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재홍 시인의 시집 <울주 반구대 암각화에 사는 긴수염고래> 표지. 장애인인식개선오늘 제공
“울주 반구대암각화 들어앉아 긴수염고래가 되어 살아도 나를 사냥하는 사람들이 옆에서 무리 지어 살아도 통점 없는 깊은 바다를 더듬고 오늘을 폭풍에 휩쓸려 살아도 들숨과 날숨을 다해 당신을 향해 숨 가쁘게 내어놓은 햇살 한 줌에 기쁘게 적멸(寂滅, 번뇌의 세상을 완전히 벗어난 높은 경지)에 들겠습니다.”
중증장애인인 박재홍 시인이 최근 펴낸 시집 <울주 반구대 암각화에 사는 긴수염고래>(시산맥사)의 표제 시이다.
이 시의 화자인 ‘나’는 ‘울주 반구대 암각화에 들어앉아 사는 긴수염고래’이다. 긴수염고래는 무서운 파도가 휘몰아치는 바다에서, 때로는 폭풍에 휩쓸리기도 하고 포경선의 위협에 직면하기도 하는 부단한 고난의 여정을 살아가게 된다. 그런데 긴수염고래인 화자는 이러한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들숨과 날숨을 다해 당신을 향해 숨 가쁘게 내어놓은 햇살 한 줌에 기쁘게 적멸에 들겠다”는 다짐을 한다.
시인이며 문학평론가인 박남희는 “그 고래가 깊은 바다에서 떠돌다 ‘햇살 한 줌’을 위해 물 위로 떠 오르는 것은 시인의 내면의 바닷속에 떠돌던 언어가 시의 형체를 띠고 제 모습을 드러내는 것과도 같다”고 분석했다.
그는 이어 “박재홍의 시는 지난한 가족사의 기억에 뿌리를 두고 있으면서도 시인의 기억이 자연이나 고향의 원형성을 지향하고 있다는 점에서 근원적이다”라면서 “이 시집의 표제 시인 ‘울주 반구대 암각화에 들어앉아 사는 긴수염고래’는 척박한 환경 속에서 목숨을 걸고 시를 쓰는 시인의 은유적 표현”이라고 평가했다.

박재홍 시인. 장애인인식개선오늘 제공
전문예술단체 ‘장애인인식개선오늘’의 대표로 활동하고 있는 박 시인은 이번 시집에 대해 “각시투구꽃처럼 슬픈 이야기들이 녹아 치사량에 이른, 독즙 같은 시집”이라고 말했다.
시집에는 ‘상수리’, ‘자해’, ‘날궂이’, ‘도망치고 싶다’ 등 50여 편의 시가 실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