 사람 죽은 사람 이어 주는 밥. 밥을 나누어 먹어 본 사람만이 사람 귀한 줄 알고 깊은 정이 무엇인지 안다.

물 한 방울 귀한 가뭄 때 논물을 서로 대려고 고함지르던 이웃들도, 험담하는 소릴 듣고는 두 번 다시는 안 볼 사람처럼 돌아서던 이웃들도, 밥상 앞에 앉으면 마음이 가라앉는다. 온갖 미움과 원망도, 그 어떤 실수와 잘못도 그냥 이해하고 용서한다. 농촌 공동체 속에서는 서로 나누고 섬기지 않으면 기쁜 마음으로 살아갈 수 없으며, 살아도 산 것이 아니다. 2024년 새해에는 더 자주 모여 밥을 나누어 먹어야겠다. 우정과 사랑이 넘치도록!

서정홍 산골 농부

서정홍 산골 농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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