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 ‘재의요구권’ 행사…거부된 법안 당사자들 목소리
기울어진 삶에 정치가 응답하길 바라는 국민들은 여의도 국회로 모인다. 이들의 뜻은 국회 입법으로 결실을 맺는다. 그러나 국회 본회의를 통과해도 끝이 아닌 경우가 있다.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해 4월 양곡관리법 개정안에 처음 재의요구권(거부권)을 행사한 이후 간호법 제정안·노란봉투법·방송3법·쌍특검법에 잇따라 거부권을 행사했다. 윤 대통령은 지난 9일 국회를 통과한 이태원참사특별법에 대해서도 거부권 행사를 저울질하고 있다.
경향신문은 22일 양곡관리법 개정안·간호법 제정안·노란봉투법(노조법 2·3조 개정안)·방송3법 개정안 이해당사자들의 목소리를 들었다. 이들은 “거부권 (행사) 이후 국가가 개인 삶을 나아지게 해줄 거란 기대를 저버렸다. 대통령이 말하는 국민에 우리는 포함되지 않는 것이냐”고 했다.
노동자 요구에 안 밀리겠다
대통령 인식 깔린 건 아닌지
국가에 대한 기대 저버려
코로나 때 인력 부족 겪고도
간호사 양성 위한 법 외면
대통령에 배신감 느껴
■ “대통령이 말하는 국민에 노동자·서민은 포함되지 않나”
20년차 택배노동자 이진성씨는 2022년 2월 CJ대한통운 본사 점거에 나선 노동자 중 한 명이다. 당시 택배노조는 ‘원청과 직접 교섭을 원한다’며 20여일간 대한통운 본사를 점거했다. 정치권의 중재로 농성은 일단락됐지만 이후 본사는 노동자들을 상대로 20억원의 손해배상 소송을 냈다. 이씨의 일상도 이때를 기점으로 달라졌다.
이씨는 집에서 ‘손해배상’ 이야기를 쉽사리 꺼내지 못했다. 가끔 혼자 집에 남아 있으면 곳곳에 가압류 딱지가 붙는 모습이 떠올랐다고 한다. 이씨는 이날 통화에서 “손해배상에 시달리다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은 동지들의 이야기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자꾸 부정적인 결말이 생각나니 그런 이야기는 잘 안 한다”고 했다.
이씨는 자신과 같은 사례가 더 있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지난해 노란봉투법 입법 투쟁에 동참했다. 노란봉투법은 원청의 교섭의무를 강화하고 개별 노동자에 대한 손배 소송을 제한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씨는 “원청이랑 대화를 할 수 있었으면 우리가 본사를 점거할 일도, 내가 업무방해로 손해배상을 질 일도 없었을 것이다. 인생이 지금과 달랐을 것”이라고 했다.
지난해 11월 국회에서 야당의 단독처리로 법안이 통과됐을 때 이씨는 쉽사리 웃지 못했다. 정부의 ‘반노동 기조’를 잘 알기 때문이었다. 이씨는 “주변에서 거부권을 행사할 거라는 말이 들렸다. 그럼에도 절박한 현실에서 기대를 버릴 수는 없었다”면서 “‘국민이 옳다’고 한 대통령의 말을 믿고 싶었다”고 했다.
이씨의 기대는 빗나갔다. 윤 대통령은 지난해 12월 경제위기가 촉발될 수 있다는 이유를 들며 거부권을 행사했다. 거부권 행사 이후 이씨의 일상은 그대로다. 원청과의 교섭은 여전히 ‘현실과 동떨어진 일’이다. 보건의료노조 경희대지부장인 간호사 이은영씨는 27년간 병원에서 일하면서 스스로를 ‘병원의 관리 대상’으로 여겼다. 국가에서 간호사를 어떻게 양성하는지에 대해선 관심을 쏟을 겨를이 없었다.
2022년 간호법 제정 논의가 본격화하자 이씨의 생각도 달라졌다. 이씨는 “그간 간호사들이 뭉쳐서 국가를 향해 목소리를 낸 적이 없었다. 간호법 초안을 보고 ‘국가가 간호사를 위해 뭔가를 하는구나’ 싶어 가슴이 뛰었다”고 했다. 이씨는 간호법 관련 기자회견·간담회 등에 참석해 간호법 필요성을 알렸다.
이씨는 간호법이 통과되면 의료계 전반에 도움이 될 거라고 믿었다. 간호법은 간호사가 의료기관뿐 아니라 지역사회에서 활동할 수 있도록 한다. 간호사의 활동영역이 확대되면 고령화와 지역 의료격차 등에 대응할 수 있다는 게 이씨 생각이다. 그는 “경제적으로 넉넉지 못한 만성질환자 중 상당수는 집에서 통원 치료를 받는다. 현행법으로는 그들을 돌보는 데 한계가 있다”면서 “‘우리가 환자들 곁으로 가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는데 간호법에 그 내용이 담겨 있었다”고 했다.
거리로 나가 목소리를 내면서 ‘간호법 제정’에 대한 확신도 강해졌다. 여론도 우호적이었다. 현장에서도 ‘병원에 꼭 직접 와야 하느냐’는 보호자·환자들의 불만을 숱하게 접한 터였다. 그러나 지난해 5월 윤 대통령이 “국민 건강에 대한 불안감을 초래한다”며 간호법 제정안에 거부권을 행사하자 이씨의 바람도 물거품이 됐다. 이씨는 “코로나 사태 때 의료인력 확충이 얼마나 중요한지 겪었으면서도 간호사 양성을 위한 법안에 거부권을 행사한 것은 예상 밖이었다. 대통령에 대한 배신감이 엄청났다”고 했다.
‘할 수 있다’는 효능감은 무기력으로 바뀌었다. 이씨는 “개인이 하지 못하는 걸 정책으로 해결해줄 수 있을 줄 알았다. 우리가 앞으로 뭔가를 할 수 있을까 싶다”면서 “이후 ‘우리에게 국가가 있는 걸까’라는 생각을 자주 한다. 이제 각자도생할 수밖에 없다고 느낀다”고 했다.
생존 위한 최저보장선 요구
엄청난 특혜처럼 호도
정치권 향한 불신 더 커져
정권 따라 흔들리는 방송
박민 사장 취임 뒤 현실화
구조 개선 싸움 계속할 것
■ “청년·자영농 위기인데 대기업 배불리기에만 집중”
전남 화순에서 28년째 쌀농사를 짓는 오순이씨는 2022년 하반기를 악몽같은 순간으로 기억했다. 쌀값이 전년 대비 20% 가까이 폭락하자 정부는 부랴부랴 쌀 수매에 나섰다. 오씨도 정부의 공공비축미 매입으로 위기를 넘겼다.
급한 불은 껐지만 쌀농가의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오씨는 “해마다 벼 경작면적은 줄어들고 있다. 지난 수년 사이 비료값은 2배 넘게 폭등했지만 쌀가격은 10년, 20년째 제자리걸음”이라고 했다. 오씨는 국회에서 한창 논의 중인 양곡관리법 개정안에 기대를 걸었다. 한 해 쌀 생산량이 예상량을 초과하면 정부가 그만큼 사들이는 게 개정안의 요지였다.
윤 대통령은 지난해 4월 시장경제 원리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양곡관리법 개정안에 거부권을 행사했다. 오씨는 “농촌 현실을 모르고 하는 소리”라고 했다. 그는 “정부가 쌀을 추가로 사들인다고 해도 ‘현상 유지’만 될 뿐 쌀 생산량이 늘 정도의 유인은 될 수 없다. 생존을 위한 최저보장선을 만들어달라는 절박한 요구를 엄청난 특혜라도 되는 것처럼 호도했다”고 했다.
정치권을 향한 불신은 더 커졌다. 오씨는 “양곡법은 갑자기 튀어나온 이슈가 아니다. 그런데 여당은 자신들이 야당일 때 합의했으면서 정권이 바뀌니 말이 달라졌다”며 “야당도 전임 정부 때부터 이어온 논의를 제대로 마무리짓지 못했다는 점에서 무책임했다”고 했다.
오씨는 앞으로가 더 걱정이라고 했다. 그는 “정부의 농업 정책은 대체로 새만금 개발, 스마트팜 등 대기업의 농업 진출을 도와주는 내용뿐”이라며 “정부는 푸드테크 정책을 내세우지만 영세한 자영농들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이야기다. 청년들에게 농업에 종사하라고 하지만 정작 청년들은 돌아오는 빚 상환을 걱정하는 상황”이라고 했다.
언론노조 KBS본부장 강성원씨는 입사 3년차였던 2008년 당시 정연주 사장 해임 사태를 생생하게 기억한다. 강씨는 “당시 경찰이 KBS 방송국 안으로 침탈해 조합원들을 강제 해산하는 과정에서 폭력 사태도 발생했다”며 “정권이 바뀌었다는 이유로 이런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이사회의 독립성 강화를 골자로 한 방송3법(방송법·방송문화진흥회법·한국교육방송공사법) 개정에 강씨가 팔을 걷어붙인 이유다.
입법 동의 서명을 모으기 위해 광화문에 나가 시민들에게 동참을 호소했다. 악천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거리에 섰지만 3주간 모은 서명이 1만명이 채 안 됐을 때는 자포자기 심정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MBC의 ‘바이든·날리면’ 보도 이후 시민 참여가 폭증했다. 강씨는 “‘5만명 입법 동의’를 받은 순간만큼은 지금도 잊지 못한다. 일주일 만에 4만명가량이 동의해 준 것이 거짓말 같았다”고 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윤 대통령은 지난해 12월 “편향성 강화”를 이유로 방송3법에 거부권을 행사했다. 박민 KBS 사장이 취임한 뒤로 강씨의 우려는 현실이 됐다. 강씨는 “사장이 바뀐 후 ‘전두환씨’에 대한 표현을 ‘전두환 전 대통령’으로 바꾸는 등 생각지도 못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면서 “개정안이 빨리 통과됐다면 이런 일을 막을 수 있었을 것”이라고 했다.
거부권에도 강씨의 의지는 꺾이지 않았다. 강씨는 “총선 이후 법을 논의할 가능성은 열려 있다고 생각한다”며 “공영방송 지배구조 개선 싸움은 계속 이어나가야 한다. 집행부 임기가 끝나도 방송법에 대해 조직 내·외부에 알리는 일은 개인적으로 이어갈 예정”이라고 했다.