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그대의 냄새를 맡으니 향기가 범상치 않고 그대의 손을 만져보니 솜처럼 부드럽습니다.”
<삼국사기> ‘열전 온달’의 한 귀절이다. “온달과 결혼 할래!”를 외치다가 쫓겨난 평강공주가 누추한 온달 집을 찾았다.
온달은 부재중이었다. 시각장애인인 온달의 노모는 공주가 들어서자 몸에서 나는 향을 느꼈다. 노모는 솜처럼 부드러운 공주의 손을 잡고 “그대처럼 천하의 귀한 분이 올 곳이 못된다”고 했다.
■평강공주의 몸에서 향기가 났다
하기야 공주로 태어나 ‘불면 날아갈세라, 만지면 터질세라’ 궁궐에서 고이 자란 분이 아니던가. 그런 분이 누추한 온달의 집을 방문했다. 그랬으니 몸에서 향기가 나고, 손은 솜처럼 부드러웠을 수도 있다. 그러나 달리보면 어떨까.
공주가 향이 나는 분을 발랐거나, 혹은 향주머니를 지녔을 수도 있다. 또 공주가 각종 세안제를 발라 ‘솜처럼 부드럽고 매끄러운 손’을 갖게 된 것일 수도 있다. 6세기 중엽 편찬된 <제민요술>(농업기술서)는 “고운 등겨를 끓인 물로 손과 얼굴을 씻고 문질러 말린 다음 향유와 성분이 비슷한 면지와 손약을 발라 피부를 부드럽고 매끈하게 만든다”고 했다.
평강공주 만큼은 아니더라도 한반도와 그 이북에서 터전을 잡고 살던 사람들은 예부터 ‘깨끗하다’는 소리를 들었다.
<삼국지> <후한서> <북사> <남사> <양서> 등 당대의 중국사서는 고구려인 이야기를 쓰면서 빼먹지 않은 구절이 하나 있다. ‘고구려인들은 깨끗함을 좋아한다(潔淸自喜 혹은 潔淨自憙)’는 것이다.
비단 고구려 뿐이 아니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한’조는 “변진 사람들은 머리카락이 아름답고 의복이 깨끗하다”고 했다.
<양서>와 <남서>는 “백제인들은 키가 크고 깨끗하다”고 썼다. 중국 입장에서 이른바 ‘동이족’은 ‘깨끗한 사람들’로 인식되었던 것이다. 오죽하면 500여년 뒤 고려를 방문한 송나라 사신 서긍도 “옛 사서에 ‘고려인들은 모두 깨끗하다’고 했는데, 와서 보니까 과연 깨끗하다”고 했을까. 서긍은 “그런 고려인들은 ‘중국인들은 때가 많다’고 손가락질했다”고 전한다.
한마디로 고구려를 비롯해서 백제·신라 뿐 아니라 고려에 이르기까지 ‘깔끔쟁이’ ‘멋쟁이’로 통했음을 알 수 있다.
■가체머리, 애교머리…
그래도 ‘증거를 대라’고 끝끝내 반론을 제기하는 이들도 있겠다. 그런 의심쟁이들에게 줄 결정적인 증거자료가 있다.
고구려 고분벽화이다. 마침 국립중앙박물관이 간행하는 <고고학지>(29집·2023년 12월)에 관련 논문(전호태 울산대 교수의 ‘고분벽화로 본 고구려인의 화장과 화장품’)이 실렸다. 그 김에 한번 살펴보기로 한다.
우선 고분벽화에서 보이는 고구려인들의 헤어스타일부터 잠깐 훑고 지나가자. 헤어스타일은 엄청 다양하다.
먼저 안악3호분의 여주인과 시녀에게서 보이는 헤어스타일(‘고리튼 머리’)을 한번 살펴보자.
357년 축조된 안악3호분의 주인공을 두고 ‘고국원왕설’(북한학계)과 ‘동수설(중국계 귀화인·남한학계)’ 등이 맞서고 있다. 어떤 경우든 고구려 최상층의 고분이다. 그래서인지 등장 인물들의 헤어스타일이 예사롭지 않다.
‘여주’(여주인공)는 조선시대 떠구지(가체 위에 장식한 나무틀)처럼 고리 같이 생긴 틀을 가체 안으로 통과시켜 연결하고 여기에 각종 장식을 달아 마무리했다. ‘여주’ 옆에 보이는 시녀들도 장식이나 형식에서 다소 차이는 있지만 비슷한 헤어스타일을 과시하고 있다. 주방, 우물가, 푸줏간, 방앗간 등에서 일하는 여인들도 비슷하다. 다만 장식품이나 일부 꾸미는 방식에서 약간의 차이를 나타낼 뿐이다. 안악3호분 시대, 즉 4세기 중반을 풍미한 고구려인의 헤어스타일을 짐작해볼 수 있다.
이밖에 하늘을 나는 천녀와 주악녀 등에서 보이는 ‘비천계’도 보인다. 중심에 고리를 만들고 뒤와 옆으로 내린 날개 같은 헤어스타일이다. 무용총(거문고 타는 여인)과 덕흥리 고분(완함을 연주하는 여인)에서 보인다.
또 쌍영총 벽화에 등장하는 여인들은 머리를 튼 ‘얹은 머리’를 하고 있다. 안악2호분의 여인은 가체를 얹으면서 머리숱을 풍성하게 보이게 했다. 삼실총 벽화의 ‘얹은머리’ 여인은 상당히 맵시있게 처리된 스타일을 뽐내고 있다. 덕흥리 고분의 여인은 머리 형태를 아주 간결하게 돌돌 말아 정수리 위에 올려 고정한 ‘뭉치머리’를 선보이고 있다. 시쳇말로 ‘똥머리’ 스타일이다. 덕흥리 고분과 수산리 벽화분의 인물들은 ‘쌍상투 머리’를 하고 있다. 주로 신분이 낮은 하녀나 광대들 같다.
또 무용총의 시녀와 무용수는 머리를 뒤로 내린 ‘채머리’ 스타일이다. ‘푼기형 머리’도 있다. 삼실총에서 보듯이 뒤로 빗어 넘긴 상태에서 양쪽 볼과 귀 사이로 애교머리처럼 흘러내리도록 한 스타일이다.
■빨간 색, 검은 색 립스틱
그렇다면 화장은 어떨까. 화장한 인물들이 보이는 가장 오래된 벽화고분은 역시 356년 축조된 안악3호분이다.
앞서 밝혔듯이 안악3호분은 등장 인물들의 헤어스타일, 즉 화려한 ‘고리튼 머리’가 돋보이는 고분이다.
그런데 이 고분의 ‘여주’와 오른쪽 시녀를 보라. 아랫 입술만 점찍듯 빨간 립스틱(연지)을 칠했다. 윗입술은 까맣다.
반면 왼쪽 두 시녀는 아래 위 입술이 모두 붉다. 또 방앗간, 주방, 우물가, 푸줏간에서 일하는 여인들의 입술도 빨간 립스틱을 점찍듯 칠했다. 덧붙여 등장인물들의 얼굴은 백분을 바른 듯 하얗다. 또한 눈썹 모양도 마치 그린 듯 또렷하다.
우선 립스틱을 살펴보자. 왜 어떤 이들은 아래 위 입술을 모두 빨간 립스틱으로 칠하고, 또 어떤 이들은 ‘아래=빨간’, ‘위=검은 색 립스틱(혹은 맨 입술)’으로 했을까. 여기서 전호태 교수가 당나라 시인 백거이(772~846)를 소환한다.
“검은 연지 입술 위에 칠하고…희거나 검거나 본 모습 잃어 화장이 끝나면 울고 있는 것 같네….”(백거이의 ‘시세장’)
8~9세기까지도 검은 립스틱(연지)도 화장법의 하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6세기 편찬된 농서인 <제민요술>은 “연지(립스틱) 주된 재료는 소의 골수인데, 잇꽃(홍화) 추출물인 ‘홍’을 넣으면 붉어지고, 다른 것을 넣으면 넣은 것의 색이 된다”고 했다. 이제야 안악3호분의 ‘여주’와 일부 시녀가 아래는 빨간, 위는 까만 립스틱을 찍은 이유가 드러난다. 각자의 취향에 따른 화장법이었던 것이다.
■하얀 분 바르고, 눈썹 밀어 그리고…
또 안악3호분의 등장 인물이 얼굴이 허여멀건하고, 눈썹이 그린 듯 또렷한 이유는 무엇일까.
전국시대 초나라 애국시인 굴원(기원전 343~278)의 시(‘초사’)를 보자. “백분 바른 얼굴, 검게 그림 그린 눈썹에서 아름다운 향기가 나고 윤기가 흐른다”고 읊었다. 안악3호분 시대보다 700년이나 앞서, 눈썹을 그리는데 쓰인 화장먹과, 얼굴을 하얗게 만들 백분(白粉)이 존재했음을 알린다.
무엇보다 <제민요술>에 “백분 상자에 정향을 가득 넣어두면 분에서 향기로운 냄새가 난다”는 구절이 있다는 것이 흥미롭다. 고구려 평강공주의 몸에서 향내가 났다는 게 과장이나 거짓이 아니라는 얘기다.
안악3호분 여인들의 잘 장돈된, 매끈한 눈썹은 또 어떤가. 후한시대 유희(생몰년 미상)이 지은 <석명>은 “눈썹 화장은 눈썹 위에 먹으로 그리는 것이 아니라 눈썹을 깎아낸 뒤 그 위에 그려넣는 것”이라 했다.
물론 안악3호분의 화가가 자의적으로 눈썹을 또렷하게 그렸을 수도 있다. 그러나 <석명>의 설명대로 눈썹을 밀고, 그 위에 깔끔하게 그려넣는 것이 당대 고구려의 화장법일 수도 있다. 이와같은 입술 립스틱 장면은 지안(集安)의 벽화고분인 각저총(5세기 전반)의 시녀들에게도 보인다.
■양귀비 손수건은 빨개~
비단 백분과 연지(립스틱) 뿐이 아니다. 안악3호분의 시대보다 50여 년이 지나자 유행이 진화한다.
5세기초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평남 순천 동암리벽화분의 귀족부인과 시녀의 얼굴에는 입술연지 외에 볼연지가 보인다.
5세기 전반의 연탄 송죽리벽화분에는 뒤로 묶은 헤어스타일의 마부가 등장한다. 이 마부의 볼에 홍조가 띄었고 입술도 붉다. 헤어스타일 등으로 미뤄보면 영락없는 여성일 수도 있다. 그러나 마부라는 역할을 감안한다면 남성일 가능성도 짙다.
붉게 얼굴 화장을 한 경우는 중국에서도 단적인 예를 찾을 수 있다. 즉 “당 현종(재위 712~756) 때 양귀비(719~756)가 땀을 닦은 손수건은 언제나 복숭아 빛으로 물들었다”(<개원천보유사>)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당나라 시인 이산보(미상)의 시(조춘미우·早春微雨)’는 “너울너울 춤추는…소맷자락…붉게 화장한 두 볼엔 빨간 땀방울 방울방울 떨어진다”고 읊었다. 당대 중국에서도 ‘볼빨간 화장’이 유행했다는 얘기다. 홍연지는 잇꽃(홍화)를 재료로 삼아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상현달·매화꽃 문양 곤지
5세기 중엽이후 조성된 고분의 등장인물 중에는 입술+볼연지 외에도 곤지까지 붉게 칠하는 경우가 생긴다.
남포 옥도리 벽화분과 순천 천왕지신총, 남포 수산리벽화분, 쌍영총(5세기 말·귀족부인) 등이 그렇다.
그런데 볼연지를 둥글게 찍는 곤지 중에는 상현달(둥근 반달) 모양으로 변화를 준 경우(옥도리 벽화분)도 있다. 또 천왕지신총의 귀족부인은 꽃모양 곤지로도 볼 수 있는 문양이 보인다.
당나라 때 편찬된 <장태기>는 “(남북조 시대) 송 무제(363~422)의 딸인 수양공주가 이마 한가운데 매화를 그린 것에서 유래하여 수 문제 때 궁중여인들이 얼굴을 오색화로 장식했다”고 했다.
이와같은 색다른 화장법이 고구려에 전해졌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시대 고구려에서 자생·유행하지 말라는 법이 없다.
이마에 연지를 넣어 꽃모양은 물론이고, 옥도리 벽화분처럼 상현달 모양도 그렸을 수 있다. 고구려 독자적인 화장법일 수도 있다는 얘기다.
■볼빨간~화장
고구려 화장법 중에서 눈길을 끄는 벽화가 둘 있다. 하나는 남포 쌍영총 널길 벽화이다.
벽화에 등장하는 두 여인(시녀로 추정)의 화장이 인상적이다. 볼과 입술에 연지를 바르고 눈썹 밑에 짙은 색조 화장을 했다. 또 장천 1호분의 등장인물을 보라. 예불 중인 남녀 가운데 여자(귀족여인)는 립스틱을 바르고 얼굴은 옅은 화장을 했다.
그런데 공연을 펼치고 있는 오현금 연주자와 무용수는 어떤가.
오현금 연주자는 얼굴에 흰 분을 바른 다음 그 위에 짙은 색의 홍연지와 곤지 화장을 더했다.
무용수는 더하다. 얼굴 전체가 짙은 홍조, 즉 ‘볼빨간~’이다. 악기 연주자와 댄서 등은 공연을 위해 무대분장을 한 셈이다.
이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붉은 색을 내는 홍연지가 고구려에서 독자기술로 개발되고 대중화했음을 웅변하고 있다.
만약 홍연지가 보이는 순수한 수입품이라면 평범한 무용수나 시녀가 그렇게 짙게 바를 수 있겠냐는 것이다.
5세기 중엽 즈음 전성기를 맞이한 고구려에서 잇꽃(홍화·연지의 재료)의 재배와, 거기서 얻은 홍연지·홍분의 제조·유통이 대중화 했음을 알 수 있다.
■짙은 화장 속 꽃미남
여성은 그렇다치고 남성은 어떤가. 고구려는 아니지만 신라에 심상치않은 기록이 있음을 알고 있다.
<삼국사기>는 <신라국기>를 인용해서 다음과 같은 기록을 전한다. <신라국기>는 768년(혜공왕 4) 당나라 사절단의 일원으로 신라를 방문하고 돌아간 고음(생몰년 미상)이 편찬한 신라 견문록이다.
“<신라국기>에는 ‘신라가 귀인 자제 가운데 아름다운 이를 선발하여 분을 바르고 곱게 꾸며 이름을 화랑이라고 했고, 나라사람들이 모두 떠받들며 섬겼다’는 기록이 있다.”(삼국사기> ‘신라본기·진흥왕’)
신라 시대 화랑은 짙은 화장을 한 ‘꽃미남’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신라만 그런 것이 아니다.
고구려 고분벽화에 등장하는 거의 모든 남성들이 얼굴에 하얀 분을 바르고 입술에 ‘빨간 립스틱’까지 발랐다.
예컨대 가장 이른(357년) 안악3호분 벽화 무덤주인과 신하들, 행렬도의 인물들을 보라. 입술이 또렷하고 붉다. 남포 덕흥리·순천 동암리·수산리·지안 삼실총·개마총 벽화분의 남자들도 마찬가지다. 연탄 송죽리 벽화분에 그려진 마부는 만약 남성이라면 어떤가. 여성의 미모가 연상될 정도로 얼굴선이 곱고 희며 입술은 붉다.
■백분거사의 화장법
비단 고구려·신라 뿐이 아니라 당대 중국 남성들도 마찬가지였다.
남조 송나라 때 인물인 유의경(403~444)의 <세설신어>는 “삼국시대 관료 겸 사상가인 하안(193?~249)이 늘 분통을 지니고 다니며 얼굴에 바르고 남에게 어떻게 보일까 신경 썼다”고 했다. 또 같은 유의경의 <유명록>은 ‘시장에서 백분 파는 아가씨에게 흠뻑 빠져 매일 백분을 사갔던 부잣집 아들’을 소개하고 있다.
이밖에 안지추(531∼591)의 <안씨가훈>은 “재산깨나 있고, 신분 지위가 있는 (남북조) 양나라 사내들은 너나없이 향내를 옷에 쐬고 수염을 말끔히 밀었으며, 분 바르고 연지를 찍었다”고 개탄했다.
이후 수나라와 당나라의 시인·묵객들이 늘 백분통을 지니고 다니며 ‘얼굴에 톡톡’ 거렸다. 그러니 고구려 고분의 남성들 역시 화장하지 말라는 법이 없다.
참 예전에는 고구려 벽화고분 하면 주로 무덤 주인공이 중국인이니 고구려인이니 하는 문제로 논쟁을 벌였던 기억이 난다. 사실 지금도 그 논쟁은 잦아들지 않고 있다.
그러나 요즘같은 글로벌 시대에 국적을 둘러싼 설왕설래는 얼마나 ‘시대착오적인 논쟁’인가.
예컨대 안악3호분의 ‘동수’나 덕흥리 고분의 ‘진’이 중국인 망명객이라 치자. 그렇다손치더라도 고구려에 귀화해서 수십년간 이 땅에서 터전을 잡고 묻혔다면 고구려인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이제 그런 논쟁 말고, 벽화 속에 담겨있는 1500년전 고구려인들의 삶 속으로 퐁당 빠져보자. 벽화에 그려진 고구려인의 풍속도를 찬찬히 살펴보자. 한가지만 보더라도 그렇게 유행했던 남성 화장이 1500년만에 서서히 부활하고 있지 않은가.(이 기사를 위해 전호태 울산대교수가 도움말과 자료를 보내주었습니다.) 이기환 히스토리텔러
<참고자료>
전호태, ‘고분벽화로 본 고구려인의 화장과 화장품’, <고고학지> 29집, 국립중앙박물관, 2023
이은주, ‘고구려 벽화에 나타난 여성들의 머리 형태 연구-고리 튼 머리와 얹은 머리를 중심으로’, 조선대 석사논문, 2008
김용문, ‘벽화에 나타난 고구려의 머리모양과 화장문화’, <고구려발해연구> 17권, 고구려발해학회, 2004
유지효, ‘한국여성의 전통화잔문의 연구’, 전남대 박사논문, 2005
박보영·황춘섭, ‘한국, 중국, 일본 여성의 색조화장문화’, <복식> 39권, 한국복식학회, 19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